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공포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집에서 나왔다.
시간이 갈수록 집이 아닌 다른 공간에 있어도 공포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게 되었지만,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어서 집이 아닌 다른 곳을 찾아나섰다.
그러던 중 연인의 제안으로 갑작스럽게 혼자 짧은 여행을 떠나게 됐다.
처음에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안 그래도 지출이 많은데, 돈 아깝게 뭐하러 여행을 가나 싶었다.
많이 지치고 힘들때면 여행으로 힘을 얻었던 나라고 해도 지금은 다르다.
여행을 다녀와도 똑같이 불안하고, 우울하고 힘들 게 뻔했다.
그의 회유와 설득에 결국 2박3일동안 혼자 여행을 하기로 했지만, 탐탁지 않았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인데도 설렘은 커녕 감흥 조차 느끼지 못한 채로 기차를 탔다.
강릉역에 도착하여 역에서 나오자마자 서울과 다른 체감온도에 놀랐다.
그 당시 환절기인데다 늦은 시각이라서 체감 온도 차이가 더욱 컸다.
오들오들 떨면서 '진짜 강릉에 오긴 왔구나' 라고 생각하며 실감이 났지만, 감흥은 느껴지지 않았다.
호텔에 도착한 후, 체크인 할때까진 무덤덤했었다.
객실에 들어왔을 때는 조금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날, 감흥을 느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감흥을 느낀 순간은 그 한 순간이었지만,
전부터 그곳에서 머물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주변의 것들을 눈에 담으면서 조금씩, 조금씩 마음이 열렸던 것 같다. 그러다 하이라이트 순간에 비로소 감흥을 느낀 게 아닐까.
그 순간을 기점으로 다르게 보고,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곳이 건넨 선물은 '각도의 변화' 이며, 그곳은 '스카이베이 경포'였다.
'스카이베이 경포'의 외관은 소문대로 싱가포르의 마리나베이 샌즈 호텔과 비슷했다. 왜 한국의 마리나베이로 불리는지 알 수 있었다. 아치 형태의 두 개의 건물 위에 웅장한 유람선이 떡 하니 올라와 있는 듯 했다. 경포대와 경포호수 사이에 있어서 금방이라도 항해할 것 같만 같았다. 강릉의 랜드마크로 불릴만 했다.
이곳은 지하 3층부터 지상 20층의 규모로 부대시설이 다양하게 갖춰져 있어서 호캉스로도 유명하다. 특히 루프탑에 있는 스카이풀(수영장)은 오픈한 그 당시에는 스카이풀이 국내 최초였다고 한다.
경포호수와 경포대 사이에 위치해있는만큼 이곳에 머물면서 강릉의 랜드마크를 한 눈에 감상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강릉 자체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던 곳이었다. 그만큼 머물렀던 객실에서 경포대와 경포호수를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
로비 출입구도 양쪽으로 되어 있어서 경포대와 경포호수를 넘나들기 용이했다. 오션뷰(바닷길)라고 써 있는 출입구를 이용하면, 바로 경포대 해수욕장이 펼쳐졌다. 작은 도로만 건너면 바로 모래사장과 바다가 나왔다. 한켠에는 긴 바닷길을 따라 산책로도 잘 마련되어 있었다. 작은 공원같은 곳도 있었는데, 데크가 마련되어 있어 작은 숲길을 걷기에 좋은 장소였다.
반대쪽 출입구를 나가면 경포호수가 펼쳐져있었다. 체력소진으로 인해 호수까지 산책은 못 했지만, 체력을 길러서 다음에는 경포 바다 산책과 경포 호수 산책 모두 성공하고 싶다.
호수와 바다 사이에 있다는 사실을 더 체감하며 온전히 누릴 수 있었던 건 카페에서의 시간 덕분이었다. 사람들이 몰리지 않는 시간에 호텔 안 카페를 방문했다. 인테리어는 평범했지만, 그곳에서의 시간을 평범하지 않았다. 통창을 통해 보이던 나무들은 빽빽하게 줄지어 서 있었는데, 바람에 푸른잎들이 휘날릴 때마다 기분이 좋아졌다. 나무들에 가려서 바다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나무가 흔들릴 때마다 살짝씩 바다가 보였다. 바다가 보이는 순간을 포착하려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문득, '참, 오른쪽에는 호수가 있지' 라는 생각이 들면서 기분이 묘해졌다. 내가 앉아있는 방향을 기준으로 좌 바다 우 호수가 있다는 사실이 피부에 와닿으면서 지금 이 순간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이런 경험은 어디가서도 쉬이 할 수 없기에 온몸, 온마음으로 느끼려고 노력했다.
