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살지만, 혼자만의 공간을 위해 떠났다.
서울에 1인 숙소가 몇 곳 있다는 걸 알게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 한 곳에 다녀왔다. '북어나잇 시인의 집'이라는 한옥스테이다.
1인 한옥 숙소로 여성만 묵을 수 있는 곳이며, 감성 스테이로 인기가 많은 숙소였다. 예약 마감된 날이 많은데, 나는 운 좋게 바로 다음 날 묵을 수 있었다. (당일 예약 X)
북어나잇 시인의 집. 책과 시인 그리고 고요한 밤이 떠오르는 숙소 이름부터 마음에 들었다. 이름대로 고요하고 감성적인 밤과 어울리는 북스테이이며, 실제로 노천명 시인이 살았던 집이라고 한다. 여성만 그리고 객실당 1인만 묵을 수 있다. 숙소에 도착하면 '이화한옥'이라는 팻말을 보게 된다. 이 숙소의 또 다른 이름인 것 같았다. 여성들만 묵을 수 있는 숙소의 특성과 잘 맞는 이름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투숙객만 여성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곳에 살았던 노천명 시인도 여성이며, 이 숙소를 운영하는 주인도 여성이라고 한다.
1인 숙소, 작은 한옥, 북스테이, 여성만 묵을 수 있는 숙소, 실제로 시인이 살았던 곳, 그 시인과 숙소를 운영하는 주인도 여성이라는 점까지 흥미로운 점이 참 많은 곳이었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경복궁역에 도착하여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 동네가 처음이 아닌데도 여행객이라도 된듯 눈과 고개를 바삐 움직이며 서촌의 풍경을 감상했다. 한옥과 서양의 조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동네는 참 아름답다.
서촌 외에 안국 북촌, 삼청동, 인사동 등과 같이 '고즈넉, 세련됨, 편안함, 아늑함, 여행객과 현지인, 젊음'의 매력이 조화를 이루는 동네 또는 그중 하나의 매력이라도 있는 동네에 가면 눈이 반짝거린다. 몇 번을 가도 처음 온 것처럼 곳곳을 눈에 담아보곤 한다.
내가 원하는 매력들을 모두 가진 동네에 가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포근해진다. 특히 한글 간판이 많은 동네에 가면 괜히 흐뭇한 기분까지 들어 신이 난다. 이런 기분을 온전히 느끼고 곳곳을 눈에 담아야 하므로 혼자 또는 매우 매우 편한 사람과 가는 걸 더 선호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그것대로 좋다. 그런 동네의 매력을 누군가와 함께 즐긴다는 것만으로도 좋으니까.
그런 동네에 가거나 스치기라도 하면, '내가 사는 서울이 갑갑하지만은 않구나, 서울에 온기가 있는 곳이 있네'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조급한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힐링이 됐었다. (그러고 보니, 서울에 내가 좋아하는 동네들이 있었네) 하지만 이런저런 핑계로 한동안 가지 못하다가 그중 한 동네에 오랜만에 갔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여기에 하룻밤 묵을 수 있다니, 어찌 안 설렐 수 있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주변과 내비게이션 앱을 번갈아 보며 걸으니 어느새 숙소 근처에 다다랐다. 나는 눈 앞에 펼쳐진 옹기종기 모여있는 한옥과 많은 대문에 당황했다. 대부분 한옥이 모여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그때 왜 그렇게 놀랐는지 모르겠다. 더 놀랐던 건, 이화한옥 팻말이 붙어 있는 대문이 한둘이 아니었다는 거다. 다행히 숙소는 여기가 아니라는 의미를 담은 친절한 문구를 발견하기도 했고, 대문이 많으니 놀라지 말라며 빨간색 화분을 찾아오라는 안내 문자 내용이 떠올라서 평정심을 찾을 수 있었다.
