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산책읽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ㅣ Dec 29. 2023

존재와 시간

Sein und Zeit

읽기 전에 읽어보면 좋은 글들

https://brunch.co.kr/@oybk/36

https://brunch.co.kr/@oybk/46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 그는 20세기 현대철학의 효시를 알린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어째서 하이데거가 혁명적인가? 하이데거는 데카르트식의 사유와 자신의 사유의 차이를 밝힘으로써 거기에 내포된 혁명성을 표현해 주었다. 데카르트는 이 세계의 공간성을 수학적, 기하학적, 물리학적으로 분석하였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이것들만으로 세계의 공간성을 분석할 수 없다 생각하였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직접 체험하는 생활세계는 수학적으로 인식하는 장소에 국한되지 않으며, 일상에서 살아 숨 쉬며 배려를 하는 실존론적 세계가 전제되어야 한다 생각하였다. 데카르트는 이 세계의 존재론적인 근본규정을 연장에서 보고 있다. 데카르트의 공간성은 연장의 개념과 거의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하학적 공간성은 인간, 즉 현존재의 공간성을 설명하기엔 적합하지 않다.


"우리가 세계에 대한 해석의 단초를 우선 하나의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에서 잡을 경우 세계 일반의 현상을 더 이상 시야로 데려올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 단초를 아마도 그것의 가장 극단적인 수행에서 존재론적으로 분명하게 하려고 시도해 보자. 우리는 데카르트에거서의 '세계' 존재론의 근본특징에 대해서 간략하게 서술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의 전제에 대해서도 물음을 던져 이 전제를 지금까지 획득한 것의 빛 안에서 성격규정지어보려고 한다. 이 논의는 어떤 원친적으로 토의되지 않은 존재론적인 '기초' 위에서, 데카르트 이전은 말할 것도 없고, 데카르트 이후의 세계에 대한 해석이 움직이고 있는지를 인식하도록 해 줄 것이다." -존재와 시간 p.127


1. 데카르트의 연장으로서의 세계


 데카르트는 사물을 사유하는 사물(ego cogito)과 물체적 사물(res corporea)로 구별하여 대립시켰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이러한 대립의 근거 규정으로서 ‘존재 자체’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지 않다. 데카르트의 사유 안에서 존재자의 존재는 실체(substantia)를 의미한다. 데카르트는 실체라는 의미를 ‘존재자의 존재’의 의미(실체성)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존재자 자체’의 의미(일자)로도 사용한다. 이러한 의미의 혼용이 연장된 사물의 존재론적 규정인 ‘존재 자체’에 대한 사유에 혼동을 주고 있다. 물체적 실체의 실체성(존재자의 존재)은 길이, 폭, 깊이와 같은 연장이다. 연장은 물체들의 속성을 규정하는 분할, 형태, 운동에 앞서 이것들의 근거가 된다. 모든 물체들은 연장의 전제하에 설명되며 규정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연장의 보편성을 전제하는 사유는 어떠한 것에 의하여 근거되는 것인가? 하나의 물체는 물체의 총량의 변화 없이 배분을 바꾸며 분할되고 결합되어 변화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 속에서 물체의 분할, 형태의 변화, 운동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물체의 연장은 변화되지 않고 물체의 존재를 간직한다. 그러므로 물체사물의 지속적인 머무름을 만족시키는 연장이 실체의 실체성도 규정한다.


 연장된 사물들의 존재론적인 특징은 실체성이다. ‘존재자 자체’의 의미로서의 실체는 존재하기 위하여 다른 어떠한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존재자는 가장 완전한 존재자로 이해되고 있는데, 이것은 존재론적인 칭호로 신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의 사유에서 모든 존재하는 사물들은 신의 도움으로 존재하는 것이 된다. 신이 아닌 모든 존재자들은 넓은 의미에서 제작과 유지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신이 아닌 모든 존재자들은 창조된 존재자들이다. 신과 창조된 존재자들 사이에는 무한한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신과 창조된 존재자를 모두 존재자라 칭한다. 따라서 존재의 의미는 무한한 차이를 포괄할 정도로 넓은 의미에서 사용되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존재의 의미를 어떻게 해명하고 있는가? “신이 존재한다.”라는 명제와 “창조된 존재자가 존재한다.”라는 명제에서 사용된 존재한다 사이에는 무한한 차이가 있다. 신의 초월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스콜라 철학자들은 이때 존재한다는 의미를 단순히 같은 기능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유비적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데카르트는 존재의 이해에 대한 물음을 논의하지 않고 회피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이데거는 과거의 철학들이 존재의 의미는 탐구되지 않은 채로 당연히 그것을 자명한 것으로만 여겼다며 비판한다. 데카르트의 연장개념에 기반한 세계는 존재의미에 대한 의미가 설명되지 않은 모호한 토대 위에서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이데거는 “사태 자체”로 돌아가 근원적인 문제로 과감하게 뛰어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말한다.


