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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이 Jan 06. 2021

내가 만약 돌멩이라면

필경사 바틀비 (허먼 멜빌)-독후감

-내가 만약 돌멩이라면-

반듯한 아스팔트 위에선 사람들 발길에 이리저리 차이겠지.

조각가나 석수장이는 끌과 망치로 내 온몸을 쪼려 덤빌 거야.

공사장에서라면 시멘트 반죽에 섞여 잘생긴 벽돌로 환생하겠지.

강변을 걷다가 두리번거리는 연인 손에 잡히는 날엔

물수제비 뜨느라 냅다 강물에 풍덩      


깊은 숲 속 나무 아래 바윗돌이라면 어떨까?

꽃과 나뭇잎과 바람이 구르고 곤충이 기어 다니겠지.

동물들이 기대고 사랑하며 내 곁에서 잠들겠지.     


바닷가 조약돌은 어떨까?

하루 종일 몸 비비며 누워 파도에 젖고 햇살에 반짝이는 건.      

그게 삶의 전부라면 어떨까?       


새해가 되었다. 사람들은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새로운 다짐과 실천을 꿈꾼다. 운동, 공부, 여행, 봉사 등. 그 속내는 살면서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에 유용한 존재가 되기 위함이다. 반대로 한사코 쓸모없는 존재가 되려는 의지를 고수하는 사람도 있을까? 있다. 필경사 바틀비가 그렇다. 그를 이해하려다 보면, 사막이나 정글 숲 한가운데에 던져진 기분에 빠져 도리질을 치게 된다. 그리고, 우린 무얼 위해 사는 걸까. 무얼 쫓고 있는 걸까. 나는 누구인가. 다시금 뿌리치기 힘든 생각에 빠져든다.  

   

필경사 바틀비는 소설 속 화자인 변호사의 사무실에 고용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일도 ‘하지 않는 편’을 택하기만 한다. 게다가 사무실 무전취식까지. 그는 이제 이 곳에서 없어져야 할 쓸모없는 골칫거리일 뿐이다. 그를 내보내기 위한 변호사의 갖은 호의와 인내와 묘책에도 불구하고 ‘유령’처럼, 사무실에 놓인 '석고 흉상'처럼 요지부동이다. 해고되어 쫓겨나는 것조차 그는 ‘당하지 않는 편’을 택했으므로.

어떤 희로애락의 감정도, 욕망도 없는 그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 다만, 무생물인 듯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고, 벽을 향해 돌아서 있을 뿐. 모두에게 무용지물인 그가 떠밀린 곳은 결국 감옥이다. 그곳 담벼락을 마주한 채 마침내 죽음에 이른다.      


한 사람을 떠올렸다. 내가 다니는 우리 동네 단골 마트 주변에 가끔 그가 출몰했다. 못 본 지 벌써 한두 해가 훌쩍 지난 것 같다. 남루한 행색에 엉클어진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 깡마르고 때 낀 얼굴의 그. 모두의 경계 대상인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내 가까이에 불쑥 몸을 들이밀었다. 내가 고른 물건을 계산대 위에 올리자, 날렵한 몸짓으로 내 물건 곁에 소주 한 병을 더해놓는 게 아닌가? 그간 쌓인 경계심은 순간 자동 폭발했다. 굳은 표정과 단호한 몸짓으로 소주병을 외면했다. 내 물건만을 서둘러 계산하고 뿌리치듯 마트를 떠났다. 그런데 그때 훽 돌아서던 내 시선 끝에 걸리는 게 있었다. 기대 반 부끄러움 반, 멋쩍음 가득 희미한 그의 미소였다. ( 다시금 내게 그 상황이 온다면....) 지금쯤 그는 어디까지 밀려났을까?

     

자유로운 삶이라고는 하지만, 우리가 가는 길은 이미 정해져 있다.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에 충실하도록 길들여진다. 그리고 자신을 대신하는 신분이나 직업 안에서 쓰임새 있는 인간으로 재탄생한다. 비닐하우스 속 채소나 벽돌 공장의 벽돌처럼. 그렇지 않은 삶은 무용지물이며 경계 대상이다.

소설 속 변호사나 그의 충직한 고용인 터키, 니퍼스가 바로 그런 우리 모습이다. 그들은 유용하지만, 재탄생 과정의 후유증인 건지, 성마르고 불만에 차 있다. 흥분하고 분노하며 신경질적이다. 반면, 무용지물 불량품인 바틀비는 평화롭고 고요하다. “하지만 저는 특별하지 않아요.” 바틀비의 말이다. 그래, 어쩌면 우리가 변종 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요즘 고민에 빠졌다. AI의 출현 때문이다. 그놈들이 장차 사람의 일자리를 빼앗을 거란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도 집착했던 삶은 첨단 기계로 대체 가능한, 낡은 기계 같은 삶이었던가?

세상은 날로 발전하고 있다는 데 왜 사람의 마음은 점점 더 병들고 아픈 건지. 왜 행복하지 않은 건지.

      

소설 말미에 이르러도 바틀비는 여전히 의문투성이 불가해한 존재다. 이쯤에서 작가는 수수께끼를 더해주듯, 그에 대해 약간의 정보를 흘린다. 과거에 그가 한 일은 이미 죽은 사람에게 전해졌어야 할, 때늦은 우편물을 태워 처리하는 일이었다고. 그 안에는 죽음을 앞둔 이들을 향한 희망과 사랑, 용서와 구원의 메시지가 들어있었다고.

헛된 욕망을 쫓다가 죽음이 코앞에 닥친 뒤에야 놓쳐버린 진실을 깨닫는, 때늦은 우리 삶을 드러내 주는 것 같다.


욕망 가득한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수단적 삶에 갇혔다. 그것은 생명을 상실한 죽음이나 다를 바 없다. 생명의 메시지는 죽음에 닿을 수 없다. ‘하지 않는 편을 택’하는 바틀비는 죽음 앞에 길 잃은 생명 메시지의 상징일지도 모른다. 동시에 그에게서 선택받지 못한 세상은 본연의 삶에서 이탈한 변질된 삶이다. 욕망 저편의 바틀비는 어리석은 우리 삶에 끝내 닿지 못했다.


소설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생명의 심부름을 하는 그 편지들은 급히 죽음으로 치닫는다. 아, 바틀비여! 아, 인류여!’     


세상 쓸모없는 바틀비는 잊히지 않고 왜 우리 앞에 돌아왔을까? 순응적 삶의 표상인 변호사는  바틀비를 잊지 못한다. 내가 마트에서 만난 그의 미소 띤 얼굴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생명의 메시지에 우린 조금 꿈틀 한 걸까? 상식 너머에 있는 바틀비에게는 주행 중인 내 삶을 멈칫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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