비슷한 듯 다른 대문들을 거치니 빨간색 화분이 바로 보였다. 한옥의 대문과 예스러운 디자인의 화분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마치 잡지에 나올 법한 조화였다. 미리 알아본 정보대로 대문에는 도어락이 있었다. 사진으로 봤을 때는 아무 느낌 없었는데, 실제로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고즈넉한 대문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도어락이 붙어있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웃겼다. 그래도 생각보다 잘 어울린다는 생각하는 나를 보며 또 웃고.... 도어락 하나에 그렇게까지 피식댔던 적은 처음이다.
안내받은 비밀번호를 누르니 띠릭 소리와 함께 잠금이 풀렸다. 그 순간, 내 고삐도 함께 풀려 설렘도는 치솟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중정이자 마당이 보였다. 작은 한옥인 만큼 마당도 작았는데, 그렇다고 너무 작은 것도 아니어서 혼자 머물기에 딱 좋았다. ㅁ 자 모양으로 둘러싸인 한옥에 가운데의 마당에는 화분이 나란히 놓여있었는데, 안정감이 느껴졌다. 마당은 관리가 잘 되어있었다.
들어선 상태에서 좌측 마루에는 엽서, 주인의 손글씨로 적힌 메모, 북어나잇 스탬프, 요가매트, 소독스프레이, 물티슈, 주광색의 작은 조명, 꽃이 놓여 있었다. 맞은편에는 두툼한 방명록 노트가 있었다. 한쪽 마루에는 귀여운 활로윈 소품들, 단호박, 전신거울, 몇 권의 책이 있었다.
한옥과 잘 어울리는 작은 상 위에 있는 주인의 메모를 읽어봤다. 그 메모에는 '카드는 한 장씩 가져가셔도 좋아요 :) (스스로한테 카드 쓰는 것 어떠세요?)'라고 쓰여있었다. 짧은 문장에서 주인의 섬세함과 감성, 투숙객을 향한 애정이 확 느껴졌다. 특히 스스로한테 카드 쓰는 것 어떠냐고 묻는 문장이 참 좋았다.
나는 어느새 엽서를 꼭 쥐고 있었다.
객실은 3개였던 걸로 기억한다. 각 객실 문에 도어락이 설치되어 있었다. 창호지 문에 도어락이 달린 모양새가 매우 웃기고, 귀여웠다. 대문에 달린 도어락을 봤을 때보다 더 웃겨서 조용히 킥킥댔다.
문고리마다 오리, 개구리 등 인형이 걸려있었다. 호수 역할을 작고 귀여운 인형들이 대신 해주었다. 내가 배정받은 방은 개구리 방이었다. 안내받은 객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도어락 달린 창호지 문을 열었다. 바로 방이 보일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안에 문이 또 있었고 도어락이 달린 문은 그냥 문창살만 있는 유리문이었다. 안쪽에 있는 미닫이 창호지 문이 유리에 비쳐 보였던 거다. 대문과 각 객실에 도어락이 있는 건 알고 있었다. 그거 하나 믿고, 혼자 한옥에 머무를 수 있겠다 싶어 예약한 것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문이 하나 더 있는 건 몰랐다. 여성들이 혼자 묵는 숙소인 만큼 주인이 신경을 많이 쓴 듯했다.
미닫이 창호지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세상과 단절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바깥 소음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고요했다. 평소 너무 조용한 곳에 가면 너무 조심스러워서 부담되는데, 그곳의 고요함은 이상하게도 부담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했다. 그곳만의 안온함에 나는 빠르게 스며들었다. 은은하게 나던 편백 향마저 좋았다.
