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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프로듀서 Sep 01. 2019

쌀 팔기 대작전

캐릭터 산업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쌀이 남아돈다

매년 추수철만 되면 농민들은 울상이다

정말로 쌀이 남아돈다.

요즘 쌀밥을 먹는 경우가 상당히 드물다. 한국의 식단이 서구화되면서 밀의 소비가 늘어난 점도 있지만

그냥 밥을 잘 안 먹는다. 필자도 그렇고 요즘 아침을 거르는 사람들을 보기 쉽다.

게다가 수입쌀까지 들어오니 안 그래도 매년 추수철마다 쌀이 남아돈다는 뉴스가 들리는데

농민들의 심정은 오죽하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쌀이 천대받는 시기에 한 달 만에 무려 2년분 쌀을 팔아치우고

매년마다 완판 되는 놀라운 쌀이 있다.


매일 집에 놀러 오던 친한 친구가 변했다

만화속 캐릭터가 그려진 수수했던 과거의 디자인

쌀이라는 식품의 특성상 없으면 안 되는 필수품이자 우리에게 친숙한 제품이기 때문에, 대부분 무난한 그림체로 쌀포대를 장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아키타현의 아키타코마치 역시 시작은 수수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본 역시 농업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쌀농사를 하는 농부의 모습'처럼 큰 거부감도 없고 과하지도 않은 적당한 디자인을 원했다.

시기 좋게 당시 아키타현을 배경으로 하는 '낚시광 산페이(한국명 소년 낚시광)'의 캐릭터를 채용하여

쌀포대에 삽입함으로써 아키타코마치만의 개성과 친근함을 둘 다 잡아내었다.

여인을 내세운 아키타코마치

또한 여성의 사진을 넣은 디자인도 있었다.

'아키타코마치'라는 이름을 풀어보면 '아키타현의 미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말 그대로 포장지에 '아키타코마치'를 넣은 것이다.

일종의 말장난이지만, 아키타코마치가 일본을 대표하는 미인쌀이 되기를 바라는

아키타현 우고정(정:우리나라의 군에 해당) 농협의 바람이 담겨있기도 했다.


이렇게 1984년부터 꾸준히 생산되어온 품종인 아키타현의 아키타코마치는

비록 일본 최고의 품종인 고시히카리에 밀릴지라도 니가타, 홋카이도에 이어 3위의 생산량을 자랑했으니

'고급쌀'보다는 '매일 먹는 쌀'이라는 이미지가 있는 일본인들의 '친한 친구'이자 '가족'이었다.


2008년 처음으로 선보인 아키타코마치의 새 디자인

그렇게 오랜 세월 집안의 친구였던 녀석이 갑자기 변했다.

대체 아키타현 우고정 농협이 갑자기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간밤에 먹었던 쌀이 소화가 잘 되지 않아서 머리가 돌아버린 것인가?

2008년, 여인의 사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웬 미소녀 캐릭터 한 명이 들어섰다.


젊은이들보다는 가족이 소비하는 제품이라서 그랬을까?

아키타코마치는 새 포장지 출시 이후 백화점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는다.

주로 가족의 식사를 담당하는 중장년층에게 새 디자인은 너무나도 파격적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났다면 이 칼럼은 쓰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키타현 최고의 히트상품이 되다

2018년 10주년을 맞이한 아키타코마치

백화점에서 쫓겨났던 2008년.

아키타코마치의 그림이 인터넷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소위 '오타쿠'층의 구매욕을 자극하기 시작했고, 인터넷의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한순간에 아키타현 우고정 농협 홈페이지는 하루 5건의 접속이 5000건으로 폭등하였고

이때를 놓치지 않은 아키타현 우고정 농협은 9월 22일부터 인터넷 판매를 시작하며

한 달 만에 2500건, 30톤 분량의 아키타코마치를 팔아치우는 경이로운 기록을 만들어냈다.


처음에는 그저 캐릭터성만 소비되고 아까운 쌀은 버려지는 것 아닌가 걱정했지만

주 구매층이었던 20~30대 남성들에게 '쌀맛이 대단하다'라는 호평에서부터

'처음으로 밥솥을 구매했다'라는 놀라운 대답까지 듣게 되면서 아키타현 우고정 농협은 점점 자신감을 얻었다.


인터넷 판매를 주력으로 정기구독까지 가능하다

인터넷을 주로 이용하는 젊은 구매층을 노리기 위해 아키타코마치는 인터넷 판매에 주력했다.

매달 정기적으로 쌀을 배송해주는 '구독 서비스'까지 만들어냄으로써

충성도 높은 구매층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2019년, 아키타코마치라는 품종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 36년.

그리고 파격적인 디자인의 캐릭터가 등장한 지 11년이 흘렀다.


놀랍게도 아키타코마치는 아직도 매년마다 연속 품절을 갱신하며 신나는 비명을 지르고 있다.


하지만, 이쯤 되니 또 의문의 생기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이게 바로 필자가 그렇게 혐오하던 "캐릭터만 팔아먹기"아닌가?

그저 몇몇 만화 오타쿠들에게 돈을 뺏는 상술이 아닐까?


