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 이후, 비교의 윤리를 묻다
출근길 지하철 안, 누군가는 퇴사 소식을 올리고,
나는 “지금 탑승했습니다”를 외친다.
누군가는 “퇴사 100일 차, 발리에서 책 쓰는 중”이라 쓰고,
나는 “출근 1,000일 차, 커피로 생존 중”이라 쓴다.
그럴 때마다, 내 마음속에는 이상한 GPS가 켜진다.
‘저 사람의 좌표는 어디쯤일까?’
비교하지 않으려 애쓸수록, 오히려 더 정확하게 타인의 인생 궤적을 추적한다.
우리는 알고 있다.
“비교하지 말자”는 말이 세상에서 제일 비교적이라는 걸.
비교를 멈추려 애쓰는 건, 숨을 참으면서 평온을 유지하려는 일과 비슷하다.
결국 숨은 터지고, 마음은 더 가빠진다.
비교는 결함이 아니다.
그건 인간의 가장 오래된 감각이다.
수만 년 전, 인류는 초원에서 생존을 위해 ‘비교’해야 했다.
누가 더 먹을 것을 많이 모았는가,
누가 더 강한 짝을 가졌는가,
누가 더 위험을 빨리 감지하는가.
비교는 생존의 언어였다.
‘누구보다 잘나야 한다’가 아니라
‘누구처럼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본능에 가까웠다.
이 오래된 회로는 지금도 그대로 작동한다.
다만 사자는 사라지고, 대신 ‘피드 속 타인’이 등장했을 뿐이다.
뇌는 여전히 위험을 감지한다.
단지 그 위험의 이름이 “타인의 성공”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래서 비교를 없애겠다는 다짐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비교의 존재가 아니라,
비교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타인과의 비교는 늘 ‘위’와 ‘아래’를 만든다.
그건 순위의 언어다.
그러나 자신과의 비교는 ‘어제’와 ‘오늘’을 만든다.
그건 궤적의 언어다.
“나는 어디에 서 있나”에서
“나는 어디로 가고 있나”로 바뀌는 순간,
비교는 평가가 아니라 성장의 도구가 된다.
수직의 비교는 인간을 소모시키지만,
수평의 비교는 인간을 확장시킨다.
‘나의 속도’로 걷는다는 건,
비교의 방향을 바꾸는 첫 번째 실천이다.
아들러는 인간이 움직이는 이유를 ‘열등감’에서 찾았다.
그러나 그는 열등감을 결함이 아니라 출발의 감정으로 보았다.
“나는 부족하다”는 감정은, “나는 더 나아질 수 있다”의 다른 이름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 열등감을 ‘타인과의 경쟁’으로만 해석한다는 데 있다.
비교의 에너지가 ‘성장’이 아닌 ‘승부’로 바뀌는 순간,
그 감정은 자신을 향한 공격으로 변한다.
이때 열등감은 발전의 불씨가 아니라,
자존감을 갉아먹는 독이 된다.
아들러는 말했다.
“인간은 타인을 넘어서는 존재가 아니라,
어제의 자신을 초과하는 존재로 진화한다.”
이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다.
그건 비교의 재정의다.
타인의 성장 앞에서 초조해지는 건 자연스럽지만,
그 초조함은 “나도 저만큼 살아 있고 싶다”는 생의 의지의 반응일 수 있다.
필요한 것은 그 감정을 방향만 바꾸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건 비교의 방향이다.
“나는 왜 저 사람보다 못하지?”에서
“나는 왜 아직 그만큼 시도하지 않았지?”로.
그 순간, 비교는 상처가 아니라 에너지가 된다.
니체는 “인간은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경쟁적인 존재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이렇게 말했다.
“가장 고귀한 인간은 타인을 넘어서는 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자다.”
니체에게 비교란, 남과 경쟁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기극복(Selbstüberwindung)’의 과정이었다.
그는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를
타인을 지배하려는 힘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초과하려는 의지로 해석했다.