고즈넉하고 아늑한 한옥과 잘 어울리는 옛 정취가 느껴지는 물건들로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한옥'하면 바로 떠오르는 서까래와 기둥 그리고 양단이불, 사극에서 많이 보던 거울 달린 전통 보석함, 한약장처럼 생긴 전통 서랍, 나무행거, 창호지 창문이 있었다. 나무행거는 처음 본 모양과 구조라 신기해서 한참을 들여다봤다. 침대 머리맡에 있는 창호지 창문을 열면 들어올 때 봤던 마당이 보였다. 도시 고층 빌딩 뷰만 내려다보다가 마당의 정겹고, 아기자기하고 아늑한 모습을 보니 새로웠다. 서울 서촌 여행이 아니라 시골 어느 작은 마을에 여행 온 것 같았다. 내가 갔던 날은 막 추워졌을 때라서 난방을 틀었는데, 금세 방이 훈훈해지고 바닥도 따뜻했다. 에어컨도 있는 걸 보면, 여름에 와도 시원하게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벌레만 없다면)
한쪽에는 수건과 드라이기 칫솔과 치약, 일회용 샤워타올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수건이 좀 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했다. 그 옆으로는 방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화이트 앤 우드 책상과 우드의자가 있었다. 책상 위에는 스탠드와 몇 권의 책, 방명록, 펜, 컵과 티백, 커피포트가 올려져 있었다. 책상 옆에는 작은 냉장고가 있었다.
곳곳에 조명도 있었다. 예스러운 조명은 아니었지만, 한옥의 분위기에 방해되지 않는 아기자기한 모양이었다. 조명의 색은 따스한 느낌이 드는 주광색이었다. 따스하고 아늑한 한옥과 잘 어울리는 조명이었다.
방 안은 전체적으로 깔끔, 깨끗했는데 화장실도 매우 청결했다. 화장실은 편백투성이라 편백향이 방보다 더 진했다. 세면대와 좌변기, 욕조는 현대식이었다. 욕조는 세라믹 욕조에 편백으로 감싸져 있었는데, 나무에 습기가 차 있거나 곰팡이가 생긴 곳이 하나도 없었다. 원래의 색과 결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무는 물과 세제, 습기에 매우 약한 걸로 아는데, 이렇게까지 유지하려면 얼마나 정성과 애정을 들여서 관리하는 걸까. 이 숙소의 주인분은 매우 부지런하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실에 환풍기가 있어서 환기가 잘 됐다. 들어갔을 때 습한 기운 하나 없었고, 반신욕을 하고 난 뒤 물도 빨리 말라서 뽀송뽀송, 청결하게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었다. 화장실은 한옥이라 습기와 청결도, 이용의 불편함이 조금 걱정됐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북어나잇 시인의 집은 고전과 현대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한옥이었다. 전통의 미를 느끼며, 현대의 편리함을 누릴 수 있어서 처음 한옥을 경험하기에 좋은 숙소였다. 더불어 주인의 정성 어린 손길이 묻은 흔적이 곳곳에 있어서 따스함을 한껏 느낄 수 있고, 그 따스함에 잠시 기댈 수 있었던 곳이었다.
숙소 탐색과 적응을 마친 후, 의자에 가만히 앉아 멍때리다가 침대로 가서 철퍼덕 누웠다. 대자로 누운 채로 서까래 천장을 멀뚱멀뚱 쳐다봤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 편안하게 눕고 쉰 적이 얼마 만일까? 이렇게 집 같은 곳에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간이 귀하게 느껴졌다. 이런 귀한 시간의 주인공이 나라는 사실에 힘들고 지쳐있던 마음에 조금 활기가 돌았다.
모처럼 평화로운 쉼에 몸은 좀처럼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래도 맛있는 간식 겸 저녁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내 몸을 살살 달래 일으켰다. 방에서 나오니 다른 여성 투숙객분의 운동화가 다른 방 앞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운동화 한 켤레가 괜히 든든했다.
