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화상통화로 안부를 주고받게 된 호주인 친구이자 옛 동료가 나에게 말했다.
“Koreans tend to be
more ‘competent’ than ‘confident’.”
(한국 사람들은 유능함에 비해서
자신감은 좀 부족한 것 같아.)
글로벌 회사에 근무하면서 여러 나라의 직원들을 상대하는 친구다. 한국 사람들을 좋아한다는 취지로 한 이야기지만 한국인들의 약점을 찌르는 말이기도 했다.
나: "Westerners are usually the other way around, right?" (맞아, 서양사람들은 보통 그 반대지?)
친구: ”Yeah, you know that, hahaha“ (그래, 너도 잘 알잖아. 하하하)
친한 옛 동료와의 유쾌한 대화였지만, 통화가 끝나고 나서 나는 꽤 한참 동안 그 대화를 곱씹어보게 되었다.
“Koreans are super humble."
(한국 사람들은 무지 겸손해.)
친구의 눈에는 한국 사람들은 엄청 겸손한데, 그것이 때로는 ‘자신감 없음(lack of confidence)’으로 비치는 모양이다.
연세대 김주환 교수가 쓴 <회복탄력성>이라는 책에서는 교수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재미있는 연구결과를 소개한다. 학기 초에 처음 만난 학생들에게 자기를 높이는 말투로 자신을 소개하는 교수와, 반대로 자기를 낮추는 겸양의 말투로 자신을 소개하는 교수를 ‘호감도’와 ‘신뢰도’ 측면에서 학생들이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조사해 본 것이다.
그랬더니 미국 학생들은 ’자기낮춤‘ 스타일로 자신을 최대한 겸손하게 소개한 교수에 대해서 호감도는 높았던 반면 신뢰도는 낮게 나왔다고 한다. 반면 한국학생들은 겸손한 스타일의 교수에 대한 신뢰도와 호감도가 둘 다 낮았다. 한마디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춰서 소개한 교수는 동양에서건 서양에서건 ‘실력 없고 무능한‘ 사람으로 비쳤다는 것이다.
저자의 결론은 ‘친한 사람에게는 겸손한 것이 좋지만, 처음 만났거나 잘 모르는 사이일 때는 적당하게 자신의 유능함을 표현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이 보통 이를 반대로 한다는데 있다. 친한 사람에게는 허세를 부리거나 자신을 높이는데 주저함이 없는 반면, 처음 만난 사람에게는 지나치게 자신을 낮춤으로써 겸손을 표현하려 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국사람은 무능하거나 자신감이 부족한 사람으로 저평가되기 십상이다.
겸손이 미덕인 것은 틀림없다. 유학(儒學)에서는 ’겸손하고 양보하는 마음‘인 사양지심(辭讓之心)을 인간의 본성을 가리키는 사단(四端) 중의 하나로 손꼽는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동정심 있고 (측은지심), 의롭고 (수오지심), 겸손하고 (사양지심), 지혜로워야 한다 (시비지심)’는 것이다.
하지만 겸손에는 자신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진정으로 겸손하다면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의 약점을 있는 드러내고 주위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할 줄 알아야 하는데, 자신의 무지함과 취약함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용기와 당당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Think Again>의 저자 아담 그랜트(Adam Grant) 교수는 자신감에 겸손이 겸비되지 않으면 오만한 사람이 되는 반면, 겸손한 사람에게 자신감이 겸비되지 않으면 무능하거나 신뢰하기 힘든 사람으로 휘둘리게 될 수 있다고 경계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겸손과 자신감의 적절한 균형과 조화다. 이를 아담 그랜트는 'Confident Humility (당당한 겸손)'이라고 표현하고, 경영학의 명저 <Good to Great>에서는 ‘Level 5 Leadership (겸손함과 강한 의지가 균형 잡힌, 최고 수준의 리더십)’이라고 표현한다.
나는 예의를 갖춰서 착하고 성실하게 사는데 사람들이 은근히 나를 무시하거나 호구취급하는 느낌이 든다면, 행여나 내가 ‘겸손’이라는 변명 뒤에 숨어 있으면서 나를 믿지도 사랑하지도 않고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일이다.
겸손과 자신감은 반대말이 아니다. 겸손한 만큼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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