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쉐프로듀서 Oct 19. 2019

든든하고 뜨끈하게

일본인의 라멘 사랑을 만화로 풀어내다.

라멘은 국밥이다

일본의 라멘과 한국의 국밥은 서로 국적은 다르지만 신기할 정도로 닮은 점이 많다.


서민적인 음식이라는 점, 저렴한 가격에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점, 어느 지역에나 있다는 점

지역마다 특색이 있다는 점, 한일 양국을 대표하는 음식이라는 점

국밥과 라멘은 신기할정도로 닮았다.

그리고 요즘 신세대들에게는 많이 외면받는 음식이라는 점에서도 꽤나 유사하다.


요즘 국밥은 '국밥충' '든든충'처럼 국밥을 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을 비꼬는 말이 생길 정도로

입맛이 점점 서구화되어가고 있는 젊은 층들에게는 '기성세대들의 음식'이라고 느껴지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이런 상황이 참으로 딱하고 가슴 아프다.

'국에 밥을 말아 끓인 음식'이라는 단순한 사전적 의미와는 다르게

수없이 많은 국밥의 가짓수는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 나오는 여러 가지 맛이 나는 껌처럼

마법 같은 다양성을 가진 국밥이란 단어는 참으로 매력적인 단어다.

게다가 국밥은 한식 세계화에 가장 적합한 음식이다.

밥은 조연이고 정신없는 가짓수의 반찬이 주연이 되며 한식의 정통성은 보기 힘든 '한정식'이나

외국인에게 거부감을 주는 그로테스크한 비주얼의 김치보단

일품요리로 안성맞춤이고 한국의 지역별 특색을 잘 갖추고 있으며

스튜와 비슷한 비주얼인 국밥이야말로 최고의 한식 아니겠는가.

국밥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비꼬는 유수민 작가의 작품

대체 국밥이 무엇을 잘못했다고 이렇게 놀림거리가 돼야 하는가.

먼 옛날부터 주모를 찾으며 국밥을 시키던 한민족 아니던가.

뜨끈하고 든든하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훌륭한 가성비의 식사를 좋아하는 것이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라멘 역시 비슷한 상황이다.

일본에서는 라멘이 '굉장히 건강에 좋지 않은 음식'이라 불리며 높은 나트륨과 지방으로 인해

점점 젊은 층들에게 외면받고 있는 음식이다.


이러한 젊은 층을 라멘에 미치게 만든 한 소녀가 있다.


라멘의 라멘에 의한 라멘을 위한

미소녀가 라멘을 먹으러 다닌다는 만화 '라멘 너무 좋아 코이즈미 씨'

2016년도 당시 한국도 한참 백종원 열풍이 불면서 요리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며

스타 셰프들과 요리 관련 프로그램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던 시기인지라

이때를 노린 것처럼 많은 출판사들과 애니메이션 방송사들은 요리 관련 작품들을 중점적으로 내기 시작했는데,

그중에서는 정말 요리를 잘 표현해낸 좋은 작품도 있었고

그저 '요리만화'라는 타이틀에 묻어가려는 실망스러운 실패작도 많았다.


일본의 여성 만화가 나루미 나루의 만화 '라멘 너무 좋아 코이즈미 씨'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도

필자는 "아 또 그저 그런 양산형 미소녀 요리만화가 나왔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다 이 만화에 대한 기억이 잊혀 갈 때쯤, 

라멘 관련 칼럼을 작성하다가 한 가지 놀라운 점을 알게 되었다.

드라마판 '라멘 너무 좋아 코이즈미 씨'에 카메오로 출연한 일본라멘 전문 칼럼니스트 '한쯔 엔도'

필자가 굉장히 존경하는 칼럼니스트인 '한쯔 엔도'에 대한 조사를 하던 도중 한쯔 씨가 '라멘 너무 좋아 코이즈미 씨'에 출연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는 필자의 궁금증에 불을 지폈다.

공식 사이트에서 볼 수 있는 방송에 나온 라멘집에 대한 한쯔 씨의 자세한 설명

심지어 카메오로 출연한 것도 놀라운데 한쯔 씨는 아예 방송을 감수하고 있었다.

