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에 대한 네 개의 각주

by 김준완


​1. 상처

​길이 나고
건물이 올라가고
동물이 길들여질 때
장미의 가시에 찔린 자리마다
세상의 살이 벌어진다
바람이 밀려나고
흙이 밀려나고
원시의 땅이 밀려난다
그 자리에
인간의 관념이 자란다
우리는
장미의 가시를
문명이라 부른다

​2. 정치 — 슈미트의 변주

​개들이 정치를 시작하자
세상은 두 가지 색으로 압수되었다

아니면 동지
그들이 혀로 핥아 만든
흑백의 영토에서
빛깔들은 추방되고
다양함은 벽 속으로 밀려났다
길들여진 인간들은
목줄의 기원을 묻지 않는다
눈앞의 명암만을 쫓아
밤낮없이
서로의 목덜미를 물어뜯는다
기억이 거세된 광장에서
우리는
흑백의 짖음만을
신념이라 부른다

​3. 정치와 철학

​개들이 광장에서
적과 동지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때
철학은 그 비명 위에
두꺼운 각주를 단다
사냥의 갈증은 대의가 되고
박살 난 뼈들은 구조가 된다
철학은 피 묻은 송곳니를 닦아주며
살육의 연대기를
정의라는 이름으로 박제한다
개들이 짖으면
철학은 받아 적는다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
목줄을 정당화하는
가장 세련된 비문일 뿐
우리는 그 비문을 핥으며
사슬이 식도를 파고드는 선명한 통증을
신이 내린 성배(聖杯)라 믿는다

​4. 삶 — 완공된 사육

​태어나자마자 우리는
이미 그어진 설계도 위로 유배된다
상처 난 땅 위에 세워진 벽과 벽 사이
개들이 허락한 흑백의 보폭만큼만
우리의 발목은 자라도록 허락된다
​등뼈는 벽의 각도에 맞춰 꺾이고
눈동자는 유리창의 규격에 맞춰 굳어간다
우리는 스스로 사슬을 연마하며
그 쇳소리를 자유의 노래라 부른다
​생의 끝단, 비로소 깨닫는다
내가 사랑했던 집도, 신념도, 이름도
나를 가두기 위해 정교하게 치수(置數)된
콘크리트 수의(壽衣)였다는 것을
​숨이 멎는 순간
구조는 비로소 완공되고
우리는 박제된 일련번호조차 없이
벽돌 한 장의 무게로 소멸한다

월, 목,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