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질투는 감정이 아니라, 진화의 본능이다.”
친구의 SNS에 새 차 사진이 올라왔다.
캡션에는 “열심히 살면 다 이뤄진다”
댓글에는 박수와 하트가 줄줄이 달렸다.
나는 ‘좋아요’를 눌렀다.
그런데 손가락보다 먼저 반응한 건, 내 뇌였다.
그 순간 머릿속 어딘가가 살짝 전기처럼 찌릿했다.
‘와, 잘됐다’라는 말이 입에서 나왔지만,
뇌는 이미 다른 회로를 켜고 있었다.
그건 감정이 아니라 전기적 신호였다.
심지어 나와 그 친구의 관계가 가까울수록 반응은 더 강했다.
그건 마치,
“네가 조금 위험해지고 있어”라고 경고하는 내면의 알람 같았다.
흥미롭게도, 이 반응은 연애에서도 비슷하게 작동한다.
연인이 다른 사람의 게시물에 ‘좋아요’를 눌렀을 때,
혹은 직장 동료가 내가 노렸던 자리의 주인공이 되었을 때 —
그때 느껴지는 미묘한 ‘쿡 찔림’ 역시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뇌의 생존 회로가 켜졌다는 신호다.
질투는 결함이 아니라,
뇌가 진화 도중 남겨둔 오래된 경보음이다.
이제 그 회로 속으로 들어가 보자.
20만 년 전, 인간이 초원에서 살던 시절을 상상해보자.
그때의 경쟁은 단순했다.
“누가 더 음식을 얻는가”, “누가 더 사랑받는가”,
“누가 무리의 중심에 서는가.”
그건 단순한 사회적 비교가 아니라 생존이었다.
자원을 잃는다는 건 생명을 잃는 것이고,
짝을 잃는다는 건 유전자를 잃는 일이었다.
그래서 인간의 뇌는,
‘타인의 우위’를 감지하면 자동으로 경보를 울리는 시스템을 진화시켰다.
그 경보의 이름이 바로 질투(Jealousy)다.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David Buss)는
질투를 “적응적 감정(adaptive emotion)”이라 불렀다.
그건 타인을 미워하게 만들기 위한 감정이 아니라,
나의 지위를 지키기 위한 생존 본능이다.
즉, 질투는 나쁜 게 아니라,
살기 위해 뇌가 선택한 전략이었다.
우리의 뇌는 여전히 그 시대의 회로를 품고 있다.
단지, 지금의 ‘사냥감’이 고기에서 SNS 피드로 바뀌었을 뿐이다.
누군가의 성공 소식을 들을 때,
우리의 뇌는 실제로 작은 ‘전쟁’을 치른다.
fMRI(기능적 자기공명영상) 연구에 따르면
질투가 작동할 때, 세 가지 핵심 부위가 동시에 활성화된다.
이 부위는 ‘사회적 고통(social pain)’을 감지한다.
배제당했을 때, 비교에서 밀렸다고 느낄 때 켜진다.
즉, “마음이 아프다”는 건 말이 아니라 물리적 사실이다.
흥미로운 연구에 따르면,
진통제 타이레놀을 복용하면
사회적 배제의 고통이 약간 완화된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질투할 때마다 타이레놀을 먹을 필요는 없다.
(그건 의학이 아니라 이별 후 미련의 문제니까.)
편도체는 공포, 불안, 경계심을 담당한다.
타인의 우위를 감지하면 즉시 “위험 신호”를 울린다.
마치,
“저 사람이 나보다 더 높은 나무 위에 올라갔다”고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것과 같다.
이곳은 쾌락과 보상을 담당하지만,
질투 상황에서는 역으로 작동한다.
‘타인의 보상’이 ‘나의 불쾌’로 번역되는 것이다.
즉, 친구가 상을 받을 때
내 복측선조체는 ‘함께 축하한다’ 대신
“나의 보상이 침해당했다”고 느낀다.
이건 도덕이 아니라 신경전달물질의 반응이다.
결국 질투란,
뇌 입장에서 보면 단순한 생화학적 경보다.
뇌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너의 자원이 위협받고 있다.”
도파민은 흔히 ‘행복 호르몬’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히는 보상 예측 신호(reward prediction signal)다.
기대했던 보상이 실현될 때 쾌감을 주는 물질이다.
문제는,
타인이 그 보상을 얻는 장면을 볼 때다.
우리의 뇌는 “예상된 보상이 내 손에서 빠져나갔다”고 착각한다.
그 순간, 도파민 회로는 쾌락이 아니라 불쾌를 일으킨다.
친구가 새 차를 사고, 연인이 다른 사람과 웃고,
동료가 승진할 때,
우리는 그들의 기쁨을 ‘타인의 행복’으로 보지 못하고
‘나의 기회 손실’로 해석한다.
즉, 행복의 회로와 질투의 회로는 같은 신경망 위에 있다.
사랑이 깊을수록, 애착이 강할수록,
그 회로는 더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러니 질투를 느낀다고 해서 자신을 탓할 필요는 없다.
그건 단지, 당신의 뇌가 그 대상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다.
질투는 뇌의 오류가 아니라,
나의 욕망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다.
우리가 질투를 느낀다는 건,
‘나는 여전히 성장하고 싶다’,
‘나는 여전히 사랑받고 싶다’는
뇌의 오래된 메시지를 들었다는 뜻이다.
융은 말했다.
“억압된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의식이 외면할수록, 무의식은 더 강력해진다.”
질투를 부정하면 그 에너지는 왜곡된다.
수동적 냉소로, 혹은 자기혐오로 바뀐다.
하지만 해석하면, 그것은 통찰로 변한다.
질투가 찾아올 때, 이렇게 물어보자.
“이 감정은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지?”
대부분의 대답은 단순하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로부터 의미 있고 싶다.’
‘나는 아직 나를 증명하고 싶다.’
질투는 타인을 향한 감정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는 뇌의 몸짓이다.
질투는 나쁜 감정이 아니다.
그건 여전히 살아 있고,
여전히 욕망하는 뇌의 방식이다.
질투는 이성의 실패가 아니라,
의식이 미처 따라가지 못한 생의 충동이다.
우리가 그 신호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귀 기울일 때,
그 감정은 더 이상 수치가 아니라 이해의 언어가 된다.
감정은 사라져야 할 적이 아니라,
읽혀야 할 메시지다.
질투는 그중에서도 가장 인간적인 신호 —
내가 아직 ‘무언가를 원하고 있다’는 증거다.
“질투는 나쁜 감정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 있고, 여전히 욕망하는 뇌의 방식이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이 신호의 끝에서 마주하게 될 또 다른 질문,
즉 “질투는 나의 욕망을 어떻게 비추는가”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질투는 나의 성격이 아니라,
뇌가 진화 도중 남겨둔 오래된 경보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