맛이 없으면 팔리지도 않았다

이 위대한(?) 쌀의 탄생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키타코마치는 코다마 토오루(좌)씨와 사이토 쇼이치(우)씨를 포함한 단 세명으로 시작되었다

1963년을 정점으로 일본의 쌀 소비량은 점차 감소하고 있었다.

1965년에 공급과잉이 되면서 소비자들은 점차 배불리 먹는 것보다 맛있게 먹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면서

쌀의 양보다 질이 중요한 쌀맛 경쟁시대가 도래한다.


쌀 산지 간의 품종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주요 쌀 생산지인 아키타현 역시 고민에 빠지게 되는데,

지금도 유명하지만 당시에도 유명한 품종이었던 고시히카리는

만생종이라 늦게 익는 데다가 쉽게 쓰러지기 때문에 아키타에서는 생산할 수 없었다.

그렇게 아키타현 우고정 농협은 새로운 품종 개발을 시작한다.


하지만 시작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당시 아키타현 우고정 농협의 직원은 코다마 토오루 씨와 사이토 쇼이치 과장,

그리고 하타케야마 토시히코 연구원까지 단 세명이었다.

심지어 과장과 연구원은 사육 경험마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정말 대단했다.

직접 동북지역의 시험장을 돌아다니며 육종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하나씩 공부해 나아갔고

아무것도 없던 아키타현 우고정 농협에 품종육성을 위한 교배실 만들기까지 하면서

맛있는 아키타의 쌀을 만들겠다는 그들의 열정은 언제나 뜨거웠다.

아키타코마치의 논

그렇게 1976년 하타케야마 연구원은 후쿠이 농업기술원에서 시험 중이던 품종을 하나 발견한다.

고시히카리와 오우292호를 교배시킨 이 벼는 맛은 그럭저럭이었으나 병충해와 냉해에 강한 벼였다.


하타케야마 연구원은 "이 정도라면 아키타에서 잘 적응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이 품종을 아키타로 가져오는데.


후에 이 품종이 아키타코마치라는 브랜드 쌀을 만드는 원석이었다는 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후 1977년부터 육종 작업을 실시하여 늦게 익는 벼는 걸러내고 아키타에 맞는 품종을 골라내어

교배시키는 수년간의 노력을 거쳐 드디어 대망의 1982년 '아키타31호'라는 품종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이후 '아키타31호'는 2년간의 현지 재배를 거쳐 1984년 가을에 '아키타코마치'라는 이름으로 출시된다.


아키타코마치의 데뷔는 놀라웠다.

일본곡물검정협회에서 매년 실시하는 테스트에서 니가타의 고시히카리는 1점 만점에 0.8점인데 반해

아키타코마치는 1점 만점에 0.944라는 경이로운 점수를 받아내며 좋은 출발을 보여줬다.


그런데 약간의 논란(?)이 있었다.

아키타코마치를 재배하고 만들어낸 것은 아키타현이지만

처음 교배종을 만들어냈던 후쿠이현에서 아키타코마치의 특허권을 주장했기 때문이었는데

결국 양쪽 모두 양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키타코마치는 아키타현과 후쿠이현 양쪽에서 재배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아키타현은 아키타코마치의 상품성을 살리는 것에 집중하게 되면서

'아키타코마치'라는 캐릭터가 생기지 않았나 라는 생각을 해본다.


쌀에서 끝났으면 살아남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리 맛있는 쌀이라 하더라도, 급속도로 변하는 캐릭터 마케팅 시장 속에서

어떻게 11년이라는 긴 기간을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아키타현의 천연 양조 된장도 아키타코마치로 홍보된다

아키타현은 이 좋은 캐릭터를 그저 쌀 하나에만 사용하지 않았다.

쌀과 연관되는 식품들을 함께 홍보하면서, 아키타코마치는 가정의 식탁의 점점 침투하고 있다.

아키타현 흑우를 사용한 카레(좌)와 아키타 수박(우)

캐릭터 역시 아키타코마치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아키타현 흑우를 이용한 카레와 아키타 수박에도 캐릭터를 그려냄으로써

제2, 제3의 아키타코마치들이 끊임없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아키타현 우고정의 쌀 장인 안도 씨

또한 아키타코마치 역시 끊임없는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쌀 장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안도 씨는

아키타코마치중에서도 최고 걸작으로 불릴 수 있는 쌀을 만들어내고 있다.

최상급 아키타코마치 '미호우마레'

그는 자신의 논이 남들의 논보다 보잘것없다고 한다.


다른 논보다 벼 이삭의 양이 적기 때문에 보기엔 예쁘지 않지만, 여기에는 벼의 이삭 양을 의도적으로 줄여 벼가 더 효율적으로 크고 맛있는 통통한 쌀을 만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그의 큰 뜻이 담겨있다.


매일매일 논을 돌며 날씨와 기온을 고려하여 수위 조정까지 하는 그의 모습에서 마치 아이를 키우는 듯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런 장인들의 손에서 아키타코마치는 다시 한번 세상을 놀라게 할  준비를 하고 있다.


아키타현은 끊임없는 신상품개발과 새로운 캐릭터 그리고 품종개량을 위한 노력.

그들의 아이디어가 마르지 않는 한, 아키타현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브랜드와 마케팅의 시대.

우리의 농촌도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FIN-


글쓴이-쉐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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