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change> 시리즈 4/6
AI와 함께 쓰는 디자인 픽션
<The Exchange> 네 번째 에피소드
[스트리밍 ON - 채널: The Exchange Live]
“데이터를 사고팔고, 가치만 맞으면 모두 거래하는 The Exchange Live! 오늘은 유명하신 셀럽이 비밀 방문하십니다.
신분 세탁이 필요하신 모양이에요.
누군지 궁금하겠지만… 이름을 알면 아쉬워할 사람이 많겠죠.
오늘은 ‘VIP 프라이버시 모드’라 얼굴은 못 보여드립니다.
대신 제 표정으로 상상해 보세요.”
화려한 은색 재킷이 문틈 사이로 번쩍였다.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천장 구석의 낡은 VHS 카메라를 발견하더니 짧게 고개를 저었다.
“방송 꺼주세요. 아니면… 제 얼굴은 안 잡히게 하시던가요.”
지수는 키보드를 두드려 카메라 각도를 바꿨다. 이제 화면에는 그의 손과 모니터만 잡혔다. 그녀는 카메라 사각지대를 타고 들어와, 마치 런웨이를 걷듯 카운터 앞에 섰다.
짙은 향수와 AR 액세서리의 반짝임이 침침한 가게 안에 디스코 조명처럼 흩어졌다.
“그래서, 유명하신 분이라는데…”
지수는 모니터를 켜며 고개를 들었다.
“제가 잘 몰라서 그런데, 얼마나 유명하신 거죠?”
그녀의 화려한 미소가 딱 굳었다.
“정말 몰라요? 날 모른다고?”
숨을 고른 뒤,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럭셔리 트래블 큐레이터, 알고리즘 라이프스타일 탑 10 인플루언서. 37개 도시 협찬 여행, 브랜드 화보, 팔로워 650만! 세계 5성급 이상 호텔들이 내가 간다고 하면 바로 스케줄을 비워줘요. 진짜 몰라요?”
지수는 무심하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
“그래서…그 유명세가 여기까지 오게 한 건가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요. 요즘 여행 불경기라 그런지 협찬이 끊겼어요.
제가 팔았던 패키지 상품도 잘 안 나가고, 뭐 그런 때가 있죠 사업하다 보면요?
하지만! 제 라이프 스타일을 유지하려면 급하게 돈이 필요할 때도 있거든요? 그래서… 뭐… 이 얼굴을 담보로 잡았죠. 기간 내에 돈을 못 갚으면 딥페이크 스튜디오에 얼굴 데이터가 넘어간다는 조건으로요. 금방 갚을 줄 알았거든요? 근데… 만기가 다가와서요. 말하자면 긴급상황? 같은 거예요!”
사치스러운 생활을 유지하려고 돈을 빌렸다가 못 갚게 됐다는 이야기가 민망했는지, 그녀는 괜히 머리를 넘기며 지수에게 윙크를 날렸다.
지수는 그녀의 인플루언서 채널을 훑어본다.
셀럽들과 찍은 사진, 보여주기식 우정 여행 콘텐츠, 팔로워 숫자는 높은데, 이중에 진짜 사람은 몇 명이나 있을까.
중요한 사람이라고 자기 입으로 떠든 그녀의 데이터는 영양가가 없는 정크 푸드 같다.
한숨을 쉬며 지수가 물었다.
“아…그래서 빚을 갚을 방법이…? 뭘 교환하시려고요? 명품 가방이나 리셀, 이런 건 취급 안 해요.”
“돈 워리, 아이덴티티 클리닝 하려고 해요!
깨끗한 애 하나 찾았거든요. VIP 클럽 요트파티에서 만난 베프가…아! 걔도 셀럽이니까 실명 공개는 안 돼요. 요즘 워홀 비자 가진 애들 신상 데이터 거래가 인기래요.
주로 아이나 노인 돌보는 계약직이라 해외에서 트래킹 할 수 있는 온라인 기록이 거의 없대요. 일시적인 비자 소유자는 비자 만료되면 집에 돌아갈 거니까, 어차피 이 나라에서 별로 사용하지도 않는 아이덴티티에 내 얼굴 얹고, 그 친구 아이디에 제 기록 덮으면, 빚이랑 계약은 전부 그 애 거가 되는 거래요.
