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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이 Aug 08. 2020

나는 (0)

조용히 산다는 것

살아간다는 건 뭘까? 수십 년을 '나'로 살고 있지만, 딱히 실체가 보이지 않는다. 잘 살아온 건가 스스로 의심스럽다. 그래도 허점투성이 생각을 글로 정리하면서부터는 어렴풋이 나의 존재가 실선으로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 같다. 글쓰기는 좋든 싫든 솔직한 내 모습을 드러내 준다. 더불어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향을 모색하게도 된다.    


거실 한켠에 운동기구가 얌전히 서 있다. 이름과 달리 24시간 조용히 침묵을 지킨다. 게으른 주인 탓에 집에 들어온 지 오래지 않아 용도를 잃고 잊혀가고 있다. 물끄러미 거실 창가 양지바른 자리를 차지하고 한 자락 얼룩진 그늘만 더하는 골칫거리 신세가 되었다. 그래도 가끔은 손잡이나 등받이에 양말이나 수건이, 옷가지가 걸리곤 한다.


방치되어 가만히 있는 것들을 보면 남 같지 않은 친근감과 함께 살가움이 느껴진다. 왜냐면, 나도 꽤나 정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조용히 가만히 있는 건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크게 잘한 것도 못한 것도 없이, 즉 존재감 없이 살아간다.   


‘자기주장이 별로 없는 조용한 사람’. 나를 아는 주변인들이 전하는 내 모습이다. 가끔은 핀잔을 듣기도 한다. 속내를 표현해야 마음이 건강해진다며, 그렇게 안으로만 삭이다가는 병난다고. 때로는 진짜 남들 말대로 '내 안에서 뭔가 썩고 있으면 어쩌나' 걱정될 때가 있다. 그래서 가끔 마음 단단히 먹고 내 상황과 감정을, 욕구를 떠벌여 본다. 그러고 나서 돌아서면, 속이 후련하기는커녕 뱉어낸 말이 흉물스러운 후회로 남아 마음만 더 무거워질 뿐이다.  

   

오래전 어느 날, 친구와 산책을 하던 중 친구는 내게 나무 한그루를 가리켰다.

“이 나무 널 닮았어.” 

빈말일지언정 예쁜 나무가 내게 비유되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나를 바라보듯 각별한 시선으로 나무의 아름다운 면모를 찾아냈다. 지금껏 나는 그 자태를 뚜렷이 기억한다. 나무는 예쁜 곡선을 그리며 하늘하늘한 자태로 봄의 숲 안에서 여느 나무들처럼 서 있었다. 여린 나무임에도 구불구불 가느다란 줄기를 고루 뻗고, 많지 않은 나뭇잎은 예쁘고 싱싱하게 빛났다. 나도 왠지 그렇게 살아야 할 것 같았다.     


숲에 들어서면, 아름다운 꽃이 눈길을 매혹하고 웅장한 나무는 위용을 자랑한다. 그 배경은 무수한 푸른 초목이다. 인간사회에서도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이름 없는 초목의 삶을 산다. 삶은 거창한 것이 아님을 세월이 더해질수록 깨닫는다.   


<조화로운 삶>의 저자 스콧 니어링 부부가 말하는 삶의 철학은 단순하다. 다른 생명이나 자연에 가해지는 해악을 최소로 하는 삶을 지향했다. 그들은 산업화된 도시를 떠나 자연 속으로 들어갔다. 노동을 통해 자급자족하고, 채식을 하며, 가축을 기르지 않았다. 편리하고 풍족하나, 파괴적인 '인위'를 거부했다. 그들의 '조화로운 삶'은 일, 놀이, 관계, 배움을  고루 살되, 해로운 흔적을 남기지 않고 떠나는 것이었다.


오늘 아침 나는 출근 준비를 위해 많은 양의 물을 더럽혔다. 점심으로는 돼지고기가 잔뜩 든 감자탕에 생선 튀김을 먹었다. 지구환경을 더럽히고 다른 생명을 해하는 데 일조했다. 이렇게 내가 수십 년간 먹어치우고, 쓰고 버리고, 배설한 '해악'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단지 환경이나 물질적인 측면 만이 아니다. 나로 인해 누군가의 사랑과 정성을 소모하고, 누군가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무형의 노폐물은 또 얼마나 클지 가늠하기 힘들다.


반면 내가 세상에 베푼 이로움은 얼마나 될까. 가끔 위험한 장난을 치는 아이를 만나면 조심하게 한다. 매월 좋은 일에 쓰이도록 소액기부에 참여한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맡은 직분에 충실하려 한다. 이어가려니 참으로 보잘것이 없다. 더구나 이제껏 받아온 사랑과 관심만큼 누군가와 마음을 나눈 적은 얼마나 될까. 부끄러운 대답만 돌아올 뿐이다.


위대한 꿈을 향한 출세 지향적 삶은 거꾸로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욕망에 다가가려는 움직임은 그만큼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아름다운 나무는 홀로 침묵하며 가만히 선 자태로 무한한 생명력을 지닌다. 수많은 생명의 삶터가 되고, 먹이가 되어주고, 바람을 일으키고, 그늘을 드리운다.  


생명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로, 긍정적 영향을 (+)로 표시해 셈을 해 본다면,  인간은 압도적인 (–)를 살아간다. 편리함과 따스함, 포만감과 쾌락에 둘러싸인 사회에 살면서 (0)에 이르도록 무해하게 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제 사람의 역사가 길어져 그 유해함이 거대한 눈덩이가 되어서 우리를 향해 돌아오고 있다. 처음 겪는 질병과 이상 기후, 각종 재난의 모습으로 삶을 위협한다. 물질적, 이념적으로 누적된 욕망을 향한 다툼 속에서 서로를 적대시하는 정신적 빈곤을 앓는다. 거기에 내 삶도 뒤엉켜 있다.


나무의 삶, 조화로운 삶,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삶은 생명 존중의 역동성을 품는다. 가만히, 작게, 없는 것처럼 산다는 건 결코 수동적인 삶의 자세가 아니다.


내 삶은 온통 '유해함'의 저지레로 요란스럽다. 조용한 사람, 나무를 닮은 사람이 내 모습이라 믿었던 착각이 부끄러워진다. 동시에 앞으로 삶의 방향등이 켜졌다. (0)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 움푹 패인 해로움의 흔적을 매워가는 삶은 어떤 것일까.


불필요한 소모를 줄이고 타인의 삶을 좇는 욕망을 내려놓아야겠다. 마음 무거운 친지에게 따뜻한 위로와 안부를 묻는 것. 함부로 세제를 풀지 않는 것. 비 맞은 비둘기가 쉬어갈 수 있도록 창가 모퉁이를 내어주는 것. 함께 많이 웃을 수 있도록 행복한 마음을 나누는 것. 쉽게 시작해야겠다.


조용한 이란 (0)을 향해 끊임없이 후퇴와 전진을 반복하며 나아가는 이다. '조용한 사람'은 내가 받아들인 굴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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