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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프로듀서 Aug 24. 2019

만화 속으로 들어간 마을

노력과 우연, 약간의 행운, 그리고 연륜에서 나오는 운영능력

걸판스러운 마을이 있다


'걸판스럽다'

그 모양이나 규모 따위가 놀라울 정도로 아주 크고 대단한 데가 있다.라는 순 우리말이다.


필자는 늘 관광지를 소개할 때마다

"이 곳은 정말 끝내준다" 라던가

"이 곳은 정말 죽여준다"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지만

오늘 소개할 곳은 정말로 걸판스럽다


요즘은 잘 쓰지 않는 표현이지만, 이 글을 모두 읽고 난 뒤에는

정말로 '걸판스럽다'라는 말이 어울린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한때는 잘 나가던 관광지, 그러나...

오아라이의 해수욕장

도쿄에서 위로 140km 정도 올라가면, 이바라키현의 오아라이 시가 나온다.

마치 속초나 강릉이 떠오르는 시원한 바다를 가진 곳이다.


수도권과 홋카이도를 이어주는 동일본 해상교통의 거점인 '이바라키항'과

동일본 최대 규모의 '오아라이 선 비치 해수욕장'등등

비록 인구가 적고 대부분 농업과 어업의 종사하는 조그만 마을이지만

동일본에 사는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가본 동일본의 대표 관광지다.


동일본 최대 규모의 해수욕장이라는 타이틀 하나만으로

오아라이는 사실 많은 지역들의 최대 고민거리인 '관광객 유치'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마을이었다.


그러나 이 작은 마을에 거대한 재앙이 닥치고 만다.


동일본대지진의 직격탄에 맞은 오아라이

2011년은 일본에게 최악의 해였다.

사상 최악의 자연재해였던 동일본 대지진은 동일본은 물론 일본을 완전히 무너트려 버렸고

그 피해는 아직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처럼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쉽게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동일본의 정가운데 위치한 오아라이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마비되어버린 항구와 초토화되어버린 마을.

지진과 해일에 무참히 난도질되어 그 누구도 오아라이의 부활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로 인한 동일본의 방사능 공포는

직격탄을 맞은 마을에겐 사형선고와도 같은 일이었다.


기적은 기적처럼 오지 않는다.

국토교통성·관광청 주관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여행이 있다> 장려상

2013년 경제효과 7억 엔

2015년 관광객 수 440만 명


놀랍게도 오아라이는 완벽하게 부활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동화책 같은 이야기였다.

마치 홍해를 가른 모세처럼 하늘이 기적이라도 부리신 걸까?


기적은 가만히 있는 자에게는 오지 않는다.

피나는 노력에서 시작된 오아라이의 드라마 같은 부활 신화는

상상도 못 한 곳에서 시작된다.


절망의 구덩이에 빠진 한 중소기업이 있다.

이렇다 할 성공작 하나 없는 데다 창립 사장의 사망에 사원 부족까지,

그 누구도 관심조차 주지 않았던 애니메이션 회사 '액터스'

액터스의 애니메이션 걸즈 앤 판처

그들에게는 최후의 오기를 쥐어짠

회사의 운명을 건 마지막 한 발이 필요했다


일본 만화의 대표 소재중 하나인

'청춘을 바치는 학교스포츠물'은 지금까지

슬램덩크(농구), 하이큐!!(배구), 겁쟁이 페달(사이클) 등등

땀내 나는 남자 운동선수 캐릭터들의 전유물이었다.


이들의 새로운 만화는 이러한 클리셰를 깨버리는

여자 캐릭터들의 스포츠물이었다.

처음 기획 콘셉트는 사격이었지만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회사의 부도위기에 정신줄을 놓은 것일까?

전차를 이용한 스포츠라는

기상천외하고도 기괴망측한 의견으로

그들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만화를 만들게 된다.

바로 미소녀 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은 '걸즈 앤 판처' 바로 '걸판'의 탄생이었다.


이쯤 되면 독자들은 지난 사세보의 햄버거 편을 떠올릴 것이다.

