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이해한다는 건, 내 안의 세계를 다시 쓰는 일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에필로그까지 마무리한 지금까지도 나는 여전히 밴댕이 소갈딱지다.
친구의 자랑을 들으면 속으로 살짝 계산기를 두드리고,
전 연인의 소식을 들으면 괜히 날씨 탓을 한다.
SNS 피드를 넘기다 보면 “좋아요” 대신 “좋겠다”가 먼저 튀어나온다.
다만 이제는 그런 나를 꾸짖지 않는다.
그저 속으로 중얼거린다.
“그래, 인간이면 이 정도는 느낄 수 있지.”
예전엔 이런 감정을 부끄러워했다.
이제는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진다.
『데미안』의 그 유명한 문장처럼,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질투를 이해하려는 여정도 그와 같다.
우리가 깨야 하는 ‘알’은 남이 만든 감정의 틀이다.
“질투는 나쁜 거야.”
“쿨한 사람은 이런 감정 안 느껴.”
“성숙한 사람은 비교하지 않아.”
이런 말들이 내면의 알껍질을 단단히 감싸왔다.
그 안은 따뜻하지만, 숨이 막힌다.
안전하지만, 시야가 좁다.
질투를 이해한다는 건
그 껍질을 부수고 바깥세상의 빛을 맞이하는 일이다.
그 빛은 눈부시고, 처음엔 아프다.
하지만 그 빛 없이는 시야가 열리지 않는다.
이 책은 질투라는 감정을 핑계 삼아,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여정이었다.
1장에서 우리는 친구의 합격 소식 앞에서 쿡 찔린 마음을 들여다보며,
질투가 타인에 대한 감정보다 내 안의 불안의 언어임을 배웠다.
2장과 3장에서는 가까운 사람일수록 질투가 더 아프다는 사실,
그 감정이 사랑과 관계의 깊이와 연결된다는 걸 알았다.
4장에서는 가족의 비교 속에 숨어 있던 사랑의 왜곡된 표현을 마주했고,
5장과 6장에서는 질투가 단순한 도덕 문제가 아니라 뇌와 진화의 회로라는 걸 이해했다.
7장부터 우리는 시선을 안으로 돌렸다.
질투가 ‘타인을 향한 감정’이 아니라 ‘내 욕망의 거울’이라는 사실을 마주했고,
8장과 9장에서는 그 밑바닥에 깔린 열등감과 인정 욕망을 탐구했다.
그 감정들이 결핍이 아니라 성장의 동력이라는 것도.
10장과 11장에서는 비교의 방향을 바꾸고,
타인의 속도가 아니라 나의 리듬으로 사는 법을 모색했다.
그리고 12장에 이르러 우리는 마침내 깨달았다.
질투는 사라지지 않지만, 그 감정을 품는 순간 인간은 온전해진다.
이 책은 결국 질투의 심리학이 아니라,
불완전한 우리 자신을 이해해가는 인간의 심리학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마지막 문장 위에서 우리는 하나의 알을 깨고 있다.
내 감정을 부끄러워하던 옛 세계에서,
감정과 함께 살아가는 새 세계로.
융은 인간의 성숙을,
“빛과 그림자를 통합하는 일”이라 했다.
우리는 평생 빛만 보여주려 애쓴다.
착하고, 능력 있고, 쿨하고, 긍정적인 모습들.
하지만 진짜 성장의 시작은
“내 안의 그림자를 인정하는 순간”이다.
질투, 열등감, 두려움, 인정욕 —
그건 없애야 할 결함이 아니라,
내가 완전해지기 위해 필요한 조각들이다.
융이 말한 개성화(individuation)는
결함 없는 인간이 되는 게 아니라,
불완전한 나를 온전히 품는 인간이 되는 과정이다.
감정은 미성숙의 증거가 아니다.
그건 ‘내가 아직 살아 있고, 변화하고 있다는 징후’다.
감정을 이해한다는 건,
아픔을 피하는 일이 아니다.
그건 오히려 고통을 통과하는 일이다.
새가 알을 깨듯,
우리도 자신을 지탱하던 세계를 깨야만 새로운 시야를 얻는다.
그리고 깨지는 순간마다,
우리는 조금씩 더 깊은 인간이 된다.
처음엔 친구의 성공이 질투였지만,
이제는 그 성공이 “가능성의 예시”로 느껴진다.
처음엔 연인의 이별이 실패였지만,
이제는 “내가 사랑할 수 있었던 증거”로 남는다.
감정은 나를 부수는 게 아니라,
나를 다시 빚는 일이다.
질투를 단번에 극복하겠다는 마음은
오히려 자신을 더 괴롭힌다.
성장은 언제나 가랑비처럼 찾아온다.
매일 조금씩, 천천히, 스며들 듯이.
처음엔 여전히 비교하고,
여전히 자존감이 흔들릴지라도, 그 감정 속에서
“아, 지금 나는 또 배우고 있구나”라고 알아차리는 순간이 온다.
그때 질투는 적이 아니라,
삶의 리듬을 가르쳐주는 스승이 된다.
감정이란 결국 나를 바라보는 언어다.
질투를 이해한다는 건
내 삶을 읽는 문법을 새로 배우는 일이다.
과거에는 “나는 왜 이럴까”로 문장이 끝났다면,
이제는 “나는 왜 이렇게 느끼는 걸까?”로 시작된다.
그 문장의 끝에는 변명이 아니라 이해가 있다.
이해가 쌓이면 용서가 되고,
용서가 쌓이면 평온이 된다.
결국 감정을 이해한다는 건
세계를 다시 쓰는 일이며,
나를 다시 살아내는 일이다.
이제 나는 안다.
질투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 감정이 나를 부끄럽게 하지 않을 뿐이다.
우리는 감정을 없애는 대신,
그 감정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그게 어른이 된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흔들림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사람.
새는 오늘도 알을 깬다.
질투라는 껍질을 깨고, 새로운 시야를 얻는다.
그 알은 어제보다 조금 더 단단하지만,
그만큼 더 투명하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안다.
그 모든 깨짐은 자신를 부수는 게 아니라,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일이라는 걸.
“ 성숙한 인간이란 질투하지 않는 인간이 아니다.
질투를 없애는 대신, 그 질투와 함께 더 나은 인간으로 자라나는 사람일 뿐이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