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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이 May 13. 2020

아름다움의 진화

즐거운 춤 생활


예술 없는 행복한 삶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중 하나. 음악을 몸짓으로 표현할 때 춤이 된다.  음악이 몸으로 흐르고 몸은 음악을 탄다.




2년 전 건강관리 차원에서 춤을 배우기 위해 아파트 단지 내 댄스교실을 찾았다. 나를 처음 맞이해준 선생님 A의 첫인상은 내 기대를 살짝 밀어냈다.


'춤추는 사람'이라면 늘씬한 몸매에 길쭉길쭉한 팔 다리의 소유자일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녀는 키도, 팔다리도 짤막하고 휜 모양이 내 몸이나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전문 춤꾼은 자고로 예술적(?)인 외모의 소유자일 거라는 나만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때였다. 그런데, 춤을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A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겼다.


세속적인 미인의 기준과는 다소 거리가 먼 작은 눈과 큰 입가에서, 춤을 추는 동안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기쁨 가득한 눈빛과 활짝 띤 미소에 나도 덩달아 행복해졌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음악을 타고 흐르는 우아한 곡선의 활기찬 동선은 '절대미'의 기준으로 느껴질 만큼 내게는 아름답게 느껴졌다. 세속적인 기준 따위는 잊혔다.


춤에 서툴렀던 나는 수업시간 내내 그녀의 섬세한 동작 하나하나를 모두 눈에 담아야만 했다. 초보자의 춤 욕심이 활활 타올랐던 만큼,  A의 춤은 내가 1년여 동안 가장 오랜 시간 가장 뜨겁게 바라본 대상이었다. 그녀만이 간직한 고유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감상하는 즐거움을 맘껏 누리며 급기야 A를 동경하게 되었다.


 사랑이 별건가? 세상의 잣대와 무관하게 내게 너무나 아름다운 A를 나는 사랑한 것이리라. 그런 그가 얼마 전 이사를 이유로 이별을 고했다. 아름다운 이를 떠나보내는 것이 슬펐고, 그 이상의 댄서는 다시없겠지 싶었다.

새로 온 B는 나이 지긋한 중년 여성이다. 나는 또다시 이 노회한 댄서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겼다.  

선율에 몸을 태우고, 자유분방하게 건들건들 가볍게  리듬을 타는 B에게서는 춤의 경지가 느껴지고, 성을 초월한 아름다움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구부정하고 두툼한 허리와 늘어진 팔뚝 살조차도 선율과 리듬에 몸이 녹아드는 순간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한창때의 체력은 아니어서, 절제된 듯 가벼운 몸짓임에도 수강생들에게는 엄청난 에너지로 다가와 자기 역량을 훨씬 넘는 동작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그 아름다움의 비밀은 몸과 음악의 조화에 있는 것 같다. 음악의 리듬을 타고 노는 멋진 댄서들에게서 자유로움의 경지와 아름다움의 정점을 볼 수 있었다.



아주 드물게 아주 가끔은 리듬에 맞춰 춤을 출 때 어느새 둔탁하던 몸이 사라지고, 구름이나 솜사탕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바로 그때 춤의 신비로움에 빠져들게 된다. 남몰래 나만의 초보 탈출 기점으로 삼고픈 즐거운 경험이다.


어쩌면 그 순간, 나도 그녀들처럼 '나만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비밀스러운 착각은 춤을 추는 기쁨을 더해 준다.


내로라하는 '아름다움'의 대표주자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다. 그 기준은 보통 사람은 도저히 근접 불가해서 천 번쯤 다시 태어나야 가능할까 말까 할 정도로 나와는 무관한 그 무엇이다.


'오래, 자세히 봐야 아름답다'고 했던가. 바로 '당신'이라서, '나'라서 아름다울 수 있도록, 대상의 고유함을 발견하는 나만의 시선을 가져보면 어떨까.


단 하나의 빛나는 별을 추앙하는 아름다움 말고, 이름 없는 수많은 별 하나하나에서 고유함을 찾아내는 '진화된 아름다움'으로 우리는 서로 더 귀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적어도 타고난 외형에서 소외되지 않고, 모두가 고유한 아름다움의 소유자임을 자부할 수 있도록.




 춤을 배우며 몸의 아름다움에 대한 편견을 깬 것은 나에게 큰 깨달음이다. 춤은 남녀노소, 몸이 불편한 이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 음악에 영혼과 감정을 녹여낸 움직임은 모두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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