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일 없이 사는 사람. 혼자 여행을 떠나게 된 사정.

by 짐니

대한민국 직장인은 그렇다. 누구나 그렇게 살기 때문에, 혹은 누구나 그렇게 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위로를 받기 어렵다. 간신히 힘들다 소리를 꺼내도 세상 사는게 다 그렇다는 둥, 요즘 왜 이리 푸념이 늘었냐는 둥 낯선 메아리가 돌아온다.


몇일 전 친한 친구의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워낙 오래 연애를 한 동갑내기 커플이라 친구의 남편과도 친하게 지냈는데 나에게 전화가 걸려온건 처음이었다. 반가움 보다는 친구에게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걱정이 앞섰다. "왠 일이야? 무슨 일 있어?" 놀란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 내게 그 녀석은(남의 남편에게 녀석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당시의 기분으로는 녀석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ㅇㅇ이가 애기 키우느라 많이 힘든 것 같아, 일찍 결혼해서 친구들하고 여행을 못 가 본게 너무 후회스럽다는데... 애기는 내가 데리고 처갓집에 가있으면 되니까 내 와이프랑 같이 여행 좀 다녀올래?" 그 녀석의 말을 끝까지 듣고 처음으로 든 생각은 '내 친구가 참 좋은 남자를 만났구나'하는 안도감이었고, 그 다음은 오랜 친구에게 미안할 정도로 당황스러움이 밀려왔다.


대한민국 직장인은 매일 회사를 오가기만 하면 별일 없이 사는 사람으로 평가 받는다. 그 사람의 내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낫는지, 어떤 고민을 안고 있는지는 전혀 밝혀지지 않은 채 별일 없이 사는 사람이 된다. 남들이 보기에는 나 역시 별일 없이 회사를 다니는 사람이겠지만 요즘의 나는 살아 온 시간 중 가장 힘든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남들로 하여금 별일 없이 사는 사람으로 보여지는 회사 생활을 계속 하고 있고, 그로 인해 시간은 계속 흘러가버려 스트레스는 배가 되었다.


당장 돈을 벌어야만해서 부랴부랴 취직을 했다. 적성이나 직업적인 수명, 10년 후의 나의 모습 같은 건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다. 나쁘지 않은 월급을 준다기에 취직을 했고, 만 3년이 된 순간 깨달았다. 이건 내가 바래온 인생도 내가 꿈꾸는 미래도 아니라는 걸.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일이 줄지 않았다. 담당해야할 업무들은 계속 늘어갔고, 쉼 없이 일해도 인정받지 못했다. 매일같이 왕복 3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를 지옥철에서 보내야했고, 또 수시로 야근을 하고 마감일 전에는 회사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다. (아니 한다. 슬프게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온몸 여기저기가 번갈아가며 아팠다. 한국 직장인 여성은 누구나 겪는다는 생리불순은 기본이고, 병적인 편두통에 위염까지 찾아왔다. 거기다가 만성 스트레스로 잠 잘 때 이를 꽉 물고 자는 습관이 생겼는데, 때문에 내 잇몸이 상당히 약해졌단다. 내 나이 서른에 잇몸이 아파 치과에 가게 될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무실에서 카메라 테스트하다가 찍힌 쭈구리 같은 나의 모습.



자라면서 나는 단 한 번도 직장인이 될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우리 부모님은 왜 누구나 학교를 졸업하고 나이를 먹으면 회사라는 곳에(물론 형태는 여러가지 이겠지만) 들어가 일을 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시켜 주지 않으셨을까. 이제와 원망해봐야 소용 없는 일이지만, 갑자기 현실이 되어버린 직장생활이 적잖이 당황스럽다. 심지어 나같은 아이들이 더이상 생기지 않도록 고등학교 교사들에게 진로선택에 대해 보다 현실적인 조언을 할 수 있는 교육을 의무화 시켜야한다는 생각도 했다.



흘린 땀도 배반한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 담임 선생님의 지론은 '흘린 땀은 배반하지 않는다' 였다. 수능을 보고 대학을 가고 대학을 졸업할 때 까지도 그의 지론은 늘 옳았다. 늘 공부한만큼 좋은 성적을 거두고 시험에 합격했다. 그런데 회사생활은 달랐다. '흘린 땀은 배반하지 않는다'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유일한 곳이 회사라는 집단이었다. 아무리 애써도 끝나지 않은 일들이 쌓여만 가고, 내가 열심히 만든 기획안을 팀장이 가로채가기도 하며, 밤을 새워 쓴 제안서가 순전히 친분에 의해 탈락하기도 한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삶이 나아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되는 그 자리에서 톱니바퀴의 부속품 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열심히 해봤자 달라지는게 없다는 걸 깨닫고는 딱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만 일을 했다. 업무시간에 슬쩍 인터넷 쇼핑도 하고, 메신저로 친구와 수다를 떨다가 조금이라도 생산적인 일을 해보자 싶어 영어단어를 찾아 외우기도 했다. 어느 누구도 내가 일을 하지 않고 있다는 걸 알고 지적하지 않았다. 칭찬도 비난도 없는 곳, 그곳에서 나는 도태되기 시작했다.


어학연수를 가고 싶다. 혼자 여행이 떠나고 싶다. 그러려면 뭘 해야하지, 시간과 돈이 필요하다. 시간을 벌려면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데 그러면 돈은? 시간과 돈이 이렇게나 상반되는 가치였던가. 보잘 것 없는 월급이지만 어떻게든 한 달만 버텨내면 몇 백만원의 돈이 입금된다. 그 돈으로 가족들의 생활비도 보태주고, 밥도 사먹고, 옷도 사고, 친구들도 만나고, 저금도 하고, 공과금도 내고 그렇게 36개월을 지내왔다. 월급이 없는 삶은 어떨까? 두려웠다. 상반되는 욕구들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결국은 자기 비하의 단계에 까지 이르러 있을 때 그 녀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 것이다.


친구가 걱정되고 물론 만나고 싶긴 했지만, 요즘의 나는 가족들과 함께 있는 것도 불편할 정도로 혼자 있는 시간이 간절했다.


보통은 여기까지 이야기가 흘러온다면 그래서 회사를 그만뒀다든가 어학연수를 떠났다는 내용으로 이어져야 할 것 같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최선이자 최고의 것들을 골라봤다. 한주동안 휴가를 내고 뒹굴거리기, 새로운 것들을 배우기(예를들면 베이킹, 꽃꽂이, 바리스타 등등), 혼자 여행하기 또 뭐가 있을까? 사실은 뒹굴거리기가 가장 땡겼지만 이왕이면 발전적인 뒹굴거리기를 하려고 만만하면서도 언제가도 좋은 제주도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내일 제주도에 간다. 남이 하면 참 쉬워보이지만 내가 하려면 어려운 혼자 여행, 나같이 겁이 많은 사람도 혼자 여행을 하니 나를 보고 다른 분들도 용기를 내셨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램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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