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혼자여행자의 식사
고등학교 때 늘 지각을 하는 친구가 있었다. 가뜩이나 늦게와서는 매번 첫 교시가 끝나자마자 매점으로 달려갔다. 조금 친해진 뒤에 도대체 왜 매일 늦는건지 물어봤더니 엄마가 깨워주지 않는다는 거다. 더군다나 아침도 안차려주시고 친구가 등교를 할 때까지 어머니는 주무신다고. 요즘 어머니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만해도 고등학생 자녀를 둔 엄마가 등교길을 전혀 돌봐주지 않고 지각을 하도록 내버려둔다는건 가히 문화충격이었다. 또 학교에 가는 아이를 굶겨 보내다니... 지금이야 누가해주지 않아도 알아서 챙겨먹는게 당연한 일이지만 당시에는 엄마가 아침을 차려주는게 당연한 일인줄 알았다.
엄마가 돌아가시고는 줄곧 아빠가 아침을 차려주신다. "아빠 이거 진짜 맛있다!" 하면 "아빤 맛없게는 못 만들어~" 하신다. 덕분에 여전히 아침을 잘 얻어먹고 있지만, 여행지에서는 아침을 잘 먹지 않는다. 특별히 배고픔을 느끼지 못해서이기도 하고 배가고프면 언제든 먹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혼자여행에서는 지금 밥을 먹지 않으면 하루종일 굶고 다닐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여행 첫날부터 아무 밥집이나 들어가 고기국수를 야무지게 먹어놓고는 돌아다니다가 밥을 못 먹을까봐 걱정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우습다.
이 우스운 생각 때문에 여행 내내 게스트하우스 조식을 챙겨먹었다. 이 날도 일찍 일어나 조식을 먹고 출발했다.
1. 천지연 폭포
폭포에는 별로 가고싶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녀석과의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몇년 전 여름, 커플룩을 입고 제주 정방폭포에 놀러갔었고, 사진을 찍어주던 중년 부부로부터 신혼여행왔냐 소리를 들었었다. 재밌다며 킥킥 거렸었는데 왜 그 기억이 이리도 선명한건지. 폭포에 왔더니 또 그녀석이 생각난다.
여튼 너무 일찍 일어났고, 조식도 배부르게 먹었고, 근처에 도보여행할 곳을 찾다보니 천지연 폭포에 와있다. 기대 없이 와서인지 올라가는 길부터 사방이 숲인데 이렇게 상쾌할 수가 없다! 공기도 맑고 폭포수 소리도 콸콸콸 시원하게 들린다. 걸어서 5분만에 폭포에 도착해버려 조금 시시했지만 입장료 대비 볼만하다.
물가에 오리들이 참 많았다. 아이들이 어디선가 사료를 사서 뿌려주는데 나도 해보고 싶다. 폭포를 다 돌아보고 입구까지 와서야 사료 파는 곳을 찾았다. 천원을 주고 사료를 사서 폭포로 다시 올라간다. 혼자니까 큰일부터 아주 작은 일 하나까지 내마음대로 할 수 있다. 반대로 큰일부터 아주 작은 일까지 온전히 내가 책임져야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이들과 같이 오리 사료를 뿌려주는데 별거 아니지만 참 재밌더라. 혼자가 되니 나를 숨길 필요가 없어진다. 혼자있는 나는 유치하기 짝이없다.
2. 서귀포 매일올레시장
혼자여행자에게 시장만큼 좋은 여행지가 또 있을까. 누군가와 함께 여행을 할 때에도 꼭 시장에 들르는 편이지만, 혼자여행자의 배고픔을 가장 잘 달래주는 곳 또한 시장이다. 가로세로 요리조리 골목이 많은 시장은 여행하면서 유일하게 블로거들의 후기를 찾아보는 곳이다. 골목골목을 섬세하게 보지 못해 꼭 먹어봐야할, 또는 꼭 사야할 이 지역의 명물 그것을 놓칠까봐!
시장에서 이것저것 배부르게 먹고, 또 잔뜩 사서 집으로 부치고, 협재 바다로 간다. 오늘부터 3일은 협재 바다 앞에서 머무를 예정이다.
비 내리는 제주에서 버스를 타고
해안도로를 따라 달린다.
제주 이즈 뭔들 이겠냐만은 제주에서의 시간들 중 손에 꼽을 만큼 행복했다. 유리창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그랬고, 빗방울 넘어 보이는 해안가의 풍경이 그랬고, 살짝 연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다 내음이 그랬다. 그렇게 서귀에서 한림까지 702번 버스를 타고 1시간 여를 달려 협재 해변에 도착했다.
3. 협재해변
버스여행의 낭만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우산이 뒤집혔다. 아 오늘 강풍주의보랬지. 바다 앞으로 다가갈수록 비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친다. 절대 바람에 흔들릴리 없는 내 무거운 몸뚱이가 휘청거린다. 이거 보통이 아니다. 일단 실내로 대피하자.
저녁을 먹으러 근처 식당에 들어왔다. 하는 것도 없는데 때 되면 배가 고파오니 참 신기하다. 전복을 좋아해서 조금 비싼 전복뚝배기를 시켰는데 전복이 조개만하다. 막 화가 나려다가 한 숟가락 입에 넣자마자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국물이 정말 끝내주게 시원하다. 전복도 크기만 작을 뿐이지 아주 신선하고 쫄깃쫄깃했다.
평소에는 혼자 밥 먹을 일이 거의 없는데, 매일같이 혼자 식당에 가서 밥을 먹어야 한다니 이거참 새로운 경험이다. 메뉴를 정할 때에도 타인의 의견을 물을 필요없이 내가 먹고 싶은게 무엇인가 진지하게 고민해 결정한다. 주문한 음식이 나와 먹을 때에도 오직 '눈 앞의 음식과 내가 느끼는 맛'에만 집중할 수 있다. 이건 혼자여행자만 알 수 있는 신세계다.
그동안 모르고 살았던 아주 작은 세계가
새롭게 열리는 기분이다.
비단 음식에서만 그런것은 아니었다. 매사에 지금 내가 원하는게 무엇인지, 나 자신과 끊임없이 대화를 해야했다. 덕분에 여행 이후에도 나 자신에게 조금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밥을 먹고 나와도 제주의 거센 바람은 이길 도리가 없다. 캔맥주를 넉넉히 사서 일찍 숙소에 들어왔다. 오늘은 편히 묵고자 개인실을 예약했는데, 강풍 탓에 창문이 심하게 덜컹거린다. 이러다가 유리창이 깨져나갈것만 같다. 아 오늘도 잠은 다잤구나.
제주 혼자여행기 2일차 끝.
덧, 그외 제주를 여행하며 먹었던 음식들
*제주도 혼자여행기를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구독과 댓글은 글쓰는 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제주도 혼자여행기 더 보기
1. 별일 없이 사는 사람 <혼자 여행을 떠나게 된 사정>
2. 제주에 살고 싶다 <불과 여행 1일차, 1시간 만에>
3. 맨도롱 또똣: 먹기 좋게 따뜻할 때 드세요 <제주 혼자여행자의 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