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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랑 Oct 11. 2021

나는 계속 자발적 호구가 되기로 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은 이 일을 왜 계속 해야할까.


중학교 시절부터 다이어리 첫 장에 진실, 진심 두 단어를 써놓을 만큼 오랜 기간 내 삶을 지탱해 온 가치관 중 하나는 진심을 다해 진실한 마음으로 살며 늘 그런 마음으로 사람을, 상황을 대하자는 것이었다. 누군가에겐 거창해 보일 수도, 누군가에겐 당연해 보일 수도 있지만. 나에게 그것은 매 순간 마음을 뒤돌아보고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너무나 쉽게 색이 바래져 버릴, 평생을 바쳐 꼭 지켜야 할 어떤 것이라 느껴졌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짧은 인생이지만 살면서 깨달은 것은 진심을 다해, 진실한 마음으로 사람에게 마음을 쏟는 일은 때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보다 허무했다는 것이다. 일이나 운동, 자기계발 등에 마음을 쏟고 시간과 돈을 투자했다면, 그래도 그에 상응하는 결과는 얻었을 텐데.


사람에게 마음을 쏟으며 시간과 돈 등을 쓰는 일은 단 한 번의 실수와 예상치 못한 작은 오해로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기도, 때론 그 결과가 ‘배신’이라는 단어로 마무리 지어지기도 했기에.


시간이 겹겹이 쌓여가며, 사람에 대한 기억이 늘어가며, 여전히 사람에게 진실한 마음으로 진심으로를 외치며 그렇게 마음을 꾸준히 쏟는 일은 어떤 것보다 더 힘든 고약한 과정이 되었다. 이 모든 일이 나의 진실과 진심에 비례하지 않고 어찌나 정직하지 않은지 힘든 과정과 쏟은 노력에  비하여 결과는 너무나 형편없을 때가 많았으니까.


언젠가는 그게 무엇이든 '형편없는'이라는 단어에 들어갈 만한 결과가 차라리 고마울 정도로 어떤 관계는 수 년의 인생을 뒤흔들 정도의 강한 트라우마를 남기기도 했고, 나의 진실했던 감정과 진심어린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인생에 깊고 큰 상처를 남기고 도망가기도 했다.


시간과 돈, 감정, 에너지, 마음 나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관계를 위해 쏟고, 계산 없이 그저 상대의 편의와 평안 그리고 행복을 위해서 사용했던 그런 시간, 아니 그저 내 사람이 덜 아프고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 웃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했던 행동. 나의 진심과 진실은 그저 내가 마주하는 사람들의 행복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어쩌면 자발적 호구가 되었는지 모른다.


힘든 상황을 마주하고 있는 친구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몇 날 밤을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 형편이 어려워 차비가 없는 친구의 차비를 보내주거나 내주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친구들의 밥값을 매번 계산하거나 일을 못하는 학창 시절엔 밥값을 보내주기도 하고, 남자친구와 싸워 울며 전화하면 먼 길을 한걸음에 달려가고, 이별 휴유증을 겪는 친구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주고. 갈 곳이 없는 친구와 가족을 우리 집에서 묵게 하고,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함께 울어주고. 그것들은 짧으면 몇 일, 몇 주지만 길면 때론 몇 년이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어쩌면 굳이 겪지 말아야 할 사건들을 겪고 결국 한동안 많이 아팠다. 자발적 호구로서 살아가기엔 세상엔 너무나 많은 하이에나가 있었다. 타인의 선한 마음을 자신의 편의와 평안, 행복을 위해 물건처럼 쉽게 생각하고 더 악하게는 타인의 것을 뺏어 쉽게 사는 것을 즐거워하며, 속이고 이용하려고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나는 서른이 가까이 돼서야 깨달았다.


누군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가 그 사람의 진심을 알고 싶으면, 진심을 다해 잘해주라고. 이 말을 보면서도 어느 정도 수긍은 했지만, 그래도 진심은 통하지 않을까. 더 잘해주면 통하겠지.라고 생각하던 긍정적인 나였는데. 서른이 되어서야 지독한 성장통을 겪었다. 그렇게 몇 년을 헤어나오지 못했다.


이제야 생각해보면 그렇게 순수하게 살았는데, 그제야 그런 걸 겪다니. 신께서 나를 보호하신 것 같다. 서른이 다 된 딸이 인간관계에 성장통을 겪으며 펑펑 우는 것을 지켜본 부모님께서는 이제야 우리 딸이 진짜 사람을 알았구나. 싶었단다.


초반에 마음이 완전히 무너져버렸던 나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무지한 내 탓을 했고, 나중에는 그 친구 탓을 했고, 배신감이라는 감정에 정신을 빼앗겼다. 누군가 나에게 이런 일을 저질렀고 너무나 상처받았다며 사람은 알 수 없는 존재라고 더 이상 믿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다니기도 했다. 지인들은 그 사람을 함께 욕해주었고, 앞으로 그런 사람을 멀리하라고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걸 바라진 않았는지 순수하게 마음 쏟았던 그 사람이 욕먹는 게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고, 그 사건으로 그런 사람을 단번에 알아차려 멀리 할 수 있을까 의문만 더 생겼다. 사기꾼에게 사기 당한 피해자들 마음도 공감가고 그들을 나무라기 어려워졌달까. 이리는 늘 양의 탈을 쓰고 다니기에.     