골목을 지나 금성고로케에서 카레고추치즈고로케와 통인스윗에서 에그타르트와 레몬타르트 그리고 따뜻한 루이보스차를 샀다. 간식 겸 저녁거리들을 안고 다시 숙소로 돌아와 고로케만 들고 마당으로 나왔다. 이 숙소는 식사가 금지되어 있다. 간단한 간식거리만 먹을 수 있는데, 고로케가 식사류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마당에서 먹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얼결에, 마당에서 먹게 됐지만 그 시간이 좋았다. 내 방 앞 마루에 앉아 마당을 찬찬히 둘러보고, 위를 올려다보기도 하고, 화분들을 보며 고로케를 먹으니 디지털기기나 음악이라는 밥친구가 없어도 괜찮았다. 카레향과 매운맛이 적절하고 쭉쭉 늘어나는 치즈가 들어간 고로케도 맛있었다. 다음에 또 사먹고 싶은 맛이었다. 서둘러 고로케를 다 먹고, 요가매트를 챙겨 방으로 돌아왔다.
욕조에 물을 받아 체크인하기 전에 사놓은 입욕제를 풀었다. 순식간에 푸른빛의 물로 변하는 걸 보니 설레었다.
'참, 나 이런 거 좋아했었지.'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음악을 들으며 기다리니 벌써 욕조에는 물이 반 넘게 차올라있었다. 들뜬 마음으로 반신욕 할 준비를 하고 욕조에 들어갔다. 따뜻한 온기와 기분 좋은 향의 얇은 막이 스르륵 하며 부드럽게 내 몸에 붙는 것 같았다. 그 느낌에 켜켜이 쌓여 있었던 몸과 마음의 피로가 풀렸다.
반신욕을 하고 나오니 입욕제의 잔향이 몸에 남아있었고, 피부가 보들보들했다. 체크인하기 전에 미리 샀던 탄산음료까지 시원하게 마시니 완벽하게 기분이 좋았다. 다음에 또 오면, 그땐 맥주를 마셔야겠다.
옷을 입고 요가매트 위에 누워 눈을 감고 명상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시간에 '명상'이라는 이름을 달아본 적도 없었고. 누가 시켜서가 아닌 스스로 명상 시간을 가져 본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아마 평소 생각을 많이 해서 명상 시간을 따로 만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해보니 꽤 괜찮았다. 처음에는 이리저리 얽힌 생각을 정리해 보기도 하고, 새로운 발상을 떠올리기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나의 숨소리에 집중하기도 했다.
짧은 명상 시간이 끝난 후, 요가매트 위에서 스트레칭했다. 그동안 개인적인 이유로 집에서 스트레칭을 못했는데, 오랜만에 스트레칭해서 좋았다. 비록 내 집은 아니지만 주거, 가정집의 느낌이 나는 공간에서 스트레칭을 한 건 매우 오랜만이었다.
스트레칭 하다가 또 '참, 나 이런 거 좋아했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그 생각을 두 번이나 했다는 걸 인지하면서 자연스럽게 '좋아했던 소소한 일상 루틴 되찾기' 시간이 되었다. 잃어버렸던 걸 이 한옥이 다시 찾아줬다.
반신욕은 환경상 불가능하여 평소 하는 일상 루틴이 아니다. 하지만 여행 중 숙소에서 깨끗하게 관리 된 욕조를 보면 꼭 반신욕을 했다. 반신욕은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 목욕탕에 가면 탕에 들어가 꽤 오랫동안 안 나왔다. 지금은 어지러워서 그때만큼 오래 못하지만, 반신욕 하는 걸 좋아한다.
평소에는 반신욕을 못 하는 대신, 샤워할 때 따뜻한 물로 찜질하듯이 했다. 워낙 따뜻한 물을 좋아하다 보니 세수할 때도 따뜻한 물로 해서 볼이 빨개지고 모공이 넓어질 정도였다. 그래서 항상 연인에게 잔소리를 들었다. 피부묘기증에 걸린 후로 자극에 민감하기 때문에 이 습관을 고치고 있는데, 잘 안된다.
스트레칭도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거였다. 일상에서 하진 않았지만, 엄마 따라 방학 동안만 에어로빅 학원에 다녔었는데 스트레칭 시간이 제일 재밌었다. 그 후에는 스트레칭을 평소에 하지 않았지만, 다치고 건강이 악화되면서 스트레칭하는 습관을 기르려고 노력했다.
