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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장에 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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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

연애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태권도를 하는 얘기를 하는데 뜬금없이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

이 3개월짜리 짧은 연애의 시작과 끝이 태권도와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태권도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거절할 기운도 없어 받게 된 소개팅이었다. 그리고 이 웃기는 상대방은 다음날 아침, 그러니까 당일 저녁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 나는 만나는 날을 당일로 정하는 소개팅을 아직까지도 들어보지 못했다.


문제는 그때의 내가 태권도에 정신이 팔려있었다는 거다. 오늘 만나면 태권도를 안 빼도 되고, 마침 미팅 가는 날이라 복장도 단정했다. 미팅 차림이지 소개팅 차림은 아니었으나 알게 뭐람. 태권도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게 제일 중요했다. 어차피 집도 회사도 모두 근처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냥 알겠다고 한 뒤 그날 저녁 상대방을 만났다. 잘은 몰라도 내가 당일 약속을 수락한 것이 그 사람 마음에 제법 든 모양이었다. 사실 그날 안 봤으면 태권도 때문에 열흘은 밀렸을 일정이라 그랬던 건데.


소개팅을 저따위로 결정할 정도로 내 일상은 태권도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태권도 안 가는 날엔 자발적인 야근으로 일을 당겨서 해두었고(야근수당 없는 회사였다)

그럼에도 야근을 해야 하는 날엔 태권도에 갔다 와서 남은 일을 했다.

평일 저녁약속은 잡지도 않았고

점심시간엔 국기원에서 올려준 품새 동영상을 시청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목각인형이었다. 몸과 마음이, 손과 팔이, 발과 다리가 다 따로 놀았다.

잘못 쓴 표현이 아니다. 정말로 팔과 다리가 아니라 손과 팔, 발과 다리가 전부 따로 놀았다.


항상 주먹을 쥔 채 허리에 붙어있어야 하는 보조손은 주 손의 동작과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발은 동작별로 유지해야 하는 각도가 있었는데 발모양을 신경 쓰면 무릎 방향이 틀어졌다.

시선은 어딜 봐야 하냐고요? 그것까지 신경 쓰면 손발이 둘 다 틀어집니다!


내 손목이 꺾여있다는 것도 이때 알았고 , 내 팔이 휘어있는 것도 이때 알았다.

아킬레스건이 짧은 것도, 햄스트링이 짧은 것도 다 이때 알게 된 사실이다.


관장님은 내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더 신기해했다.

아니 평소에 쓸 일이 없는데 어떻게 알겠냐고요.


갈수록 내 몸에 답이 없음만이 드러나고 있을 때, 내 사수가 퇴사를 하게 된다.

이제 정신까지 답이 없어졌다는 소리다.


이놈에 회사는 도움을 주지를 않았다. 대리와 주임 둘이서 하던 일을 혼자서 처리하기에도 벅차 죽겠는데

사무실 이사도 셀프로 해야 했고, 상황이 꼬이면서 직무 변경으로 인한 타 팀과 업무 일부를 교환까지 해야 했다.

타 팀 차장님께서는 내게 친절히 말로 하나하나 설명해 주셨고, 나는 차장님께 드리기 위한 인수인계 자료파일을 만들어야 했다. 당일을 넘겨서 퇴근하기 일쑤였다.


이 몰아치는 폭풍 속에서 나는 결국 사람에게 의지하기를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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