뭐 한동안 독촉이나 협박 메시지 때문에 고생하고, 몇몇 딥페이크 웹사이트 때문에 시달리겠지만… 어차피 몇 년 뒤면 돌아갈 거고, 아무도 신경 안 쓰잖아요? 중요한 사람 신상 털리는 거보다 낫죠, 안 그래요?”
거만하게 턱을 들고 윙크하는 얼굴을 보던, 지수의 고개가 삐딱하게 꺾였다.
“그러니까… ‘중요한’ 당신을 위해서 일면식도 없는 상대방이 그쪽 빚을 대신 뒤집어쓰고 더러운 계약도 감당해야 한다는 거네요?”
그녀는 피식 웃었다.
“잠깐 일하러 온 사람이 뭘 알겠어요. 아무것도 몰라요. 알면 귀찮아지죠. 그리고… 세상은 원래 중요한 사람 위주로 돌아가는 거잖아요?”
지수는 기계적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지난 손님 때문에 물렁해졌던 자신이 다시 제자리에 돌아온 느낌이었다. 싸구려 팔로워, 광고에 팔릴대로 팔린 개인 콘텐츠, 남들이 다 아는 여행지 정보와 뻔한 팁. 도대체 쓸만한 데이터가 하나도 없다.
“안타깝지만, 유명하신 분 답게 원하는 계약을 성사시키려면 비용도 엄청나네요. 지금 딥페이크 계약에 새 프로필 교체 비용까지 계산해 보면… 그쪽이 지금 가진 걸로는 택도 없어요.”
방금 전까지 윙크를 날리며 애교를 떨던 그녀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럼 뭐가 가능하죠?”
지수는 의자를 뒤로 젖히며, 마치 친절한 조언을 하듯 말했다.
“스스로 조금씩 갚는 방법은 어때요? 인플루언서 활동하면서 쌓이는 쿠키 데이터 있죠? 검색, 위치, 아이 트래킹이랑, 뇌파 반응처럼 자잘한 거요.
쿠키가 쌓일 때마다 광고 네트워크에 개방하는 거예요. 쿠키를 제공하는 수익으로 빚을 갚는 거죠. 딥페이크에 얼굴이랑 바디 데이터 넘어가는 리스크 막을 때까지만 쿠키를 제공하면 돼요.”
그녀는 잠시 멈췄다가, 밝게 웃었다.
“그게 다예요? 그냥… 쿠키? 귀엽잖아요. 나처럼.”
손가락으로 하트를 그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좋아요. 효율적인 거래네요.”
그리고는 허공에 ‘쪽’ 소리를 내며 키스를 날렸다.
그녀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지수는 단숨에 계약 성사 버튼을 눌렀다.
“오케이, 다 된 거죠? 광고주들이 날 사랑할 거야! 러블리 쿠키처럼!!”
그녀는 만족스러운 미소로 나갔다.
15분 후.
해크니 거리의 로봇택시 정류장에서, 그녀는 택시 호출 버튼을 눌렀다. 로봇택시 연결 화면 대신, 광고 재생이 시작됐다. 스킵 버튼은 없었다.
패션, 성형, 약물, 여행 패키지… 모든 광고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30분, 1시간, 3시간이 지나도 광고는 끊이지 않는다. 그녀는 분한 마음에 소리를 질러봤지만, 인플루언서 스폰서로 받았던 예쁜 구두만 더러워질 뿐. 광고는 계속, 계속, 재생된다.
지수가 경고했던 그대로였다.
가게 안,
지수는 그녀 계정과 쿠키 기록이 광고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스크롤 바가 쭉쭉 늘어나는 스크린을 구경하며 낄낄 거렸다.
“그래. 당신 말대로 사랑받는 존재가 된 거예요. 마음껏 사랑받으시길 ㅋ”
라이브 방송에 비친 지수는 통쾌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