"아, 그럼 사세보처럼 오아라이는 만화 제작사의 주도로 재건에 성공했구나."


정답은 'NO'다.


일본의 고교야구 고시엔에서는 가끔 있는 아무런 지원이나 투자없는 맨땅에서 시작하여

오직 열정만으로 악조건을 이기고 올라온 멋진 스토리를 써내는 학교처럼

'걸즈 앤 판'의 주무대 역시 산지가 험하고 연습이 힘든 산골마을들이 후보에 올랐다.


즉, 오아라이는 이 후보지 목록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수많은 우연이 겹쳐 만들어내는 이야기들

그런데, 막상 산골마을을 배경으로 정하니 여러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배경이 되는 지역을 답사하러 갈 때마다 너무 먼 거리 때문에 일정이 길어졌고

탱크가 주 무기가 되는 스포츠다 보니, 만화에서 마을을 부수는 표현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자신의 마을이 박살이 나는 만화를 좋아할 사람들이 과연 어디에 있을까?

걸즈 앤 판처의 프로듀서 스기야마 키요시 씨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만화의 배경장소는 도쿄에서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오아라이가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오아라이는 걸즈 앤 판처의 프로듀서인 '스기야마 키요시'와 음향 프로듀서의 고향이었다.

그들은 오아라이의 연줄을 이용하면 "마을을 마음껏 때려 부셔도 되는가"에 대한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음향 프로듀서의 아버지의 소개로 지역 상공회의 도움을 받아 "재미만 있으면 된다"라는 허가를 받음으로써


우연과 우연으로 오아라이와 인연이 시작된다.


재미있는 점은 사세보시와 다르게 오아라이 시는 제작사와의 어떠한 행정적 업무도 하지 않았다.

행정이 말려드는 순간 만화 제작에 영향을 줄 것이고, 작품을 망칠 수도 있다는 이유로

경제효과에 대해서는 일절 이야기하지 않았고, 그저 재미있게 만들어달라는 마을 사람들의 부탁만이 있었다.


성지화의 시작

만화속 장면에 나오는 오아라이역과 실제 오아라이역

    뉴타입 애니메이션 어워드 2013 작품상

    뉴타입 애니메이션 어워드 2013 극중 음악상

    뉴타입 애니메이션 어워드 2013 감독상

    제18회 애니메이션 코베상 개인상

    제45회 성운상 미디어 부문 노미네이트  

    제47회 성운상 미디어 부문 수상


상상도 못 한 '초대박'이었다.

오아라이의 지역 특산물인 고구마말랭이(호시이모)를 달고사는 캐릭터

탱크 타는 여고생이라는 독창적인 소재와 마치 숨은 그림 찾기처럼 만화 속에 속속히 숨어있는

오아라이의 특징들, 탱크의 섬세한 부분도 놓치지 않은 고증은 만화의 스토리를 더욱 재미있게 만들어 주었다.

'걸즈 앤 판처'는 만화를 좋아하는 젊은 층과

소비력이 높고 군사 관련 취미에 관심이 많은 중년층까지 동시에 잡아버렸다.


그런데, 걸즈 앤 판처의 방영은 고작 3개월이라는 단기간이었다.

하지만 그 효과는 2019년인 지금도 계속되어가고 있다.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엄청난 수의 관광객들이 아직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막상 제작진은 처음부터 이렇게 성공할 것이라고는 장담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아라이와의 연계를 통한 이벤트는 구색만 맞추고 있었을 뿐 마케팅으로 이용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오아라이의 걸즈 앤 판처 버스

그런데, 오아라이가 어떤 마을인가?

수많은 시간을 유명 관광지로 보내온

관광마케팅의 달인들이 모인 마을 아닌가.

지진과 해일로 상처 입고 우울해하던 마을에게

걸즈 앤 판처는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마케팅을 공격적으로 하지 못하던 제작진들에게

마을 사람들은 호의를 베풀며 실력을 발휘했다


버스와 전철, 택시 등등 오아라이의 대중교통에

부착할 캐릭터 스티커를 파격적인 가격에 제공하였으며 마을 사람들이 스스로 시공하기까지 했다.


