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1. 붉은 의식 :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우리는 돼지가 빠지기를 기다렸다
마을을 덮던 슬픔이 일시에 휘발되고
사내들은 칼과 망치를 벼리며 우물가로 모여들었다
그곳에 예수를 부인하던 베드로는 없었다
솥물이 끓는 동안 정수리를 내리치던 세 번의 타격
돼지가 제 생(生)을 기꺼이 부정하게 하던 유년의 기억
도살의 첫 절차는 생간을 씹는 일이었다
유목민의 풍습처럼, 혹은 원죄를 잊으려는 가해자처럼
핏빛 소주를 삼키며 비릿하게 웃던 인간들
나는 가끔 꿈의 지층에서 그 마을을 발굴한다
잔혹해서 고요했던, 붉은 영사기 속의 드라마.
2. 안부의 무게 : 밧줄의 혀
사내들의 이빨 사이로 질척이는 안부가 쏟아졌다
괜찮냐는 말은 무거워 두레박에 실리지 못하고
허공에서 멈춘 밧줄만 뱀의 혀처럼 흔들렸다
지상은 여전히 축제 중이었으나
우물 밑바닥에 닿는 건 뱉어버린 침묵뿐
그들은 돼지를 구원하려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투척할 깊은 구멍이 필요했을 뿐이다.
3. 둥근 숨 :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2
물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진 자리에
돼지는 이유 없이, 가장 깊은 바닥을 소유했다
하늘은 둥근 안구가 되어 들여다보았고
질문이 수심을 재는 사이
카프카는 제 몸속으로 굴을 파기 시작했다
시인은 서둘러 잠의 국경을 넘었다
안부를 묻는 말들이 두레박에 실려 오갔지만
우물 속에는 돼지의 둥근 숨소리만 고였다
이제 우리는 안다
살아있다는 건, 매번 나라는 우물 속으로
정직하게 추락하는 일이라는 것을.
4. 무중력의 영토 : 추락의 완성
잠 속에는 망치가 없다
비계의 무게도, 생간을 씹는 이빨도 없다
그곳의 돼지는 스스로를 지워버림으로써
물줄기를 거슬러 오르는 투명한 발자국이 된다
우물 입구는 이제 하늘에 난 작은 흉터일 뿐
바닥에 뿌리내린 고독이 비로소 꽃을 피운다
추락이 완성되는 순간, 비로소 비행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