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1학기도 후반부로 접어든 6월, 사람들을 만나는 게 피곤해졌다. 하루종일 아이들과 부대끼며 녹초가 된 채로 퇴근하면 그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아닌 타인이 곁에 있는 자체를 견디기가 힘들었고 모든 이들이 거슬렸다. 가족이나 친구처럼 가까운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었고 나 하나 건사하는 것만도 벅찼다. 심지어는 실제로 내 옆에 있는 인물들 뿐만 아니라 인터넷 세상 뉴스 속의 사람들도 나를 힘들게 했다. 각종 사건사고와 논란, 폭력, 범죄... 남 괴롭히고 내 마음 어지럽게 하는 이들이 어찌나 많은지 안그래도 복잡한 머릿속이 정말 터져버릴 것 같았다. 아, 사람이 정말 싫어!
그러던 중 곽정은 작가(전 연애칼럼니스트, 현 명상가)가 멘탈 케어 강연을 연다는 소식을 알게 됐다. 강연의 제목은 The New Destiny, 마음 해방 명상 리트릿. 평소에도 명상에 관심이 있던 터라 별 고민 없이 신청 버튼을 눌렀다. 장소는 강원도 원주의 뮤지엄 산. 워크샵 날짜는 순식간에 다가왔고, 나는 달뜬 마음을 안고 원주로 향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토요일, 뮤지엄 산을 둘러본 후 1시 30분이 되자 워크샵이 시작되었다. 4~5인 1조가 되어 이야기를 나누며 내 마음 상태를 점검하기도 하고, 인간관계나 가치관 등 여러모로 사람들이 어려워하하는 주제에 대해 강연을 들었다. 놀라기도 하고 깨닫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다보니 어느덧 오후 6시가 되어 마지막 하나의 코스만이 남았다. 그건 바로 뮤지엄 산 내부에 있는 '명상관'에서 명상을 직접 체험하는 것. 명상관은 특정 수업이 있을 때만 열리는 장소였다. 이미 뮤지엄 운영 시간은 종료된 뒤였기에, 강사 2명과 30명의 수강생들은 아무도 없는 고요한 뮤지엄을 가로질러 명상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10분 정도 걷자 돌무덤이라 해야할까, 굴이라 해야할까, 특이한 구조의 둥근 건물이 나왔다. 계단으로 내려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자 이글루 속에 들어온 듯 둥근 천정이 감싸고 있는 둥근 방이 나타났다. 바닥에는 30개의 담요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나는 회색빛의 방 안 담요 위에 자리를 잡고 편안하게 앉았다. 은은한 향기와 편안한 음악 속에 강연이 다시 시작되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나요?" 강사는 몇분동안 눈을 감고 스스로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불러일으켜 보라고 했다. 나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며 그건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일까, 의문만 가득 안은 채로 시간을 보냈다. 내가 나를 사랑한다고?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무언가를 느껴보려 노력했으나 마음속엔 물음표만 가득찰 뿐 그 어떤 사랑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방법 자체를 알 수 없었다. 이게 맞는지 아닌지도 모르겠고 확실한 건 나를 사랑하는 느낌이 안 느껴진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이게 가능한 사람이 있을까? 생각하던 찰나 시간이 다 되었다.
강사는 미소와 함께 다음 미션을 던졌다. "이번에는 들숨, 날숨에 자애의 문구를 붙여보겠습니다."
들이쉬는 숨에 '부디 내가',
내쉬는 숨에 '행복하기를'.
그리고 또 들이쉬는 숨에 '부디 내가',
내쉬는 숨에 '편안하기를'.
부디 내가, 건강하기를.
