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연인의 첫사랑, 그리고 나의 첫사랑
그가 시선을 허공에 고정하고 아주 느리게 눈을 깜빡거리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불을 끄고 나란히 누운 채 어둠 속에서 그의 옆모습을 본다. 나는 그의 사랑 이야기에 빠져든다.
나의 애인은 첫 만남에서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다. 평범한 나의 연애사와는 다르게 꽤 드라마틱한 연애사라 반신반의하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과거의 연애담을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었는데, 몇 시간 전에 처음 만난 그에게는 이야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애인을 아직 잊지 못했고 그를 언젠간 꼭 만날 것만 같은 기분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쨌든 내 말문을 트게 한 그가 신기했고 어쩐지 편안한 사람이라 생각해 만남을 이어갔다. 그와 연인이 된 지 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 이후로 여느 연인들처럼 과거의 연애사는 금기어로 치부하거나 간혹 농담의 소재로 유쾌하게 활용했다. 하지만 실은 그와 장기간 연애를 하면서도 첫사랑의 기억을 수천 번이고 떠올렸는데, 이건 내가 그에게 말할 수 없는 유일한 비밀이었다.
어느 날 밤, 첫사랑에 대해 진지하게 다시 물은 건 나였다. 요즘 들어 처음 사귀었고, 가장 사랑했던 나의 첫사랑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서였다. 거의 잊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서 절망스러웠다. 첫사랑에 대해 농담 삼아 물으면 시치미 떼는 얼굴을 하는 이 놈도 분명 그런 적 있겠지, 싶었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죄책감을 씻어 보려는 요량이었다.
그의 첫사랑은 너무 아팠다. 큰 아픔을 준 사랑을 그는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질투를 할 것 같았는데, 내가 느낀 감정은 연민이었다. 가슴이 아파서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의 실수나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 불가항적인 상황으로 인한 이별이었다. 사랑하는 동안에도 마음껏 사랑할 수 없었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참아내야 했던 상황들, 그녀가 만남을 지키기 위해 감출 수밖에 없었던 눈물들. 어둠 속에서도 보이는 그의 깊은 눈과 목소리에서 그가 아직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현재의 남자친구를 옛 애인이자 첫사랑만큼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있었다. 그런 사랑이 이제 없다는 걸 최근에야 알아버렸다. 이 사실을 8년 동안 부정했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렇게 모질게 보낸 그가 가장 사랑한 사람이었다니, 그건 안 될 일이야.
하지만 서른이 된 나는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인정하고 나니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못했던 내가 생각나서 가슴이 아프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감정을 격렬하게 오랫동안 품었을 뿐이니까. 그리고 잊을 수 없는 기억과 감정은 특별히 잊을 필요가 없다. 그저, 헤어지던 날 밤의 기억으로 돌아가 눈물을 쏟는 첫사랑의 어깨를 몇 번이고 다시 끌어안을 뿐이다.
나는 애인의 기억으로 들어간다. 불이 꺼진 방 안에서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 눈물 자국을 새기고 있는 그에게 다가가 이제 괜찮다고, 그를 꽉 안으며 함께 운다. 이 측은지심도 사랑임을 이제는 안다.
그리고 오늘 저녁에도 겨울바람에 차가워진 오랜 연인의 볼을 따뜻하게 매만져줄 것이다. 첫사랑을 천천히 떠나보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