다치고, 아픈 게 연속으로 겹치면서 쎈 약물과 함께 누워만 지내며 나이 앞자리도 바뀌다 보니 체질도 변하는 것 같았다. 전에 비해 살도 찌고, 체력도 약해지고, 잔병치레는 더욱 많아지고, 목 통증과 엉치 통증은 점점 더 심해졌다. 내몸과 친해진 후, 몸을 위해 운동을 시작했지만 워낙 어릴때부터 운동을 싫어했던터라 중간에 그만두고 싶었던 적도 많았다. 어떨 때는 운동을 하는 도중에, 수업을 듣다가 도망치고 싶었다. 그래도 스트레칭할 때만큼은 신이 났다. 운동은 빼버리고 스트레칭만 한 시간 내내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움츠려 있었던 몸을 피고 늘리면서 시원하고 뼈마디가 펴지는 느낌이 좋았다. 그러면서 내가 스트레칭을 참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됐고, 일상 루틴에 스트레칭하는 걸 넣고 가끔 빼먹긴 해도, 열심히 지켰다.
개운하고 가뿐해진 몸을 요가매트 위에 누운 다음 마무리하는 의미로 음악을 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음악에만 집중하는 순간이 짧았지만 좋았다. 음악에만 집중하는 것도 내가 좋아하는 일상 루틴 중 하나다.
몸과 마음을 재정비한 다음, 의자에 앉아 통인스윗에서 사 온 에그타르트와 레몬타르트를 먹고, 루이보스차를 마셨다. 에그타르트는 평범했지만, 레몬타르트는 상큼하니 내 취향이었다. 그러나 기대만큼은 아니어서 살짝 아쉬웠다. 그래도 따뜻한 루이보스차는 매우 만족했다. 그 차도 평범했고, 특별한 맛이랄 건 없었지만 한옥과 매우 잘 어울리는 차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루이보스 향과 따스한 온도가 이 한옥과 매우 닮아있었다. 얼마나 흡족해하며 홀짝였는지 모른다.
2차 간식타임을 끝내고, 비치된 책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책 제목들이 모두 나를 향해 하는 말 또는 나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신기해서 연인에게 사진을 찍어 보냈는데, 그도 딱 나라며 놀라워했다. 나는 그중 책을 하나 골라 몇 페이지 읽었는데 책 내용도 좋았지만, 메모와 밑줄로 주인의 생각과 감성을 엿 볼 수 있었던 점이 더 좋았다. 주인의 생각이나 감성의 결이 나와 잘 맞았다. 책과 내용에 대한 애정을 기록한 것들을 보며 순간 흔들렸다. 난 책에 밑줄이나 메모를 하지 않는다. 인상 깊은 구절이 있으면 따로 어딘가에 메모해 놓거나 사진으로 남겨둔다. 애정의 흔적이 곳곳에 있는 책을 보면서 이런 독서 방법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독서를 짧게 끝내고 미리 사 온 과자로 3차 간식타임을 가진 다음, 멍하니 앉아있었다. 부담스럽지 않은 고요함과 적막함, 편안함, 경건함, 포근함, 따뜻함, 고즈넉함 이 모든 것들은 다른 곳에서도 느낄 수 있지만 그곳만의 색이 있었다. 그 색을 더 깊이 느끼고 싶어서 굳이 무언가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음악보다는 고요함을 들었고, 책보다는 그 공간이 내게 전하는 메시지를 읽었다. 그렇게 하고 있으니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급했던 성미가 느긋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마음과 자세로 방명록을 읽었다. 사실 반신욕 하기 전에 너무 궁금해 살짝 읽었는데, 그때부터 울컥해서 나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첫 페이지를 열었다. 그런데도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마음의 준비가 부족했던 건가. 아니면 그 공간이 주는 힘 때문에 내가 풀어진 걸까. 어떤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후로 나는 다 읽을 때까지 하염없이 울었다. 전날, 어떠한 일 때문에 갑자기 그간의 힘듦이 몰려와 울어버렸는데 울지 않았던 사람처럼 금세 마음을 추슬렀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추스를 새도 없이 눈물이 쏟아졌고, 쉽게 멈추지 않았다.