오아라이의 '성지화'가 시작된 것이다.


오아라이의 대표 특산물축제인 '아귀축제'(좌)와 주인공 팀인 아귀팀(우)


만화의 효과로 오아라이에는 조금씩 관광객이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다.


오아라이의 주민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오아라이의 대표 특산물 축제인 아귀 축제에 걸즈 앤 판처를 접목시킴으로써 기존의 지역축제를

하나의 만화를 즐길 수 있는 콘텐츠로 변화시킴으로써 자칫 존재감이 사라질 수 있었던 지역문화를 지키

확실하게 홍보할 수 있는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아낸 것이다.

이로써 2011년 3만 명이 찾았던 아귀 축제는 1년 만에 두배에 가까운 6만 명이 찾아오게 되었다.


마을 구석구석 숨어있는 캐릭터들과 캐릭터상품


오아라이는 애니메이션의 배경이라는 특성을 철저하게 반영했다.

상점가들은 등장인물의 패널을 가게 앞에 전시하고 지도에 표시하여 여행객에게 즐거운 숨바꼭질을 선사한다.

또한 패널은 특정구역이 아닌 오아라이 시내 곳곳에 설치하였기에, 사람의 통행이 거의 없던 거리까지

여행객들이 찾아가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마을 전체를 관광하게 만드는 것이다.


혹여나 '캐릭터로 바가지 장사를 한다'라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오아라이의 상점들에는 가게마다 자신들의 오리지널 상품을 옛날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가격으로 판매하고 있다.


심지어 동사무소에서는 캐릭터들에게 주민등록증까지 만들어주면서

만화 속 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만화와 현실의 경계를 허물어버렸다.


캐릭터들은 마을의 주민이 되어 마을 사람들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만화 같은 마을의 만화 같은 돈카츠

쿡팬의 탱크모양 돈카츠 '탱카츠'

오아라이에 온다면 절대 빠트릴 수 없는 음식은 무엇일까?

오아라이의 특산물인 아귀와 고구마도 있지만, 만화 속에 나온 음식을 그대로 먹을 수 있는

'쿡팬'의 '탱카츠'가 있다.


한국에서는 시험의 합격을 기원하며 찹쌀떡이나 엿을 먹는 문화가 있는 것처럼

일본에도 중요한 시험이나 시합 전에는 돈카츠를 먹는 문화가 있는데,

커틀렛이라는 의미인 돈카츠의 '카츠'는 이기다(勝)와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만화에서도 시합 전 돈카츠를 먹는 캐릭터들을 볼 수 있는데, 그 돈카츠 가게가 바로 이곳 쿡팬이다.

그런데 사실 쿡팬에는 탱크 모양의 돈카츠가 없었다.

만화의 방송 이후 만화에 나온 모습 그대로 만들어낸 사장님의 센스가 보이는 메뉴라고 할 수 있다.


재미있는 점은, 이 가게의 사장이 바로 오아라이를 걸판의 배경으로 쓸 수 있도록 만든

오아라이 지역 활성화 사업의 총책임자라는 것이다.

그의 노력이 없었다면 걸즈 앤 판처가 만들어지지 못했을 수도 있었으니, 만화의 일등공신 아닐까.


돈카츠의 맛은 그야말로 예술이라 부를 수 있다.

바삭한 식감의 튀김옷 속에서 크림 같은 부드러움을 숨기고 있는 비계가 박힌 고기는

따듯한 초봄 날씨에 내린 눈처럼 입속에서 금세 사라져 버린다.


마치 만화처럼 말이다.


돈카츠를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한 번쯤 들려봐도 후회하지 않을 가게이니 강력 추천한다.


Cook fan

3322-1 Sakadochō, 酒門町 Mito, Ibaraki 310-0841 일본


단순하지만 맛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브론즈의 철판 나폴리탄

일본의 나폴리탄은 우리나라의 6.25 전후 음식처럼

2차 세계대전 이후 생겨난 대표적인 양식 중 하나이다.


