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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 Oct 16. 2019

#18 왕관의 무게에 무너지다

무너진 담임

전편: #17 큰 둑도 작은 개미구멍으로 무너진다

https://brunch.co.kr/@simon1025/27




'인간이란 박해를 예상했던 사람으로부터 은혜를 받게 되면 시혜자에게 더욱 애정을 느끼기 마련이다.'

-마키아벨리, <군주론>-



학급을 경영한다는 의미에서 선생님은 어쩌면 군주와 그 역할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통해 인간적이지는 않지만 성공할 수 있는 군주의 모습을 제시해주었다. 나는 다소 따뜻하거나 자애롭지는 못해도 성공하는 군주,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실제로 마키아벨리가 그려낸 성공하는 군주의 모습은 학교에서도 적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학생일 때 선생님들에게 느꼈던 바를 떠올려보았을 때도 그러한 짐작은 옳았다. 평소에 착한 선생님이 어쩌다 화를 내면 ‘저 선생님이 오늘따라 왜 저러지’하며 강한 반감을 가졌다. 그러나 평소에 엄격한 선생님이었다면 엉덩이에 피가 맺힐 정도로 맞는 정도가 아닌 이상 크게 여의치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 크게 지적할 것에 대해 선생님이 대충 건조한 말 몇 마디로 지적하고 넘어갔을 때 되려 감사함과 은혜로움을 느꼈다.


아이들이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힘들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았을 때 자신이 옳게 성장하는데 필요한 자양분을 듬뿍 마련해주셨던 선생님으로 기억할 것이라 생각했다. 똑같이 엄격하게 대했던 작년 제자들이 스승의 날에 나를 보러 왔다는 것이 그 확신을 충분히 증명해주는 듯 했다.


그러나 내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나는 군주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만 집중하고 있었다. 군주의 처지가 어떨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왕관의 무게는 무거웠다. 아이들이 힘들거나 벅차지 않을까 생각했지, 나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무게를 버티고 왕관을 쓰고 있는 군주만 바라보고 있었을 뿐 왕관의 무게에 무너진 자들은 보지 못했다. 나는 무너졌다. 게다가 선생님은 선생님일 뿐 군주가 아니었다.



누적된 스트레스에 크게 무너진 이후 나는 감정에 휘둘리기 시작했다. 감정은 오르락내리락 큰 진폭을 그리며 요동쳤다. 수업에서도 생활지도에서도 지시나 지적은 짜증과 함께 나갔다. 전에는 감정은 최대한 배제한 채 아이의 행동에 대해서만 지적했다.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그러냐’, ‘너는 왜 계속 말썽이냐’, ‘몇 번 이야기를 해야 알아 듣는거냐’ 말에는 날이 섰고, 아이를 정조준하고 있었다. 차라리 눈을 감는 편이 나았다. 눈을 뜨고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지적할 것 투성이였다. 지적을 하면 분명 짜증 섞인 목소리가 나갈 판이었다.


오늘은 짜증내지 말아야지 하는 아침의 다짐은 1교시가 시작되기 전에 물거품 되는 경우가 많았다. 수업시간은 특히나 짜증의 밭이었다. 의도한 대로 수업이 흘러가지 않거나 활동지가 완성되지 않는 것은 정말 참기 힘들었다. 수업을 방해하는 녀석에겐 전보다 가혹하게 처벌을 내렸다.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 것도 괘씸했다. 이렇게나 공들여 준비했는데 하품이나 하고 있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이제는 아이의 배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노력에 대한 기대치를 충족시키기 위해 아이들을 몰아붙였다.


아이들은 내 안에 일어난 변화를 알아채지 못한 듯하였다. 조금이라도 지적을 받은 날에는 자숙하며 눈에 띄지 않길 바랐다. 그러나 아이들은 돌아서면 희희낙락이었다. 방금 지적을 받았는지도 까먹은 듯 보였다. 어쩌면 순진한 아이들의 모습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어리지만 애써 괜찮은 척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멘탈이 무너진 나에겐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나의 권위에 대한 도전처럼 느껴졌다. 나를 우습게 여기는 듯 했다. 더 큰 화가 일었고, 아이에게는 따끔을 넘어선 가르침이 이어졌다.


아이들과의 관계도 악화되기 시작했다. 전에는 엄격했다지만 농담을 좋아하고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는 나였기에 아이들은 나에게 상황에 따라 말장난도 치고 아양을 부리기도 하였다. 하필이면 그러한 것에 적극적이었던 장난꾸러기들이 주로 수업시간에 딴 짓을 하거나 숙제를 해오지 않는 말썽꾼들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예뻐 보이지 않았다. 그 녀석들도 벼락같은 호통을 하루 이틀 꼴로 받다보니 풀이 죽어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아이들이 없으니 나와 아이들 사이에는 당연히 냉기가 흐를 뿐이었다.


스트레스는 나의 일상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원래부터 느긋하게 운전을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거칠게 운전을 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운전이 거칠어졌다. 끼어들기에는 요란한 경적소리와 쌍라이트로 일격을 가했다. 나의 진로를 방해하는 차에 대해서는 앞지르기로 응수했다. 내가 운전하는 차는 가시가 잔뜩 돋친 고슴도치 같았다.


매일 같이 신경이 잔뜩 서있으니 피로가 몸에 쌓였다. 잠을 자도자도 피로가 풀리지 않았다. 피로가 쌓이니 자연히 신경이 예민해질 터였다. 반복되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버렸다. 이렇게 생활하는 것은 아이들에게나 나에게나 힘들었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었다. 나는 분노로 가득 채워진 채 매일 희생자들을 남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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