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여행 1일차, 1시간 만에
떠나기로 한날 아침이 밝았다. 막상 혼자 여행을 가려니 떠나야하는 이유가 생각나지 않는다. 너무나 외로울 것만 같은 이 여행을 왜 가기로 한걸까? 귀찮은 마음이 앞섰지만, 이미 예약된 일정을 무를 수도 없는 여행 당일. 그토록 간절히 떠나고 싶었으니 떠나보면 그래야만했던 이유가 생각나겠지. 아직은 이유를 찾지 못한 무거운 몸을 이끌고 김포공항행 버스에 올랐다.
연휴를 앞두고 제주를 찾은 대륙의 관광객들과 가족단위 여행객의 틈바구니에서 소란스레 제주에 도착했다. 600번 리무진 버스를 타고 서귀로 향한다. 버스는 아침부터 내내 탔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사뭇 다른 풍경에 기분이 묘해지다가 이내 고요해지더니 결국엔 '제주에 살고 싶다' 마음 먹는다. 겨우 여행 1일차 1시간만에. 이게 얼마만에 느껴보는 마음의 평화인가.
달리고 달려 서귀에 도착했다. '여기가 어디야?' 지도앱을 꺼내드는 나와는 달리 내 또래의 백인 여자는 성큼성큼 앞서 길을 찾아간다. 한참 지도를 들여다 본 후 출발하니 저 앞에 그녀가 보인다. 이름은 에일리, 서귀를 여행하는 중 계속해 마주쳐서 용기내 물어봤다. 혼자 여행을 하니 거리낄 것도 없고 자신감이 넘친다. 어차피 다 모르는 사람인데 무슨 상관이야? 말도 안통하는 외국인도 혼자 여행을 하는데, 더군다나 그녀가 나의 후진 발음을 알아들어 주어서 조금 더 자신감있게 여행할 수 있을 것 같다.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고 근처 고기국수 집에 들어왔다. 노부부가 함께 운영하시는 작은 식당. 3시가 다돼가는 시간 두 분이 식사를 하고 계신다. 고기국수는 역시나 맛있었다. 계산을 하고 나오는 길에 이중섭 미술관 가는 길을 여쭤봤더니(사실 다음지도앱이 더 정확한 길을 알려주지만, 주인 할머니와 대화가 하고 싶었다.) 직진 후 좌회전이냐, 좌회전 후 직진이냐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의 빠른 길 논쟁이 시작되었다. 투닥투닥 재미있게 사신다 싶어 킥 웃고 돌아섰다.
1. 이중섭 거리, 이중섭 미술관
화가 이중섭이 궁금하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미술가의 거리'라니 괜히 가보고 싶었다. 이중섭 거리도 미술관도 특별할 것 없는 소박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미술관 옥상에서 이렇게나 예쁜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거리의 풍경도, 멀리 보이는 바다도, 그곳의 사람들도 참 맑았다.
2. 서귀포 유동커피
오늘은 시내에서 묵는 유일한 날이니 밤 늦게까지 돌아다녀야지. 마음먹고 온 곳은 겨우 근처 카페. 서귀포에서는 꽤나 유명하다는 '유동커피'인데, 사장님 이름을 따 상호를 지었다고. 작은 카페에 쉴틈없이 손님이 들어오고 대부분 사장님과 안면이 있는 단골고객들이다. 왔던 사람들이 계속해 방문한다는 건 커피맛도 서비스도 평균이상이라는 얘기 아닐까?
무지 더웠던 날씨탓에 올해 첫 아이스라떼를 시켰다. 소문대로 부드럽고 진한데 아주 맛있다. 지금까지 마셔본 라떼 중 세 손가락안에 들 정도! 라떼가 꽤나 걸쭉했는데 샷이 몇개나 들어갔던 걸까? 이날 새벽 3시까지 잠을 못잔게 이 커피 때문이라고 짐작하지만, 서귀에 가면 꼭 또 마시고 싶다.
3. 미도호스텔 게스트하우스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이중섭 미술관도 유동커피도 아닌 게스트하우스 '미도호스텔'이다. 제주도 혼자여행을 계획하며 동쪽으로 떠날지 서쪽으로 떠날지도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숙소를 먼저 알아봤다. 그리고 이곳에 묵고 싶어 첫 날 여행지는 서귀포 시내가 되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미도장'이라는 오래된 여관을 개조해 게스트하우스 미도호스텔이 탄생했다고. 때문에 시설은 최신식 모던 인테리어와 다름 없지만 어쩔 수 없이 건물에서는 그간 다녀간 여행객들의 역사가 느껴졌다.
야외공간임에도 참 아늑하다. 와인을 마시며 영화를 보는데 이렇게 좋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좋다. 여행 마지막날 돌아와 하루를 더 묵고싶을 정도. 나와 같은 혼자 여행자들도, 함께 여행을 온 사람들도, 중국인 관광객도 많았는데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서로를 전혀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제주도 게스트하우스'하면 밤마다 모여서 술 마시고 바베큐 파티를 하는 곳, 또는 정말 조용하게 각방을 쓰는 혼자 여행자들이 머무는 곳, 흔히 두 가지를 떠올리는데 미도호스텔은 둘 중 무엇이든 본인의 의지대로 선택할 수 있다. 영화를 틀어 놓으면 보고싶은 사람은 보고, 원치않는 사람은 각자의 시간을 갖는다. 영화를 보며 혼자 또는 함께 술을 마셔도 되고 밥을 먹어도 된다. 어느 누구도 다가오거나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혼자 여행을 해야만했던 첫 번째 이유를 찾았다.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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