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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n Oct 28. 2020

유후의 향기 14 * 완결

由布の香り

나무로 지어진 아주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 유후노카오리(ゆふのかほり‘유후노카호리’라 쓰지만 유후노카오리로 읽는다.)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와플콘에 담긴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언제나처럼 친절한 점원은 미소까지 듬뿍 담아 아이스크림을 건넸고 우린 근처의 벤치에 앉아 유후노카오리 앞으로 펼쳐진 풍경을 마주했다. 하늘은 단지 파랗고 높다는 단순한 형용사로는 설명할 수 없이 복잡하고 깊었다. 그 높고 푸르름에 눈이 시릴 정도였으며 시야의 끝에 펼쳐진 유후다케와 하늘이 함께 어우러진 풍경은 현실과는 멀게 느껴졌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웃집의 토토로’ 같은 작품에 등장하는 한 장면에 더 가까웠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은 잠시 잊은 듯 먼 곳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마치 내가 이 곳에서 저 풍경을 처음 접했을 때처럼. 


"미나씨, 아이스크림 녹아요.”

"아, 네. 이 곳은 참 넋 놓고 바라보게 되는 풍경이 흔하네요.”

"전 이 곳에 온 후로 눈이 맑아진 것 같아요.”

"저도 유후인에 온 지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시야가 뚜렷해졌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서울에서야 워낙 하루 종일 컴퓨터 모니터나 스마트폰 화면만 바라보고 있으니까요.”

"저도 마찬가지였죠. 그런 시각적 공해는 물론이고 오염된 공기에 스트레스에 여러 가지 이유가 더해져 시야는 언제나 뿌옇기만 했는데.”

"아, 정말 돌아가기 싫다.”

"우선 아이스크림 먼저 먹어요. 지금 즐길 수 있는 걸 먼저 최대한 누리고 걱정은 그다음에 해도 돼요. 어디 도망가지 않으니.”

"그래야겠어요.”

"어때요, 맛있어요?”

"어? 많이 달지 않고 우유 맛이 진하게 나네요.”

"맞아요. 유호노카오리 소프트 아이스크림의 특징이죠.”

"그런데 고소하고 단 맛이 점점 진해지는 것 같기도 한대요?.”

"우와, 미나씨 미식가네. 한 입 먹어보고 모든 걸 다 알아버리다니. 보통 이 아이스크림을 다 먹을 때까지 그런 걸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래요?”

"보통 사람들은 맛이 밍밍하고 심심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죠.”

"우리가 일반적으로 먹는 아이스크림은 죄책감이 들 정도로 달콤하니까 그럴 만도 하겠어요.”

"현대인들이 너무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져서 있어요. 그래서 모든 음식이 더 달고 짜고 맵게 변하는 것 같아요. 천천히 음미할 시간이 점점 사라져 가니까요.”

"음식뿐만이 아니라 주위를 둘러보면 모든 게 그런 것 같아요. 더 빠르고 강하고 자극적이고.”

"지쳤어요. 전 그런 것들에 너무 지쳤어요.”

"아이스크림은 달콤한데 우리의 대화는 왠지 씁쓸하네요.”

"그러게요. 씁쓸함은 잊고 달콤함을 즐기죠. 지금 이 순간은.”

"맛있어요, 이 아이스크림. 정말 많이.”

"네, 전 가끔 혼자 이 곳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정신 나간 사람처럼 실실 웃어요. 너무 좋아서.”

"상상이 가네요. 저라도 그럴걸요? 이 아이스크림은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아요. 맛도 맛이지만 이 주변에 펼쳐진 풍경과 지금 우리의 대화 그리고 이 곳의 향기까지.”

"향기? 어떤 향기요?”

"글쎄요, 여기 아이스크림 맛처럼 뭔가 자극적이지 않고 잔잔한 자연의 향기랄까? 공기 중에 그 향기가 자연스럽게 배어 있어서 아이스크림의 맛을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래서 상호가 ‘유후의 향기’ 아닐까 하는 생각도 문득 들었고요.”

"‘유후의 맛’이 아니고 ‘유후의 향기’라...”

"혹시 주인한테 상호에 대해서 물은 적 있어요?”

"이 곳에 처음 왔을 때부터 그러고 싶었는데 아직 안 물어봤어요.”

"왜요?”

"그냥 이 곳을 떠나는 날까지 천천히 음미해 보고 생각해 보게요.”

"그것도 좋겠네요. 혹시라도 알게 된다면 나한테도 알려줘요.”

"그러죠.”


 그녀가 떠난 유후인에는 가을이 찾아왔고 난 컨트리로드 유스호스텔에서 한 달을 더 보냈다. 하루하루 더 느리고 여유롭게 지내려 노력했지만 유후인에서의 두 달은 어느새 과거가 되어 버렸다. 그곳을 떠나던 날 료와 토모미는 날 위해 컨트리로드를 불러주었다. 경쾌하지만 애잔한 노래가 불려지는 동안 이곳에서 보낸 지난 시간들이 스쳐갔다. 다른 이들을 위해 100번도 넘게 불렀던 그 노래가 떠나는 사람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후렴부를 부르다 눈물을 보인 토모미를 보며 울음을 삼켰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환하게 웃어 보이지도 않았으면서.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이별에 익숙해지기는 어려울 것 같다.


 갑자기 울린 전화벨 소리에 놀라 통화 버튼을 누르니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늦을 거라고, 먼저 가 있으라고 했다. 난 그녀와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이름 모를 이자카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자카야에 도착했지만 빈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야외에 마련된 간이 테이블에 앉아 맥주 한 잔을 마시고 있으니 차가운 바람이 날 움츠러들게 했다. 춥지는 않았다. 그저 그녀를 만나 뭐라고 인사를 할지, 무슨 대화를 해야 할지를 생각하며 맥주를 홀짝였다. 긴장감이었다. 첫 데이트의 긴장감.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데이트라기보단 우린 그저 유후인에서 만난 인연을 서울에서 재현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 순간 난 그 긴장감을 즐기고 싶었다. 실망감 혹은 상실감으로 돌아올지도 모르는 그 긴장감을. 식당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꼬치구이의 냄새에 문득 유후의 향기가 스쳤다. 그리곤 그녀가 보였다. 저 멀리서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그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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