맛은커녕 배를 채우바빴던 미군들 케첩에 스파게티를 대충 버무려먹는 모습을 본 일본인 요리사가 몇 가지 야채와 버섯을 넣어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기에,

나폴리탄의 조리법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독창적인 조리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 케첩을 사용하는 조리법은 미국으로 이사 온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사용하던 방법이다.


재미있게도 이제는 이탈리아 사람은 모르고 일본인은 아는 마치 짜장면 같은 음식이 되었다.


단순한 조리법의 음식이기에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지만, 브론즈의 철판 나폴리탄은 독특한 풍미가 일품이다.


나이가 지긋하신 여사장님의 철판 나폴리탄,

넉넉히 부어진 올리브 오일과 토마토케첩 소스는 단순한 조합이지만 감히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세월의 맛이 담겨있다

거기에 나폴리탄을 품고 있는 계란은 그야말로 금상첨화.


만화에 나온 음식을 따라 해서 파는 상업적인 가게였다면, 이러한 맛이 나올 수 있었을까?


걸즈 앤 판처에서 볼 수 있는 철판 나폴리탄

브론즈의 철판 나폴리탄은 걸즈 앤 판처를 본 사람들에게는 굉장한 경험이다. 만화 속 캐릭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인생 최고의 행복일 것이다.

물론 만화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가게를 즐길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나폴리탄의 맛 하나는 정말 최고이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식사가 될 것이다.


Bronze

684 Isohamachō, Oarai, Higashiibaraki-gun, Ibaraki 311-1301 일본


만화에게 마을을 부흥시킬 힘 같은 것은 없다

그의 생각은 언제나 한결같다

소제목을 본 독자분들은

'지금까지 신나게 설명하더니 갑자기 왜 딴소리일까?'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재미있게도 소제목의 말은 위에서도 한번 등장하신 스기야마 키요시 프로듀서의 말이다.


수많은 기자들에게 오아라이는 기적이라고 렸지만,

"볼 것 없는 작은 마을의 기적 같은 부활"이라는 말은 오아라이에겐 상당히 기분 나쁜 말이다.


오아라이는 절대 볼 것 없는 마을이 아니다.

원래부터 오아라이는 유명 관광지였고, 만화는 관광지를 더욱 즐겁게 일종의 콘텐츠일 뿐이지 만화가 오아라이의 모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컨텐츠의 수명은 생각보다 짧다

오와콘(オワコン)

일본어로 끝나다 라는 오와리(おわり)와 콘텐츠의 합성어다.

콘텐츠의 힘은 영원하지 않다.

그 힘을 너무 맹신하고 발전 없이 멈춘 관광지의 미래는 어두울 뿐이다.

이미 국내 수많은 드라마 촬영지를 통해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걸즈 앤 판처를 통해 말하고 싶던 것은 바로 이것이다.

콘텐츠 마케팅의 효과는 굉장하지만 절대 영원하지 않다.


오와콘 문제는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바로 눈 앞에 이득을 노리는 소위 '한탕주의'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콘텐츠에 빨대 꼽고 빨아먹는 행위의 결말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축제는 언젠가 끝난다

오아라이의 노력은 계속된다

벌써 2019년,

걸즈 앤 판처가 종영된 지 7년이 지났고

제작사는 최근 걸즈 앤 판처를 마무리한다는 발표를 했지만

오아라이는 여전히 유명 관광지로 손꼽힌다.

이것은 걸즈 앤 판처 하나만으로 이루어진 기적이 아니다.


만화로 돈 번다는 이미지를 바꾸기 위한 지속적인 마을 사람들의 열정.

만화를 보고 찾아온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전통문화축제와 잘 정돈된 명소.


걸즈 앤 판처가 오아라이를 이끄는 것이 아니다.

오아라이가 걸즈 앤 판처를 이끄는 것이다


언젠간 걸즈 앤 판처도 사람들에게 잊히고 하나의 추억이 되겠지만

마을 사람들의 노력이 있는 한,

'걸판'스러움이 사라지더라도 걸판스러운 마을로 꾸준히 사랑받을 것이다.


정말 걸판스럽지 않은가?


-FIN-


글쓴이-쉐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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