질투는 타인을 닮고 싶은 욕망이지만,
자기극복은 자신을 새롭게 만들려는 욕망이다.
전자는 모방의 에너지이고,
후자는 창조의 에너지다.
질투는 타인을 닮고 싶은 욕망이었다면,
자기극복은 나를 새롭게 만들려는 욕망이다.
니체에게 인간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넘어서며,
“어제의 나를 부정하는 용기”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너 자신을 이겨라. 그러면 세상을 이긴다.”
결국 비교는 멈추지 않는다.
다만 방향을 바꿀 뿐이다.
남보다 나아지는 경쟁에서 벗어나,
어제의 자신을 초월하려는 도전으로 옮겨갈 때,
비교는 고통이 아니라 생의 원동력이 된다.
니체는 결국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비교를 멈추지 말라.
다만 그 비교를 너 자신을 향하게 하라.”
불교는 비교를 집착(attachment)의 변형으로 본다.
“나는 덜 가졌다”는 생각이 쌓이면,
고통이 자라난다.
비교의 뿌리는 ‘결핍의 환상’이며,
그 환상이 커질수록 우리는 타인의 행복을 위협으로 느낀다.
타인의 기쁨을 ‘내 손에서 빠져나간 보상’으로 해석할 때,
고통이 생기는 것이다.
그 해독제가 바로 수희(隨喜),
즉 ‘타인의 행복을 진심으로 함께 기뻐하는 마음’이다.
수희는 단순한 미덕이 아니라,
비교의 방향을 바꾸는 심리적 수행이자,
행복을 위한 실천적 윤리이다.
“그 사람은 잘 됐고, 나는 아니다” 대신
“그의 행복이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들었다”라고 생각할 때,
비교는 사라지고, 연결이 생긴다.
이건 단순한 긍정 훈련이 아니라,
시선의 구조를 바꾸는 일이다.
수희는 단순한 미덕이 아니라,
비교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수행인 것이다.
질투가 ‘결핍의 시선’이라면,
수희는 ‘충만의 시선’이다.
이 감정이 익숙해질 때,
타인의 빛이 나의 어둠을 위협하지 않는다.
그때 우리는 타인의 행복 안에서, 자신의 평화를 배우게 된다.
비교는 악이 아니다.
그건 방향을 잃은 본능일 뿐이다.
우리는 타인을 통해 자신을 배운다.
타인의 성공은 나의 좌절이 아니라,
내 욕망이 향하는 좌표를 알려주는 신호다.
문제는 그 신호를 ‘위험’으로 오인할 때 생긴다.
비교가 경쟁이 될 때는 나를 줄이지만,
비교가 학습이 될 때는 나를 확장시킨다.
이제 비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누군가의 성취 앞에서 움츠러들지 않고,
그 안에서 “나는 어떤 방식으로 성장하고 싶은가”를 묻는 것.
이게 비교의 윤리다.
“어제의 나와 경쟁하라”는 말은
단지 자기계발의 구호가 아니다.
그건 인간의 본능을 더 정교하게 다루는
철학적 조언이다.
비교는 인간의 운명이다.
그러나 그 운명을 선택적으로 다루는 일은 인간만이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알게 됐다.
비교를 없애는 게 아니라,
비교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진짜 성숙이라는 걸.
남의 속도에 휘둘리던 시선이
조금씩 나의 궤도로 돌아올 때,
비교는 더 이상 나를 갉아먹지 않는다.
비교는 결국 존재의 거울이다.
다만 그 거울을 어디에 비추느냐가 문제다.
이제 그 거울을 나에게 돌려야 한다.
그것이 바로 ‘자기 기준으로 사는 법’의 시작이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그 이야기를 이어갈 것이다.
〈10장. 나의 기준으로 산다는 것 — 실천의 심리학〉
비교의 방향을 바꾼 뒤,
이제는 삶의 좌표를 자기 결정성 위에 세우는 방법을 탐구할 차례다.
“비교는 멈출 수 없다.
하지만 그 방향은, 오직 내가 선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