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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 Oct 20. 2019

#21 이 길은 내 길이 아닌 것 같아

교사 때려치기 대작전

전편: #20 아이들 모습에서 나를 보다

https://brunch.co.kr/@simon1025/30



이대로는 안됐다. 교사생활을 계속 한다는 것은 아이들에게도 나에게도 좋지 않았다.



사실 더 방점이 찍힌 것은 나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교직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는 것이었다. 교사에게 가장 필요한 역량은 인내심평정심이었다. 나에게는 부족한 역량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인내심이 충분하지 않은 급한 성격을 가졌으며, 때때로 욱하는 성질을 가진 다혈질 성격의 소유자였다. 내 성격을 가지고 교직에 있다는 것은 스트레스에 그대로 노출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단지 그동안 열정과 우월감으로 잠시 상쇄되어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나는 예전부터 걱정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는 말을 들은 적이 많았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 대해 모르고 하는 소리들이었다. 사람인데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왜 걱정이 없겠는가? 걱정거리는 많았다. 인간관계며, 돈이며, 진로며, 사랑이며 등등 걱정이 인생 곁에 없는 날은 대부분 없었다. 문제는 걱정거리가 생기면 머릿속이 온통 걱정거리가 가득해진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스트레스를 의미했다. 나는 스트레스 받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고, 두려워했다. 때문에 머릿속에 걱정거리가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다. 그래서 내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첫째, 최대한 걱정거리가 생기지 않도록 예상해서 행동한다든지 둘째, 걱정거리가 생기면 최대한 빨리 해결하려고 한다든지 셋째, 어쩔 수 없다면 회피해버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남모를 노력으로 나는 겉보기에는 걱정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결국 나는 스트레스에 굉장히 취약한 사람인 셈이었다. 문제는 이렇게 스트레스에 취약한 나에게 하루의 1/3이 넘는 시간을 보내야하는 직장이 스트레스의 원천지라는 점이었다.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입을 준비하던 시절 교대는 내가 희망하던 대학교가 아니었다. 애당초 교대는 후보의 순위에 있지도 않았다. 단지 수능을 전례 없이 망쳐버렸고, 재수를 하지 않기 위해 선택한 길이었다. 뜻하지 않았던 교대였지만 막상 그 안에 있다 보니 ‘초등학교 교사도 괜찮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하여 발령을 받고 아이들 앞에 설 때까지, 아니 얼마 전까지 초등학교 교사라는 진로를 꽤나 잘 선택했다고 생각했다. 교대에 갈 것을 권유해준 아빠에게도 감사함을 느꼈었다. 아빠 역시 아들의 진로를 알맞게 설계해준 것에 대하여 자긍심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이제는 진로 선택이 옳았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때였다. 진로를 너무 손쉽게 결정해버린 것은 아닌지, 재수라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떠밀리듯 선택한 것이 아닌지 강한 의구심과 회의감이 들었다. 고민을 하며 그간의 인생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돌아보았다.


20살에 대학에 입학하고, 24살에 임용고시에 합격하여 그해 3월1일 지체 없이 발령을 받고, 2년간의 국방의 의무를 다한 뒤, 27살 첫 담임을 맡은 해에 교육청에서 주는 상을 받았다. 화려할 것까지야 없지만 단 한 번도 브레이크가 걸린 적이 없는 인생 커리큘럼이었다. 내 인생의 방향은 언제나 직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잠시 브레이크를 걸어볼 때였다. 브레이크를 걸고 내가 가는 이 길이 맞는 방향인지 고민해보아야 했다. 직진하던 인생에 브레이크를 걸고 방향을 다시 설정해야 한다는 것은 큰 부담과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두려움으로 인해 평생을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살면서 최초로 인생에 브레이크를 걸고 방향을 두리번거리기 위해 무거운 고민을 안고 광주로 내려갔다.



광주로 내려가는 길을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난 부모님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부모님 또래의 자식들 가운데 난 취직도 빨랐고, 지금껏 별다른 걱정을 끼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고민을 부모님께 털어놓는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아들이라는 나름의 명예에 흠집을 내는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해 들어갔더니 나를 마중해주는 것은 엄마였다. 아빠는 아직 퇴근을 하기 전이었다. 엄마는 나에게 광주로 내려오는 길이 피로하지는 않았는지, 세종에서의 홀로서기가 힘들 지는 않는지 걱정스레 물어봐주었다. 평소라면 괜찮다며 별일 아닌 듯 넘겼을 엄마의 물음이 그날따라 정곡을 찌르는 듯 했다. 우물쭈물 거리다 한마디를 내뱉었다.



엄마, 나 조금 힘들어

엄마에게 이 말을 시작으로 마음속에 품었던 고민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엄마는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엄마는 나보다 앞서 30년을 가까이 학교에서 근무하신 선생님이었다. 특히나 초등학교 병설 유치원에서 근무하셨기에 내가 처해있는 상황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계셨고, 깊이 있게 공감해줄 수 있었다.


퇴근 후 돌아온 아빠에게도 이어서 같은 고민을 꺼내놓았다. 아빠의 반응은 엄마와는 사뭇 달랐다. 아빠는 고등학교에서만 쭉 근무를 해온 선생님이었다. 내가 초등학생의 어떤 특성으로 힘들어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시는 것 같았다. 단지 나 정도면 행복하게 직장생활을 하는 것이라며 꾸중 아닌 꾸중을 하셨다. 그러한 아빠의 반응은 당황스러웠다. 당연히 엄마와 같이 고민해주고 공감해줄지 알았다. 서운한 마음이 드는 한편 내가 스스로 너무 나약해진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였다.


결국 무거운 부담을 안고 어렵게 부모님께 내어놓은 고민이었지만 완벽한 해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단지 엄마에게는 마음의 공감을, 아빠에게는 성찰의 계기를 받을 뿐이었다. 결국 결정은 내가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변함없는 사실 하나는 여전히 교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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