 데카르트의 세계 존재론은 세계의 현상을 어떻게 밝히고 있는가? 데카르트의 공간개념은 세계 내부의 존재자들을 오로지 기하학적 연장의 의미에서만 파악하고 있다. 자연과학적 탐구에서는 이러한 파악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파악에서는 현존재가 다른 존재자들과 관계를 맺는 생활하는 세계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데카르트는 세계 내의 존재자들을 인식하는 방식을 오로지 수학적-물리학적 인식으로 한정하고 있다. 수학적 인식은 존재자를 어떠한 방식으로 항상 늘 그렇듯이 있을 것이라 간주한다. 그것이 존재자의 영속적인 본질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학적 인식에는 지속적인 머무름이 전제된다. 하지만 이러한 수학적 인식에는 존재자의 역사성, 시간성, 유한성을 담지 못한다. 데카르트의 수학적 인식을 기반으로 하는 세계의 세계성은 “그것이 항상 그렇게 있음”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세계에 대한 인식은 후설이 앞서 밝혔던 것처럼, ‘사태 그 자체’를 보지 못한다.


 데카르트는 세계를 주체와 객체가 확실하게 분리되어 있어, 주체가 객체를 탐구하고 사용할 수 있는 세계성을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세계성은 세계 내부의 존재자의 ‘손안에 있음’을 논하지 못하며 이를 건너뛰어 ‘눈 앞에 있음’만을 논하고 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눈 앞에 있음’ 이전에 현존재의 일상성이 담겨있는 ‘손 안에 있음’이 선행하여 열려있다. 데카르트에게 수학적 인식은 그의 철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나, 데카르트의 수학적 인식은 삶의 일상성이 결여된 인식일 수밖에 없다. 현존재의 근본구성틀을 가지고 있는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은 세계와 더불어 다양한 사물들의 존재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존재의미들에 따라서 삶을 영위한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존재론적 기반을 생략한 채 세계를 분석하고 있다. 데카르트는 연장된 사물과 사유하는 사물로 자아와 세계의 문제를 제기하려 했으나, 감각을 무시하고 지성을 중요시하는 정통적 형이상학적 방향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


 데카르트의 세계분석, ‘손 안에 있음’에 이를 수 있는 데카르트식 도구분석은 단순하게 자연사물을 쉽게 사용사물로 보충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이런 도구분석은 사물의 존재론적 기반, 연관과 관계 안에서 밝혀지는 존재사건과 존재의미와 같은 것들은 분석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분석은 사물의 존재방식을 가진 한 존재자의 존재적 규정만 있을 뿐, 사태 전체의 연관이 고려된 존재론적 보충은 고려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식 도구분석은 역시 인간의 삶이 들어갈 자리가 확보되지 못한다. 삶의 연관 안에서 인간이 일상성에서 살아가는 경험, 생활세계의 경험은 사물적으로 의도된 존재자의 개념만으로는 이해될 수 없다. 사물에 어떠한 가치가 부여되어 있다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자연사물을 도구적인 사용사물로 재구성한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 이러한 현상들에 전제되어 있는 인간 현존재의 기초존재론의 분석 없이는 이러한 현상들의 의미는 해명되기 힘들 것이다.