방명록에는 많은 고민과 사연, 감정, 마음, 생각, 다짐들이 있었다. 서로를 응원하며 위로해 주기도 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도 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다녀간 여성 투숙객들이 끈끈한 우정의 끈으로 이어져 있는 것 같았다. 중간에는 주인의 글도 있었다. 투숙객들을 향한 애정과 고마움이 담겨 있어서 더 따뜻했다.
신기한 건, 날짜가 대부분 이어졌다. 바톤터치나 약속을 한 거처럼 비어 있는 날짜가 거의 없이 매일 방명록 노트에는 투숙객들의 마음이 기록됐다.
글들을 읽으면서 동질감, 공감, 희망, 위로, 따뜻함을 느꼈다. 완벽히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마음이 한결 좋아졌다. 그래서 노트에 나의 힘든 사연 중 한 가지를 털어놓은 후, 희망찬 글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내 희망찬 마무리로 다른 투숙객분들이 용기와 위로를 얻고 다시 힘차게 살아갔으면 했다. (사실 이 바람이 더 컸다)
마음을 겨우 추스른 후, 혼자만의 고요한 밤을 즐겼다. 나는 혼자 밤의 시간을 보내며 생각을 정리하고 밤에만 느낄 수 있는 감성을 느끼는 걸 좋아했는데, 불안 때문에 늘 무언가를 틀어놓았다. 보든 보지 않든 상관없이. 오랜만에 고요한 공간에서 조용히 밤의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았다. 그 숙소는 이름처럼 밤과 잘 어울리는 공간이었다.
모든 시간을 보내고 팩을 한 후, 잠을 청했다. 팩하는 건 내가 좋아하는 소소한 일상 루틴은 아니다. 피부 건강을 위해 억지로 들인 새 루틴이다. 사실 물려주신 부모님의 장점 덕에 피부 때문에 사춘기 때도, 밥 먹듯이 밤을 새울 때도, 생활방식이 불규칙해도, 먹는 게 인스턴트투성이여도 크게 스트레스를 받은 적은 없었다. 이따금 트러블이 나도 내가 건드리지만 않으면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 과정을 쭉 지켜봤던 연인이 항상 신기해하고 부러워했다.
그러나 반지하에 산 이후로 온몸이 가렵고 따가워지며 얼굴이 울긋불긋해지더니 얼굴부터 몸까지 피부가 망가졌다. 피부묘기증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아직도 약 먹으며 치료 중이다. 전에 비해 아주 많이 좋아졌지만, 가렵고 따가운 증상과 흔적이 조금 남아있다. 날씨나 컨디션, 무언가의 자극에 의해 얼굴이 뒤집어지거나 붉어지기도 한다. 몸 피부는 그래도 많이 깨끗해졌는데 얼굴은 예전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인다. 물론 내가 관리를 안 하고 수면 부족과 생활방식, 나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아무튼 아직 치료중이며, 피부묘기증의 후유증을 겪는 중이다. 가족과 연인은 그런 나에게 항상 피부 관리를 좀 하라고 잔소리했다. 어떠한 계기로 인해 내 몸과 친해진 이후에도 가장 친해지기 어려웠고, 나중에 친해진 부분이 얼굴 피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얼굴이니 몸이 아니라는 합리화로 미뤘던 것 같다. 사실 지금도 몸에 비하면 친밀도가 낮다. 그래도 예전에 비해 얼굴피부와 좀 친해진 뒤로 화장품도 나름 따져 고르고, 선크림도 매일 빠트리지 않고 바르고, 스킨로션도 꼬박꼬박 잘 바르고, 기분 내키면 팩도 했다. 그러다 최근 들어서 위기감을 느낀 건지 팩하기를 아예 일상 루틴에 넣었다. 사실 잘 안 지켜지고 있지만, 그래도 나를 위해 열심히 노력 중인 루틴이다.