그리고 얼마 후엔 두려움이 날 제압하고는 내 마음에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적당히 마음을 쏟지 그랬어. 적당히 사랑하지 그랬어. 진심으로 대하지 말지 그랬어. 진실하게 행동하지 말지 그랬어. 사람은 믿으면 안 돼. 그러니까 네가 당한거야. 이 바보야.           


이 모든 말들이 날 애워싸며 너무 힘들게 했지만 가장 마음에서 뿌리치고 싶었던 것은, 그래서 네가 진심으로 사랑으로 그 친구가 행복하길 원해서 했던 행동들이 그래서 다 무슨 소용이야. 그냥 바보같이 이용당한 건데. 라는 말이었다. 나의 행동이 선의가 아닌 이용당한 것으로 치부되는 것. 무용지물 같았다는 것.

    

여러 날을 참 많이 울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도 이처럼 허무한 일이겠지. 그렇게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다. 시간이 답을 알려준다더니, 시간이 지나며 상처로 출렁이던 마음이 자연스레 잔잔해졌다. 배신감이라는 감정에 더이상 나를 빼앗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건 나를 위한 것도, 나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것도, 세상을 위한 것도. 그 어느 것도 아니기에.


그렇게 나는 그 친구 없는 빈자리에서 나의 진심에 다시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사람들에게 배신당한 일에 대해 더이상 말하지 않기로 다짐했고, 처음으로 마음을 다해 축복을 빌어주었다. 그러자 그동안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짐 하나가 사라지는 듯한 해방감을 맛보았다. 이제 이것은 그 친구를 떠나 내 과거 진심을 위한 것이기도, 지금의 나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아직도 아주 가끔 그 일들이 수면 위로 떠 올라 날 괴롭힐 때마다 덜 아문 마음의 상처를 통해 어둠이 스며들지 않게, 언젠가는 그 친구를 향한 축복이 백프로 진심이 되기를 바란다.     


어린 시절 다이어리에 꾹꾹 눌러 쓴 다짐 때문이었는지. 이기적인 나에게 누군가가 조건 없이 주었던 성실하고 진실한 사랑 때문이었는지. 이 사건 이후로도 결국 나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도 같을 수 있는 이 위험하고 허무할지 모르는 모험을 계속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따끔 차가운 바람이 스치곤 할 때면, 이젠 거의 흔적이 되어버린 상처가 똑똑- 자신의 존재를 알리며 마음에 노크한다. 그럴때면 나는 본능적으로 흔적을 응시하곤, 타인의 마음으로부터 한걸음 뒤로 물러선다.


진심을 다해 진실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게 그렇게 중요한 건가. 그런 마음을 사람에게 쏟는 게 과연 가치 있는 건가. 그곳이 과연 이곳이 맞을까. 하지만 이내 상처의 기억 때문에 사랑할 기회를 잃고 싶진 않아. 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럼 지켜보다가 밑 빠진 독이 아니면 그때 네 마음을 쏟으면 되잖아. 어둠이 스며든 상처의 흔적이 나를 설득한다.


나는 흔적에게서 시선을 떼고,  옆의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 사람의 눈과 마음과 입술과 영혼을 바라본다.


나는 흔적에게 말한다.

밑 빠진 독의 마음을 가진 사람인지 판단하는 시간만큼, 단단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지녔을지 모르는 이 사람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줄어드는게 싫어.


그러자 흔적은 더이상 내게 말을 걸지 않고, 희미해졌다.


진심과 진실을 외면하며,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나의 진심이 통할 진실한 사람들을 알 기회를 잃고 싶지 않다. 짧은 인생, 벌써부터 사람에 대한 기대와 믿음을 반으로 접어버리며, 무미건조하게 살기에는 결국 세상에 사람만큼 가치 있는 것이 없더라.

사람만큼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없더라.

사람만큼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없더라.

사람만큼 사람을 지킬 수 있는 것이 없더라.

사람만큼 아름다운 것이 없더라.



진심으로, 진실하게 살다 보면 그리고 그렇게 마음을 쏟다 보면 언젠가 타인의 마음을 더 투명하게 알 수 있지 않을까. 아니 꼭 그렇게 알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나는 나의 마음을 아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그리고 이 마음을 나와 타인을 위한 마음으로 바꾸고, 지켜내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상대의 마음은 내 것이 아니니까.


조금은 단단해진걸까. 이제야 사람에게 마음을 쏟는 일에는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 과정만으로 충분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에게 진심과 진실로, 내가   있는 최선을 다해 사랑의 마음을 쏟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예쁘고 빛나는 마음들은 절대 흩어지지 않는다. 그래, 그것들은 하늘의 빛이 되어 당신을 지켜줄 것이다.  과정을 통해서 타인이 아닌 나는 변화되었기에, 결국 세상도 아주 조금은 살만하게 변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진심을 다해, 내가 만나는 누군가에게 진실한 마음을 쏟을 것이다.

마치 자발적 호구처럼.


너를 위해

나를 위해

우리 모두를 위해.                      



세상이 아주 조금은 살만해졌으면 좋겠다.


이렇게 많은 걸 내어주는 큰 나무같은 사람이 되고싶다. 나와 함께하는 당신의 세상이 아주 조금은 살만해지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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