"사람들은 '존재는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내용 없는 개념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개념으로서의 존재개념은 그것에 대한 그 어떠한 개념정의의 시도도 거부한다. 이러한 가장 보편적인 개념, 따라서 정의할 수 수없는 개념은 또한 어떠한 정의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모두가 다 그 개념을 항상 사용하고 있으며 또한 그 개념이 그때마다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미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은닉되어 있으면서 고대의 철학함을 동요 속에 몰아넣었고 그 속에 붙들어 놓았던 그것이 일종의 태양과 같은 명백한 자명성이 되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해서 아직도 묻는 사람은 방법적인 오류를 저질렀다고 해서 문책받게 되었다." -존재와 시간 p.15


2. 하이데거의 기초 존재론적 세계성 분석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세계-내-존재이다. 이런 고찰의 중요성은 전통 철학에서 잘 감춰져 왔다. 전통 철학은 주로 자기의식이나 도덕적 의무감과 같은 실천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자기의식이나 도덕적 의무감을 세계와 자신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탐구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세계와 동떨어져 있는 존재로만 바라보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접근은 자기 발견의 기본적 형태에 초점을 맞춘다. "나는 나에게 문제가 되는 무엇이다"라는 질문에서 시작하여, 나 자신은 주변 사람들과 그 안에서 나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와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말 그대로 세계-내-존재이다. 세계는 나 자신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거주하는 친숙한 장소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세계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체와 객체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객체 사이, 그리고 그 사이의 철학을 탐구해야 한다. 인간은 단순히 연장된 객체들의 체계 안에서 특정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세계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세계 안에서의 삶은 자신이 사는 세계를 친숙하게 경험하고, 그 주위에서 나아가는 것, 이해 안에서의 이해이다.

 

  세계-내-존재라는 개념은 현존재의 근본적인 구성 틀이다. 인간의 경험과 행위의 모든 형태는 세계-내-존재가 특정한 형식들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가 존재하려는 방식의 규정을 행위에서 수행하며, 이 행위는 항상 세계와의 연관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연관이 하나의 규정된 연관으로 유지되는 한, 우리가 행위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항상 이미 확정되어 있는 것이다. 세계는 사물과의 관계에서 다양한 행위의 가능성들을 우리를 위해 미리 준비해놓고 있다. 인간은 그때마다 제시된 가능성 중 하나를 선택하여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선택은 인간이 그 자체에 기인하는 현존재의 연관 속에 항상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존재가 세계와 함께 형성되어 가는 과정 중에, 인간은 규정된 방식으로 세계 안에 존재할 뿐만 아니라, 이 규정성 속에 무규정성이나 틈이 작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


 현존재가 그 자체에 기인하도록 하는 것들을 모두 주관적인 관심으로 이끌어 올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세계에는 무한한 것들이 있으며, 주관적으로 모든 가능성에 관심을 가질 수는 없다. 무규정적인 관점에서 현존재는 어떤 것을 그 자체에 기인하도록 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현존재가 규정된 것에 주관적으로 관심을 가짐으로써 경험하는 공간은 불확정하고 비명시적이다. 인간이 세계 안에 존재함으로써, 인간은 규정된 것으로서만 존재하는 것뿐만 아니라, 무규정적으로도 존재한다. 세계의 무규정성은 우리 자신의 무규정성이며, 세계는 현존재의 자유로운 행위의 공간이기 때문에 세계의 무규정성은 우리에게 자유를 형성한다.


 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에 따르면 세계는 본질적으로 ‘공동세계’(Mitwelt)이다. 현존재는 규정된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하려고 할 때, 타인이 그것에 대해 본질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어떤 인간도 자신이 존재하고 행동하는 것이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 주장할 수 없다. 새로운 것처럼 보이는 행위에도 그것은 이미 타인에 의해 실현된 존재 가능성과 행동 가능성으로 향하고 있다. 더불어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 가능성과 행동 가능성을 판단하는 한, 현존재가 존재하고 행위하려는 방식의 선택에도 서로 의존하고 있다.