점점 이 작품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갔다.


"일본의 거물급 칼럼니스트, 그것도 라멘 전문인 그가 라멘 만화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드라마에 출현했다는 것은 그저 마케팅적인 요소일 수도 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출현한 것이 아닐까"


'한쯔 엔도'라는 수식어 하나만으로 만화에 대한 기대감은 점점 커져갔고, 처음엔 무시했었던 작품을 한번 들여다보기로 했다.

굉장히 섬세한 설명은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하다

'라멘 너무 좋아 코이즈미 씨'는 그저 라멘만 먹는 만화가 아니었다.


라멘의 근본과 지역별 라멘에 대한 섬세한 설명과 맛 표현, 주인공을 통해 전해지는 맛의 포인트 등등

마치 만화가 아니라 잘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를 보는듯한 느낌을 준다.


여기에 평소 딱히 라멘을 좋아하지 않던 주인공의 친구들이 점점 라멘의 맛을 알고 빠져드는 스토리는

시청자들의 입속에 침을 고이게 만들며 다음엔 어떤 라멘이 나올지 기대하게 만든다.


정리하자면 '라멘 너무 좋아 코이즈미 씨'는 만화보단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만화라는 재미있는 콘텐츠로 라멘을 표현하여, 요즘 글과 지루한 지식채널을 싫어하는 젊은 층에게

라멘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며 마치 가이드북처럼 젊은 층을 리드한다.

이렇게 만화는 기성세대의 음식으로 불리며 점점 잊혀가는 라멘의 깊은 맛을

다시 한번 젊은 층에게 멋지게 어필하며 세대교체를 하고 있다.


라멘이 있는 곳이라면 그녀가 있다

원작 만화(좌)의 인기를 토대로 드라마판(중간) 그리고 애니메이션판(우)까지 만들어졌다.


점점 젊은 층의 인기를 잃어가고 있는 기성세대의 음식이던 라멘을 순식간에 젊은 층까지 매료시키는 음식으로 바꾼 '라멘 너무 좋아 코이즈미 씨'의 위력은 다시 한번 만화 콘텐츠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애니메이션판의 경우 906장이라는 처참한 DVD 판매량을 기록했지만

일반적인 애니메이션이었다면 실패작이라고 불릴 판매량과 다르게 식을 줄 모르는 뜨거운 인기를 보여줬다.

후쿠오카의 대표 라멘 기업 잇푸도가 출시한 콜라보 상품 '잇푸도 시로마루' 

특히 실제로 있는 가게를 만화 속에 그대로 그려낸 것은 엄청난 홍보효과를 내며 많은 라멘 가게들을 미어터지게 만들었고, 특히 후쿠오카의 '잇푸도'의 경우 이 찬스를 놓치지 않았다.

코믹마켓 96에 출품되었던 잇푸도의 콜라보 라멘

만화에도 등장했던 대형 라멘 프랜차이즈인 잇푸도는 세계적인 만화축제인 코믹마켓(이하 코미케) 94에서 만화와 콜라보된 라멘을 출시했다.


만화를 통해 라멘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던 팬들에게

만화에 나온 라멘은 그야말로 지갑을 꺼내게 만드는 최고의 상품이었다.


이후 끊임없는 재판매 요청으로 잇푸도는 아예 본격적으로 콜라보 라멘 제작을 시작했고

2019년 여름에 열렸던 코미케 96에서도 주인공과 친구들이 그려진 잇푸도의 라멘이 있었고

식을 줄 모르는 높은 인기와 연이은 매진으로 잇푸도의 행복한 절규를 볼 수 있었다


그녀의 활약은 비단 만화행사뿐만이 아니다.

올해로 10주년을 맞이하는 '도쿄 라멘쇼'

일본 최대 규모의 라멘 행사인 도쿄 라멘쇼.

2009년부터 시작된 도쿄 라멘쇼는 식문화 교육과 일본 국내 관광산업을 계몽하기 위해 시작되었는데,

지역별로 특색을 가진 라멘을 한 곳에서 볼 수 있고, 또 도쿄 라멘쇼에서만 볼 수 있는 한정 콜라보 라멘 등등

일본인들의 라멘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지, 

또 라멘이 일본인에게 어떠한 음식인지 잘 볼 수 있는 행사인 이곳에서도 그녀를 볼 수 있었다.

