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함태진 Sep 02. 2023

신뢰의 속도: 내비게이션에게서 얻은 교훈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


며칠 전, 내비게이션(Navigation) 말을 철석같이 믿고 가다가 낭패를 본 적이 있다. 한참을 운전하는데 아무리 처음 가보는 곳이라지만, 점점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 시간가량을 달리다가 ‘설마?’ 싶어서 중간에 차를 세우고 목적지가 제대로 설정되어 있는지를 확인했더니 아뿔싸... 내비게이션은 아니나 다를까, 나를 엉뚱한 곳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알고 보니 이 날 내가 가려고 했던 동네이름과 똑같은 이름의 식당이 있었나 보다. 보통 나는 차량의 음성인식 시스템을 이용하는데, 내가 가고자 하는 행선지 이름을 말해주면 거의 언제나 내비 언니(?)는 내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고는 길을 안내해 주기 때문에 나는 이번에도 일말의 의심 없이 내비 언니의 안내를 믿고 운전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길 위에서 두 시간을 낭비하게 된 나는 화가 났다. 하필 내가 가려던 동네이름과 똑같은 이름을 쓰는 식당이 있다는 것에도 화가 났고, 또 그 식당이 완전히 엉뚱한 지역에 있다는 것도 화가 났고, 그걸 알지도 못하고 나를 엉뚱한 곳으로 이끌고 있던 내비게이션 언니에게도 화가 났다.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정작 화를 내야 할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식당이야 무슨 이름이든 쓸 수 있는 것이고, 내비게이션은 내가 말한 명칭의 장소로 안내하고 있었을 뿐이니 잘못이 없다. 애당초 내비가 추천한 목적지가 진짜 가려고 하는 곳이 맞는지 확인하지 않은 내가 유일한 잘못의 원인이었다.


이런 일을 겪고 나니, 이제는 내비게이션을 이용할 때마다 진짜 내가 원하는 목적지가 제대로 입력되었는지를 한번 더 확인하게 된다. 시스템에 대한 신뢰의 부족이 일을 조금 더 느리고 불편하게 만든 셈이다.




<Speed of Trust(신뢰의 속도)>라는 책에서는 신뢰가 무너지는 것을 ‘세금을 내는 것’, 신뢰가 높아지는 것은 ‘이자를 받는 것’에 비유한다. 신뢰가 생기면 일을 믿고 맡기게 되니 업무의 속도가 빨라지고 효율성도 함께 올라가지만, 반대로 신뢰가 낮아지면 서로를 잘 믿지 못하니 협업이 원활하지 못하고, 많은 일들을 일일이 다시 확인하게 되다 보면 업무의 속도도 느려지는 점을 비유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같은 책에서는 신뢰를 주고 신뢰를 받으려면 4가지 핵심요소가 갖춰져야 한다고 설명하는데 꽤 설득력이 있어 고개가 끄덕여진다.


Integrity (정직, 성실) - 누군가가 정직하지 않고 거짓말하는 경향이 있다면 당연히 그 사람은 신뢰할 수가 없다.

Intent (의도) - 누군가가 대놓고 거짓말을 하지는 않더라도, 숨은 의도나 동기가 선하고 진실한 것이 아니라면 역시 그 사람을 신뢰하기는 쉽지 않다.

Capability (능력) - 누군가가 정직하고, 나쁜 의도도 없다 하더라도 자신의 말을 실행에 옮길 능력이나 자질이 부족하다면 그 사람 역시 신뢰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서, 회사에서 실험실 연구원을 채용하는데 그 분야를 전공하지도 않았고 경험도 전혀 없는 사람을 단지 ‘성실하고 착하다’는 이유로 뽑아서 일을 ‘믿고’ 맡길 수는 없는 것이다.

Result (결과) - 누군가가 사람도 좋고, 의도도 좋고, 자질이나 능력도 있어 보인다면 신뢰를 위한 거의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셈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정작 원하는 결과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또 그런 상황이 계속 반복된다면? 역시 그 사람에 대한 신뢰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Photo: Unsplash @yulokchan)




개인이 되었건 회사가 되었건 혹은 사회가 되었건 신뢰를 주고 신뢰를 받고 신뢰를 쌓아가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고 발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은 사회의 많은 부분에서 점점 신뢰를 찾기가 어려워지는 듯해서 안타깝다.


피싱(Phishing) 사기가 하도 교묘하게 판을 치니 모르는 전화는 받기도 무섭고, 성과를 부당하게 부풀리거나 조작하는 기업들 때문에 애꿎은 서민 투자자들이 피해를 입기도 한다. 과학자라는 사람들이 약간의 ‘사실’을 많은 ‘주장’과 뒤섞어버리니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어디까지가 믿을 수 있는지 헷갈리고, 진실의 편에 서야 할 언론인들이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기사를 쓰니 뉴스조차도 이제는 다 믿기가 힘든 세상이 되어 버렸다.


우리 주변의 전자기기나 자동차 같은 물건들에서부터 조직, 기업, 단체, 국가에 이르기까지 “신뢰”는 우리 사회를 떠받드는 기초와도 같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연약하고 깨어지기 쉬운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신뢰라는 주춧돌은 우리 모두가 금이 가지 않도록 조심조심 다루고 지켜가야 하는 것이다.


나 스스로부터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더 노력해야겠다. 그리고 누군가를 의지해야 할 때는 무턱대고 믿다가 발등찍히는 멍청이가 되지 않도록 ‘믿더라도 확인하는’ 습관도 꼭 필요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끔 격렬하게 멍 때리고 싶을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