 공동세계는 존재하고 행위할 수 있는 가능성들을 규정하고 있는데, 그것은 부자유한 영역으로 여겨진다. 공동세계는 현존재를 다양한 선택적 상황에 직면시켜 현존재를 규정된, 이미 현실화된 관계로 향하게 하는 규정성의 영역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것인가라는 물음은 근본적으로 자유롭게 제기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모든 일상적인 결심은 이미 앞서 제시된 가능성을 따라 움직이고, 그 결심은 항상 이미 규정된 운동들 속에서 작용한다. 공동세계 전체는 현존재가 행동하는 태도와 다양한 가능성들을 앞서 규정한다. 그러나 특정한 인물에 의해 생겨나야 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들’(das Man)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공동세계의 부자유함은 익명성을 띤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대로 공동세계에는 이미 규정된 부자유함뿐만이 아니라, 규정성을 밝혀나가는 중요한 역할도 있다. 현존재의 무규정성은 결코 완전히 규정으로 옮겨질 수 없다. 무규정성은 모든 규정성을 상대화하며, 이는 현존재에서 위협적으로 경험된다. 무규정성에 대한 명시적 경험은 현존재의 본질적 경험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규정성이 무규정성을 통해 제한된 것으로서 투명하게 드러나려면 공동세계의 외적인 규정성 또한 현존재의 무규정성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그때부터 인간들은 자신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해 타인에게 과도한 요구를 하지 않고, 대신 타인에게 자유를 부여한다. 이러한 타인은 자기 자신이자 그들이 될 수 있다. 현존재가 항상 그 자체에 기인하여 세계에 속한다면, 현존재 그 자체는 무규정적이다. 또한 행위의 관계 맺음의 가능성을 모두 개관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현존재는 무규정적이다. 이는 무수히 많은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존재의 상호적 관계는 무규정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규정과 함께 무규정성에 놓여있는 현존재는 서로를 경험할 수 있다. 누구도 자신이 내맡겨진 상태에서만 알려질 수 있지 않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이러한 현존재의 개념을 하이데거는 '열어 밝혀져 있음' (Erschlossenheit)이라고 표현했다. 종합하면, 무규정성은 현존재의 존재이며, 현존재는 '열어 밝혀져 있음'이다. '열어 밝혀져 있음'은 직접적인 앎, 자신이 가능존재임을 깨닫는 것이다. 이러한 앎은 현존재를 규정하지 않고, 오히려 현존재 자체가 앎이다. '열어 밝혀져 있음'은 존재하면서 동시에 직접적인 존재 이해이다.


"세계의 세계성에 대한 분석은 끊임없이 세계-내-존재라는 현상 전체를 시야에 데려왔는데, 이때 그 모든 구성계기들을 세계현상 자체처럼 똑같이 현상적인 명확성에서 부각하지는 못했다.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인 해석은 세계내부적으로 손안에 있는 것에 대한 고찰을 먼저 행했는데, 그 이유는 현존재가 그의 일상성에서 -이것과 관련해서 현존재가 계속 주체화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하나의 세계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세계에 대해서 하나의 지배적인 존재양식으로 관계 맺고 있기 때문이다. 현존재는 우선 대개 그의 세계에 사로잡혀 [마음 빼앗기고] 있다." -존재와 시간 p.159


 이러한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세계 이해는 과학적 명료함에 기반한 근대철학적 세계성의 한계를 명확히 밝혀주었다. 현시대에 사는 우리는 세계를 근본적으로 파악하려면 하이데거의 말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서양철학사가 플라톤의 주석이라 표현될 수 있다면, 현대의 대륙철학은 어쩌면 하이데거에 대한 주석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경험실증주의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믿음이 표현되지 못한 일상들을 망각시키고 있는 건 아닌지, 하이데거를 통해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지금까지 쓰여있는 글들을 이해했을지 의문이 든다. 아마도 필자의 글쓰기가 미숙할뿐더러, 담고자 하는 내용이 철학을 처음 접하는 자들에게는 부담스럽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하지만 모든 학문은 (우리가 마치 예술을 체화시키는 것처럼) 체험을 바탕으로 느껴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철학을 공부하는 데에는 기존의 지식을 바탕으로 단편적인 해석만을 추가해 가는 것이 아닌, 새로운 세계 속에 내던져져 체험해 가는 방식의 경험의 축적이 더욱 깊고 즐거운 이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니 예술이 학문과 같듯이, 학문도 예술과 같다. 먼저 느끼고, 소통하고, 즐겼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상의 황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