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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 Oct 15. 2019

#17 큰 둑도 작은 개미구멍으로 무너진다

우월감이 불러일으킨 우울의 나락

전편: #16 그래, 잘하고 있는거야

https://brunch.co.kr/@simon1025/26



어느 순간 그런 때가 있다. 어떤 어려움이 눈앞에 있던 상관치 않고 불도저마냥 밀고 나가다가 순식간에 엔진 꺼지듯 열정이 사그라져버리는 그런 때. 그런 때가 불현 듯 나에게 찾아왔다. 


어쩌면 불현 듯 찾아온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 학급운영과 수업에는 언제나 성공만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실패가 많았다. 실패는 스트레스였다. 스트레스는 자신이 쌓이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충분히 쌓인 후에야 비로써 자신의 존재를 묵직하게 드러내었다.


스트레스를 자주 그리고 많이 받는 때는 주로 수업시간이었다. 학기 초부터 줄기차게 강조했던 한 가지는 ‘경청’이었다. 다른 친구가 발표를 할 때나 내가 설명을 하고 있을 때 그놈의 조잘거리는 입을 잠시라도 닫고, 귀를 열기를 누차 말했다. 물론 침묵을 강요한 것은 아니었다. 수업은 주로 토의토론으로 설계하였으니 이야기할 시간은 따로 있었다. 들어야할 때는 들어야 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도저히 경청을 실행하지 않았다. 하지 않는 것인지 못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반복되는 잔소리는 나에게 가장 큰 데미지를 입혔다. 


느긋한 성격이 아닌데다 곰같이 무던한 성격도 되지 못하여 신경질이 늘었다. 그렇게 몇 번 주의를 주고 나면 수업시간이 부족하였다. 열심히 준비한 자료들이니 쉽게 버릴 수도 없었다. 쉬는 시간을 없애가며 수업을 이어갔다. 당연히 아이들은 쉬는 시간을 빼앗겼으니 엉덩이가 들썩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는 나는 또 한 번 스트레스를 받을 뿐이었다. 



아이들은 두 분류로 나뉘었다. 말하지 않아도 잘 하는 아이들과 죽어라 말해도 죽어라 하지 않는 아이들로. 그리고 분류는 거의 고정적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잘 하는 아이들은 나에게 빛과 소금이었다. 그 아이들이 없었다면 열정이 사그라지는 때는 훨씬 전에 찾아왔을 것이었다. 죽어라 하지 않는 아이들은 배움에 대한 동기가 없어보였다. 단지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만을 기다리며 옆 친구와 이야기를 하거나 낙서를 하거나 허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모든 아이들을 끌고 가고 싶었다. 채근하고 채찍질해가며 몰아붙였다. 부족한 과목이 있다면 남겨서라도 보충 학습을 시켰다. 수업 시간에는 눈으로 레이저를 쏴가며 집중을 강요했다. 그렇지만 바뀌는 것은 없었다. 여전히 그 아이들은 나의 손길을 타야만 연필을 들었다.



생활지도에 있어서도 스트레스의 요인은 많았다. 작년에는 아이들 사이의 갈등이 그리 잦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번에는 좀 더 어린 5학년이라 그런지 아니면 다소 공격적인 아이들이 많아서 그런지 아이들끼리의 갈등이 잦았다. 


아이들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는 데에는 나름의 노하우가 있었다. 갈등 당사자들에게 육하원칙에 따른 진술서를 작성하게 하고, 목격자의 진술을 더해 당시 상황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재구성한 뒤 화해를 유도하는 방식이었다. 갈등해결의 과정이 기록물로 남고, 최대한 공정하게 중재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소비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아이들 사이의 갈등의 빈도가 늘어나니 작년에는 크게 문제되지 않던 단점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아이들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는 것은 지치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급한 공문을 처리해야할 때와 같이 바쁜 때에 발생한 갈등은 나에게 큰 부담이자 스트레스였다. 


스트레스는 스트레스를 불렀다. 모든 것이 짜증나기 시작했다. 숙제를 해오지 않는 것도, 생활공책을 성실하게 하지 않는 것도, 청소를 하지 않는 것도, 1인 1역을 수행하지 않는 것도, 한 번 설명한 것을 두 번 세 번 설명하게 하는 것도, 수업 시간을 제때 지키지 못하는 것도. 교실 모든 곳이 스트레스 천지였다. 


그러다 결국 쌓이고 쌓인 스트레스가 터지는 날이 왔다. 


6교시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이었다. 긍정심리학에서 강조하고 있는 대표성격강점을 측정해보는 성격강점검사를 시행했다. 성격강점검사지 역시 내가 직접 타이핑하여 제작한 것이었다. 검사에 걸리는 시간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그러다가 내가 꼼꼼하게 보지 않고 제작하였는지 검사지에 오류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하교할 시간이 코앞에 다가온 뒤였다. 그러나 성격검사는 마저 끝내야 했다. 급히 검사를 중단하고 아이들에게 오류를 수정할 방법을 알려주었다. 아이들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듯 했다. 하교 지도를 해야 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알맞게 검사를 시행한 사람은 검사지를 선생님에게 제출하고 집으로 가도록 공지하였다. 


그때부터 시장판 아수라장이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서둘러 집으로 가고 싶어 오류도 수정하지 않은 채 검사지를 제출하기 시작했다. 물론 통과시킬 수 없었다. 그 와중에 가정통신문을 제출하는 아이, 교외체험학습 양식을 달라고 하는 아이가 섞여 스트레스는 치솟고 있었다. 검사지를 옳게 고치는 방법이 뭐냐고 옆 친구에게 소리치는 아이들부터 이거 맞지 않냐고 우기는 아이들까지 가세하니 스트레스는 더 이상 통제될 수 있는 정도가 안 되었다.


펑. 스트레스가 터졌다. 


폭발하는 화산의 형태는 아니었다. 진득하고 뜨거운 용암이 천천히 흘러내리듯 스트레스가 온몸에 타고 내렸다. 열정은 원래부터 없었던 마냥 자취를 감췄다. 학기 초만 해도 스트레스는 필요악이라고 생각했다. 남다르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때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던 균열은 결국 큰 둑을 무너트렸다. 나는 남다를 게 없었고, 과한 열정과 우월감은 나를 우울의 나락으로 빠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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