부디 내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살면서 나 자신에게 행복을 빌어준 적이 있었던가.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평안하세요, 업무 메신저에도 심심하면 쓰는 그 말들을 나에게는 한 번도 해 준적이 없었다. 나는 들숨 날숨과 함께 내가 진심으로 행복하고, 편안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냥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고 편안했으면 좋겠고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욕심'낼 때와는 뭔가 달랐다. 처음으로 나를 아끼고 돌본다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진심으로 그 사람이 편안하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구나. 그게 사랑이라면 지금 나는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고 있구나. 내 못난 모습만 찾아내며 끝없이 채찍질하기 바쁘던 내가 나를 따뜻하게 바라봐주자 가슴이 묵직해졌다. 턱끝에 고인 눈물이 후두둑 하고 담요 위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다 되었고,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만 콧물을 닦은 건 아니겠군, 하고 생각하며 강사의 말에 따라 둘씩 짝을 지어 마주보고 앉았다. 내 짝은 아까 강의실에서 같은 조였던 내 또래의 여자분이었다. 얘기를 많이 나누지는 않은 터라 마주보고 앉아있는 자체도 어색했다. 나는 눈을 어디 둬야할 지 모르겠는 느낌에 애써 강사를 쳐다보려 고개를 돌렸다. "저를 보지 마시고, 상대의 눈을 바라봐 주세요." 강사가 말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는지 다들 머쓱해하며 눈 앞의 상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용기 내어 상대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는 것이라고는 이름과 생김새 정도밖에 모르는 완전한 타인의 눈을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는 일.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눈을 깜빡이시는데 눈이 참 크시구나, 내 얼굴 보며 무슨 생각을 하실까, 언제까지 이걸 하는걸까...
1분, 2분, 3분...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 자애 명상을 할 때처럼 가슴이 묵직해지기 시작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점점 눈시울이 붉어졌다. 코끝이 찡해지고 눈물이 자꾸만 새어나왔다. 나는 눈가에 고인 눈물이 흐르지 않게 하려고 눈을 계속 깜빡였다. 상대방도 큰 눈을 굴리며 눈물이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애를 쓰는 게 보였다. 이에 더해 속에서부터 울음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나는 숨을 꿀꺽꿀꺽 삼키며 울음이 터지지 않게 꾹꾹 눌렀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강사의 말대로, 아까 나에게 들려줬던 자애의 문구 내용을 상대에게 빌어주었다. 들이쉬는 숨에 '부디 당신이', 내쉬는 숨에 '행복하기를'. 부디 당신이, 편안하기를. 부디 당신이, 건강하기를. 부디 당신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왜 우는지 아직도 영문을 모른 채로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렀다. 나는 눈물 콧물 닦는 걸 포기하고는 계속 상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행복하고 편안하기를 빌었다. 앞으로 다시 볼 일 없는 사람이지만 이 사람이 건강하고 고통 없는 삶을 살길 마음으로 바랐다. 훌쩍거리는 소리가 아까보다 더 많이 들릴때 쯤 명상 시간이 끝났고, 우리는 웃는 얼굴로 가볍게 포옹을 한 후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이 생경한 경험을 한 지도 벌써 몇 주가 지난 지금, 누군가의 눈을 바라보는 일이 왜 그렇게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는지 생각해본다. 아마 상대방도 나도 같은 '사람'이라는 걸 불현듯 느껴서 그랬던 것 같다. 서로의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을 찾아내고, 헐뜯고, 욕하고, 비난하고, 미워하는 것이 유행이 된 듯한 요즘의 세상. 여기서 우리가 잊고있는 한가지는 우리 모두 사람이고 인간이라는 것이 아닐까. 타인의 눈을 오랫동안 바라보는 것은 수만 개의 차이점을 뛰어넘는 단 하나의 공통점을 일깨워주는 창이었다고 생각한다. 너도 나처럼 열심히 살아왔겠구나. 너도 나처럼 작은 바람에 흔들리고 고통받으며 눈물 흘리겠구나. 너도 나처럼 별 것 아닌 것에 웃고 위로받고 기뻐하고 감동하는, 사람이겠구나. 우리는 서로 잘 알지도 못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연결되어 있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는 그 무언가. 여기에 상대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 더해지면 애틋함과 함께 깊은 연대감이 가슴 깊이 차오른다.
사실 이 경험 이후에도 나는 여전히 사람들이 거슬린다. 다만 좀더 너그러워진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래, 이 사람도 얼마나 힘들면 저럴까. 저 아이도 얼마나 답답하면 저런 소릴 할까. 미워도 다시 한 번, 둥근 명상관에서의 기억을 되짚으며 보다 둥근 마음으로 이해하려 노력해본다. 앞으로 있을 인간관계에서도 수많은 장애물이 있겠지만 비장의 무기, '너도 나와 같은 사람이야' 하나는 쥐고 있으니 조금 마음이 편안해진다. 모든 사람이 서로 눈을 바라보는 감정으로 타인을 대한다면 세상에 범죄나 전쟁같은 건 없을 텐데. 언젠가 그런 날이 올까 꿈꾸며 속으로 조용히 외쳐 본다. 부디 내가 행복하기를, 부디 당신도 행복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