도쿄 라멘쇼 공식 서포터인  '라멘 너무 좋아 코이즈미 씨'

2015년에 '라멘 너무 좋아 코이즈미 씨'의 주인공 '코이즈미'를 공식 서포터로 지정하며 본격적으로 만화와 손을 잡기 시작한 도쿄 라멘쇼는 매년마다 만화를 이용한 행사 홍보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일본의 대표 인스턴트 컵라면 '컵누들'까지 콜라보한 '라멘 너무 좋아 코이즈미 씨'

한국의 신라면과 거의 동급의 인지도를 가진 일본의 대표 인스턴트 컵라면인 '컵누들'도 그녀와 함께했다.

라멘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는 만화 속 코이즈미처럼, 

코이즈미는 이제 일본 라멘 관련 행사와 상품에서는 빠지지 않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야말로 라멘 대통령이 되어버린 것이다.


라멘은 감성적이고 국밥은 비위생적인가

하지만 이러한 모습을 볼 때마다, 여전히 국밥에 대한 슬픈 생각이 계속 떠오르게 된다.

일본에서 유명하다는 오래된 라멘집들을 가보면 주방환경이 그리 깨끗하진 않다

라멘과 국밥은 둘 모두 서민의 음식이지만, 국밥은 아직도 그 틀에 박힌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몇 대째 한 가게에서 장사하며 인정받은 맛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라멘이나 국밥이나 다를 바가 없는데,

어째서 라멘은 '장인의 감성'이고 국밥은 '비위생적인 가게'라는 억울한 누명을 써야만 하는가.


심지어 라멘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며 외국인들에게 자랑스럽게 내미는 일본과 달리

국밥을 굉장히 부끄러워하며 외국인에게 권하지 않고 오히려 외국인을 통해 국밥이 세계에 알려지는 한국의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순천 국밥 축제의 규모를 보다가 도쿄 라멘쇼의 규모를 보면 씁쓸하기까지 하다. 

어찌 보면 코이즈미도 국밥충이다

코이즈미가 라멘이 싸거나 가성비가 좋아서 삼시세끼 라멘을 먹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도 라멘을 사랑하기 때문에 늘 라멘을 먹었고

그녀의 행동은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있던 라멘에 대한 사랑을 다시 불을 지폈다.


국밥충은 절대 비웃음 당할 존재가 아니다.

국밥의 맛을 알고 꾸준히 국밥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국밥은 꿋꿋이 한국인의 밥상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이제는 '국밥충'이라고 비꼬기보다는, '국밥러'라고 불러주는 게 어떨까.


필자는 국밥의 힘을 믿는다.

가장 서민적인 음식이 그 나라를 대표하는 음식인 것처럼

우린 더 이상 국밥을 부끄럽게 생각해선 안된다.

"한식 세계화는 정갈하고 아름다워야 한다"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싸구려라서 안 팔린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한식이 싸구려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식 세계화가 힘들다는 망언을 내뱉는다.


정말로 한식이 싸구려라서 실패하는 것일까?


떡볶이의 매운맛을 중화시킨다며 크림을 넣어서 국적불명의 음식을 만든다던가

떡의 식감을 좋아하지 않는 외국인들을 위해 파스타면을 넣은 떡볶이를 만든다던가

독일의 사우어크라우트나 일본의 츠케모노처럼, 반찬이나 재료로 써야 하는 김치를 외국인들의 입에 욱여넣는

한식 세계화가 정말로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쓸데없는 고급화 전략과 실패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안정성만 추구하며 김치, 불고기만 지겹게 밀어대는 한식 세계화가 정말로 싸구려라서 실패하는 걸까?


한식 세계화에 싸구려 서민음식인 국밥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하며 글을 마친다.


"그럼 라멘은 왜 안 망했나요?"


-FIN-

글쓴이-쉐프로듀서

이전 03화 쌀 팔기 대작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