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함태진 Aug 30. 2023

가끔 격렬하게 멍 때리고 싶을 때

모처럼 여유로운 오후, 탕비실에 갔다가 커피 머신 앞에서 K 박사를 만났다. 내 인기척도 못느꼈는지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것 같았다. “아니 박사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요?” 내 말에 갑자기 혼자만의 세상에서 현실세계로 휙 빠져나오며 K 박사가 대답했다.


“앗, 대표님?! ㅎㅎㅎ
저 그냥  멍 때리는 중이었어요 ^^*”



예전에는 ’멍 때리는 것‘을 게으르고 할 일 없는 부정적인 것으로 보았다면, 요즘은 멍 때리기가 긍정적으로 장려되는 듯하다. “멍 때리기 대회” 같은 희한한 대회가 뉴스에 나오기도 하고, “불멍“, ”물멍“ 같은 신조어들도 생기는 걸 보면 말이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멍 때리기‘는 스트레스를 완화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고, 또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얻거나 고민하던 문제의 해결책을 떠올리는데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해리 포터>의 작가 J.K. Rowling도 기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멍 때리다가 소설의 줄거리를 떠올렸다고 하지 않는가.


사람마다 멍 때리기 좋아하는 장소와 방법이 하나씩 있을 것이다. 예컨대 “3B”라고 알려진 Bus, Bath, Bed는 창의적인 생각을 얻기 좋다고 알려진 시공간이다. 차(Bus) 안에서 아무 생각 없이 창밖을 바라보거나, 욕실(Bath)에서 샤워기에 얼굴을 들이밀고 하염없이 물을 맞고 있거나, 혹은 잠자리(Bed)에 누워서 잠들기를 기다리며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보면 문득 ‘아하!’ 할 때가 생기는 경험을 누구나 한 번씩 해 본적 있지 않을까? 나는 종종 그런 편이다.


(Photo credit: Unsplash @radpozniakov)




아무리 씨름을 해도 안 나오던 생각이나 해답이 정작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리는 동안 불쑥 튀어나오는 이유는 이렇다. 우리 뇌에는 여러 가지 부위가 있는데 이 중에는 휴식할 때 활성화 되는 부위가 있는 반면 집중해서 생각할 때 활성화되는 부위도 따로 있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심리학자 다니엘 카네만 (Daniel Kahneman) 교수가 <생각에 관한 생각 (원제: Thinking, Fast and Slow)>에서 말했던 System 1, System 2 비슷한 것이라고 보면 되지 않을까?)


이 중 우리가 무엇인가를 의식적으로 열심히 생각할 때 활성화되는 뇌 부위는 다양한 자극을 적극적으로 “걸러내면서” 일하는 스타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와 별로 관련 없어 보인다 싶은 생각들은 바로바로 쳐낸다. 좀 엉뚱하다 싶은 생각들은 애당초 살아남기가 힘든 것이다.


반면 아무 생각 없이 ’멍~‘ 한 상태로 있을 때 활성화되는 뇌 부위는 무의식 속에서 오만가지 생각과 정보들이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활개 치도록 “내버려 두는” 스타일이다. 예기치 못한 합종연횡이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일어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다 보면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나오지 않던  창의적인 문제 해결책이 불쑥 튀어나올 수도 있게 된다.


(Photo: Unsplash @vadimsadovski)


내가 멍 때리고 싶을 때 잘 쓰는 방법은 종이파쇄하기다. 문서파쇄기에 다 쓴 A4 지를 한 장씩 밀어 넣으면 종이가 ‘드르르륵~~’ 소리를 내며 기계 안으로 덜덜덜덜 빨려 들어가는데, 나는 그 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보는 것이 왠지 힐링이 되는 느낌마저 든다. 그래서 어떨 때는 아예 작심하고 그동안 잔뜩 쌓아둔 A4지 뭉치를 한 다발 챙겨서 종이 파쇄기 앞에 10분이고 20분이고 앉아있기도 한다. (단, 소음 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게 민폐가 될 수 있으니 되도록 사람들이 없을 때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




간혹 직원들에게 주말에 좋은 계획이 있느냐고 물으면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할 거예요”라는 대답을 들을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그 앞뒤 모순 같은 표현에 클클클 웃기도 하지만, 실험실에서 연구에 골몰해야 하는 우리 직원들에게는 정말로 ‘멍 때리기’나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기’를 좀 더 장려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커피 머신 쳐다보며 멍 때리고 있던 K 박사처럼 말이다.


마침 오늘 직원들이 일찍 퇴근해서 사무실에 혼자 남아 있는데 나도 오랜만에 묵혀둔 A4 종이나 파쇄하면서 멍 좀 때리다가 퇴근할까 보다.

매거진의 이전글 일로 만난 사이, 마음으로 이해한 동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