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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 Oct 18. 2019

#20 아이들 모습에서 나를 보다

엉망이 된 내 모습을.

전편: #19 눈 감듯 귀도 감을 수 있을까?

https://brunch.co.kr/@simon1025/29



지금은 사라진 KBS 1박2일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선생님 특집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그중 한 선생님이 하신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다. 그 선생님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셨다. “선생이 편하면 애들이 망가져요. 선생이 편하면 안돼요.” 그 회차를 본 것은 교대생이었을 때였다. 그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백 번 옳다고 생각했었다. 나도 절대 편하지 않은 선생님이 되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이제는 동의할 수 없었다. 선생이 불편해진다고 해서 애들이 잘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선생이 불편해지면 아이들에게도 좋지 않았다.


물론 그 선생님이 하신 이야기는 선생이 꼭 불편하고 스트레스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이들을 위해서 연구하고 수업준비에도 더 철저히 해야 한다는 의미였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선생님도 엄연히 감정이 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스트레스 받고 불편해지면 생활이 불행해진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행복을 더해줄 여유는 없다. 선생님에게 찾아온 불행은 아이들의 행복마저 빨아들이는 늪이 된다. 우리 반 아이들의 모습은 이를 증명해주었다. 아이들을 바라보면 그 안에 내가 보였다.



우울이 찾아온 이후 대부분의 날에 웃으며 출근을 한 적이 없었다. 항상 어두운 표정으로 교실로 들어갔다. 아이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자리에 앉았다.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컴퓨터를 켜고 일정을 확인할 뿐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8시 40분이 되면 엄숙한 목소리로 자리에 앉아 독서를 하라며 명령했고, 책을 읽지 않거나 옆 친구와 이야기를 하는 아이들에게는 불호령을 내렸다. 햇살이 밝게 빛나는 날에도 왠지 모르게 우리 반에는 아침부터 어두운 그늘이 한가득 져있는 듯 했다.


그런 패턴이 몇 번 반복되자 아이들은 아침부터 나의 심기를 최대한 건드리지 않고자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가끔 눈치가 없는 녀석들이 있었다. 그런 아이들에게 핀잔을 주거나 저격하는 말을 쏘아붙이는 것은 앞, 옆, 뒤에 있는 아이들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행동을 지적하는 옛 소련시대를 떠올리게 했다.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당장 나의 스트레스가 줄어드니 가만히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런 아침을 보내고 나면 1교시 수업분위기는 저 아래 지하세계에 와있는 듯했다. 교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가득했다. 쪽수에 맞게 교과서를 펴지 않는다던지 한참 멍을 때리고 있다 던지 하는 아이들에게도 더 이상 지적을 하지 않았다. 지적을 해서라도 저 아이를 수업에 참여시켜야 한다는 의지와 열정은 이미 상실된 후였다. 모두를 끌고 가기보다 수업에 참여해주는 아이들만 바라보며 애써 덤덤한 척 웃음을 지어보이는 편이 훨씬 나았다. 나는 가르치는 의무를 다했으니 배움을 얻는 것은 온전히 아이들의 몫으로 떠넘겼다. 그러다보니 수학 과목에서 어려움을 호소하는 아이들이 늘었다. 수학은 계단형 학습이라 하나를 모르는 데 둘을 알 수는 없었다. 배움을 떠넘겨 받은 아이들은 온전히 그 책임을 다할만한 역량이 부족했다. 나의 도움이 필요했지만 선뜻 도움을 건넬만한 의지가 생기지 않았다.


아이들을 바라보았을 때 나의 모습이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 때는 쉬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에게 침묵하고 등 돌리기 전 나의 모습은 짜증과 분노의 화신이었다. 매일 같이 아이들에게 짜증내고 화를 내며 명령을 하였다. 나의 모습은 날 것 그대로 아이들에게 투영되었다. 아이들의 말투에는 날이 섰다. 내가 하던 모습 그대로 주변 친구들에게 명령을 하고 윽박질렀다. 서로를 비난하고 싸움을 걸었다. 아이들의 말투를 지적하기에는 면이 서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내가 스스로 저지른 과오였다.



그리고 집에 갈 때쯤이 되면 아이들은 예민함이 폭발했다. 집에 가기 위해서는 모두가 생활공책을 다 검사를 맡아야 했지만, 아이들은 생활공책을 쓰는 속도의 편차가 컸다. 행동이 빠릿빠릿하거나 부지런한 아이들은 아침부터 하여 틈틈이 생활공책을 쓰니 집에 갈 때쯤에는 알림장만 쓰면 됐다. 그러나 느긋하거나 혹은 게으른 아이들은 집에 갈 때쯤이 되어서야 뒤늦게 생활공책을 몰아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가방을 다 싸고 기다리는 아이들과 헐레벌떡 생활공책을 쓰느라 여념이 없는 아이들로 나뉘었다.


먼저 가방을 다 싸고 기다리는 아이들 입장에서는 억울했을 것이다. 자기는 집에 빨리 가기 위해서 미리미리 해놓았는데, 그렇지 못한 아이들 때문에 속절없이 기다려야 하는 입장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원칙은 모두가 생활공책 검사를 맡은 뒤에야 집에 가는 것이었다. 기다리는 아이들은 짜증을 내고 독촉을 했다. 친절할 수가 없는 말투들이었다. 어떨 때는 나에게 다가와 그냥 따로 따로 하교를 하면 안 되냐고 하소연을 하기 까지 했다. 뒤늦은 아이들은 뒤늦은 대로 짜증을 내었다. 미안해하는 구석은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왜 이렇게 독촉 하냐며 되려 발끈하며 화를 내었다. 이미 우리 반에서 공동체의식은 저 멀리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그저 한두 명의 아이들만 양쪽의 아이들을 달래고 상황을 정리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집에 가기 전 한바탕 소동은 일상이 되었다.



우리 반은 나를 복제한 23명이 서로를 향해 날 선 말들과 비난을 주고받는 전쟁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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