맛있는 것 먹기, 따뜻한 물에 샤워하기, 음악에만 집중하기, 따뜻한 차 마시기, 스트레칭하기, 혼자만의 밤을 고요히 보내기 등 집에서 하는 좋아하는 일상 루틴들을 그동안 잊고 살았다. 그것들을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되찾고 싶었다. 밖에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뇌를 자극하고, 새 감각을 얻는 것도 좋아하지만 집에서 나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아한다. 그 시간은 집에서의 좋아하는 일상 루틴을 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그건 곧 나를 돌보는 일이라는 걸 망각했었다.
(가까운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나를 귀히 여기고, 대접하고, 나만의 공간에서 나와의 시간을 가지고, 나를 쉬게 해주며 나를 돌봐야 한다. 나보다는 가족, 나보다는 남을 우선하는 성격이 남아있는 나한테 더욱 필요한 부분이다.
무엇보다 나를 잘 돌볼 줄 알아야 내 사람들도 진정으로 잘 돌볼 수 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마음은 더 자고 싶었어도 몸은 개운했다. 푸욱~ 잘 잤나보다.
불면증이 있는 내가 늦지 않게 잠들었고, 계속 깨지도 않았다.
체크아웃 준비를 마친 뒤 방을 한번 쭉 훑어보았다. 그리고 방에서 나와 마루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마당을 쭉 훑어보며 마지막 인사도 했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 짐을 챙겨 나왔다. 움직이는 속도와 표정에서 체크아웃하기 싫은 게 드러났다.
'북어나잇 시인의 집'에게 손을 들어 안녕한 후, 겨우 그곳에서 나왔다.
너무 아쉬웠다.
하루만 더, 묵고 싶었다.
도피로 갔다가 많은 걸 얻고 온 북어나잇 시인의 집이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때의 기분과 감정, 느낌 모든 게 생생하다.
또 가고 싶다. 그때는 도피 또는 지쳐서 찾은 게 아니라, 좋은 일로 그저 일상을 적당히 바쁘게 살다가 휴식과 힐링이 필요해서 또는 그냥 생각이 나서 묵었으면 좋겠다. 부디, 이 바람이 이루어지길...
체크아웃하고, 골목을 거닐며 감상했는데 한옥이 곳곳에 많이 있었다. 골목에서 나오니 단풍나무들이 보였는데, 노랗게 물든 은행잎들이 서촌의 거리와 참 잘 어울렸다. 그림 같았다. 복잡하고 삭막해 보이던 도로가 감성적이고 여유롭게 보이던 순간이었다. 유명한 브런치 카페도 갔었는데, 기대를 너무 많이 해서인지 음식이 생각보다 평범했으나 분위기는 꽤 좋았다. 즉흥적으로 떠난 짧은 서촌 혼자 여행은 성공적이었다. 다음에는 더 여유를 갖고 주변을 둘러보고 이곳저곳을 기웃대다 오고 싶다.
('어느 곳의 선물' 에 맞게 내용 추가)
'북어나잇 시인의 집'이 내게 준 선물은 '복순환 그리고 선순환' 이다.
이 곳에서 느껴지는 것과 방명록에 글을 적은 분들에게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바로 '선한 결'이다.
그 선한 결이 돌고 돌아 선순환을 만들고, 그 마음이 내게 복을 가져다준 게 아닐까.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와 현재의 나를 보면, 여전히 불안하지만 그래도 나름 앞으로 잘 나아가고 있기에.
('복순환'은 사실 '선물'이라기보다는 이곳을 다녀간 분들에게 복이 돌고 돌았으면 하는 '바람'이 더 정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