카페에서 호수까지 조금이라도 보였으면 좋았을텐데 라는 아쉬움이 살짝 들었지만, 객실에서 호수와 바다를 한 눈에 담을 수 있으니 괜찮았다.
객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었던 건 창문과 객실 구조였다. 창문도, 구조도 아치형이라서 아늑함이 느껴졌다. 창밖의 풍경은 마치 나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몸과 마음이 지쳐있는 내게 딱이었다.
혼자 묵기에 충분한 사이즈였고, 화장실이나 침구 상태도 청결한 편이었다. 태블릿으로 룸서비스 주문, 픽업서비스, 출차요청, 체크아웃, 맛집 정보 등을 이용할 수 있어서 침대에서 편안하게 모든 걸 제어할 수 있었다.
객실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편이었다. 다만 화장실에서 물비린내가 나고, 그곳의 수돗물이 나와 맞지 않는건지 세안을 하고나니 피부가 붉어지면서 트러블이 올라왔었다. 이런 점만 빼면 편의점, 치킨집, 피자집, 오락실, 수영장 등 다양한 부대시설이 있어서 혼자 또는 누군가와 함께 호캉스하기에도 좋은 곳이었다. 카페에서서 업무보기에도 좋고, 지금 알아보니 따로 일할 수 있는 공간도 있어서 워케이션으로도 손색 없을 듯 하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객실 뷰였다.
강릉 경포의 랜드마크인 바다와 호수를 한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석양도 볼 수 있고, 발코니의 조명을 키면 저녁의 바다와 호수도 볼 수 있어 좋았다.
특히 바다와 호수 사이에 알록달록한 집 지붕과 푸릇한 나무들이 보여서 마치 그것들이 바다와 호수의 경계선을 대신 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마을 옆에는 길이 보였다. 쭉 뻗어나가는 길에 시선을 따라가면 유려하게 뻗은 산도 보였다. 현실의 광경이 아니라 마치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혼자 치킨과 맥주, 군것질거리를 초저녁부터 느긋하게 먹으며 점점 어두워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의 색은 정말 신비로웠다. 오랜만에 보는 경관이었다.
그날의 나의 밥친구는 자연이었는데, 가장 좋은 밥친구였다. (물론 소중한 사람보다는 아니지만)
모래사장이 펼쳐지기 전, 작은 도로를 건너자마자 작은 공원처럼 보이는 곳을 발견하여 들어가봤다. 나무들 사이에 데크가 마련되어 있어 걷기 좋게 되어 있었다. 데크를 따라 걷기도 하고, 바다 옆 긴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바다를 감상했다. 그 순간, 감흥이 느껴졌다.
동시에 생각이 전환되었다.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불행하지 않았다.
갑작스러웠지만 이렇게 여행도 떠났고, 황홀한 모습을 눈에 담고, 바다의 냄새를 맡고, 파도소리를 들었다.
바닷길을 따라 걸었고, 카페에서 시원한 자몽에이드를 마시며 갈증을 해소했고 객실에서 보이는 바다와호수뷰를 밥친구 삼아 치킨과 맥주를 하고, 군것질까지 야무지게 먹었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상황도 아니었고, 자유롭게 혼자 즐길 수 있었다. 아직 청춘인 나이에서 빛나는 순간을 또 별주머니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니 불행한 게 아니었다. 행복할 수 있는데, 너무 힘든 나머지 주변의 행복을 보지 않았던 거다.
물에 크게 데어 허벅지에 화상을 입었을 때에도, 그리고 흉터가 남지 않게 됐을 때에도 느꼈던 걸 다시 느꼈다. 그때 다시는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었는데... 다시 그때 그 결심을 떠올리며, 생각을 바꾸었다.
생각을 바꾸니 불안에서 도망치기 위해 찾았던 곳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있는 호텔도 다시 보였다.
하이라이트 순간에서 감흥을 느끼고 덤으로 각도의 변화가 일어났다.
장소가 주는 선물을 발견하고 냉큼 받을 수 있게 된 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