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1. 상처
길이 나고
건물이 올라가고
동물이 길들여질 때
장미의 가시에 찔린 자리마다
세상의 살이 벌어진다
바람이 밀려나고
흙이 밀려나고
원시의 땅이 밀려난다
그 자리에
인간의 관념이 자란다
우리는
장미의 가시를
문명이라 부른다
2. 정치 — 슈미트의 변주
개들이 정치를 시작하자
세상은 두 가지 색으로 압수되었다
적
아니면 동지
그들이 혀로 핥아 만든
흑백의 영토에서
빛깔들은 추방되고
다양함은 벽 속으로 밀려났다
길들여진 인간들은
목줄의 기원을 묻지 않는다
눈앞의 명암만을 쫓아
밤낮없이
서로의 목덜미를 물어뜯는다
기억이 거세된 광장에서
우리는
흑백의 짖음만을
신념이라 부른다
3. 정치와 철학
개들이 광장에서
적과 동지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때
철학은 그 비명 위에
두꺼운 각주를 단다
사냥의 갈증은 대의가 되고
박살 난 뼈들은 구조가 된다
철학은 피 묻은 송곳니를 닦아주며
살육의 연대기를
정의라는 이름으로 박제한다
개들이 짖으면
철학은 받아 적는다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
목줄을 정당화하는
가장 세련된 비문일 뿐
우리는 그 비문을 핥으며
사슬이 식도를 파고드는 선명한 통증을
신이 내린 성배(聖杯)라 믿는다
4. 삶 — 완공된 사육
태어나자마자 우리는
이미 그어진 설계도 위로 유배된다
상처 난 땅 위에 세워진 벽과 벽 사이
개들이 허락한 흑백의 보폭만큼만
우리의 발목은 자라도록 허락된다
등뼈는 벽의 각도에 맞춰 꺾이고
눈동자는 유리창의 규격에 맞춰 굳어간다
우리는 스스로 사슬을 연마하며
그 쇳소리를 자유의 노래라 부른다
생의 끝단, 비로소 깨닫는다
내가 사랑했던 집도, 신념도, 이름도
나를 가두기 위해 정교하게 치수(置數)된
콘크리트 수의(壽衣)였다는 것을
숨이 멎는 순간
구조는 비로소 완공되고
우리는 박제된 일련번호조차 없이
벽돌 한 장의 무게로 소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