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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 Oct 14. 2019

#16 그래, 잘하고 있는거야

불안에는 이유가 있겠지

전편: #15 열정은 식지 않는다

https://brunch.co.kr/@simon1025/23




그렇다면 아이들은 좋은 방향으로 변화되고 있었을까?


질문에 답을 줄 수 있을 듯한 일이 하나 있었다. 5월 초에는 학부모 공개수업이 있었다. 영어 전담선생님과 보건 선생님에게 우리 반 아이들을 데리고 공개수업을 하겠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전담선생님들에게 잡혀있던 공개수업 시간은 우리 반 수업시간이 아니었다. 나에게는 “굳이 시간을 바꿔서라도 바르고 열정적인 문가람 선생님 반 아이들을 데리고 공개수업을 하고 싶어요.”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뿌듯했다. 고생한 보람을 느꼈다.


물론 전담선생님들이 실제로 저렇게 생각했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그저 전담선생님들과 궁합이 잘 맞는 아이들이였을 뿐일지 모른다. 나에게는 명백한 사실보다는 두루뭉술한 믿음이 필요했다. 내가 잘해왔다는 자기합리화의 믿음이 필요했다. 믿음이 필요한 바탕에는 내심 마음 속 의구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렇게 한들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실제로 좋아지기는 할까? 괜히 서로가 힘든 것만은 아닐까?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없으니 의구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아무 효과가 없다면 굳이 이렇게까지 용을 써가며 할 이유가 없었다. 의심의 싹은 뿌리를 내리기 전에 하루 빨리 뽑아버려야 했다.


학기 초에 세운 올해의 다짐이 있었다. 인성보고서 1등급과 같은 물리적인 실체가 있는 목표가 아닌 내면의 목표였다. 화를 내지 않는 것. 아이들에게도 공언했던 다짐이었다. 그러나 약속은 오래 지키지 못하였다. 아무래도 교실에서 숙제가 많고, 지켜야 할 것이 많으니 지적이 잦아졌다. 월요일같이 괜히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이거나 지적해야 하는 아이들이 많은 날에는 당연히 평온한 감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럴 때는 감정을 실어 지적을 했다. 즉 화를 내고, 혼을 내었다. 따뜻하면서 엄격한 선생님이 되고자 했지만 도드라지는 것은 엄격함이었다.


아이들이 나를 어려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들이 나에 대해 거부감을 지니게 되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담임 선생님께 살갑게 다가가는 다른 반 아이들을 보면 부러움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아이들과의 서먹함이 지속되는 나날 가운데 스승의 날이 다가왔다.

기대는 하지 않았다.

사실 기대하고 있었다.

큰 선물을 바라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것은 김영란 법에 저촉되는 범법행위임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손 편지 몇 장이라도 받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래도 아이들이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었다.


스승의 날 아침. 평소와 같이 어김없이 같은 방향 같은 복도로 반을 향해 걸어갔다. 길목에는 각자의 담임 선생님을 위해 서프라이즈를 준비하는 아이들의 부산스러움이 가득했다. 주로 칠판에 ‘담임 선생님 사랑해요’, ‘존경합니다’와 같은 문구를 가득 채워 넣은 뒤 담임 선생님의 출근을 어설픈 거짓말로 지연시키고 있는 모습들이었다.


나는 센스 있는 선생님이다. 일부러 반으로 직행하지 않고 다른 층에 있는 학년연구실에 먼저 들렸다. 괜히 학년연구실을 뒤적뒤적 치우며 시간을 끌었다. 8시 40분이 조금 지나 약간의 설레임을 안고 우리 반 문을 열었다. 오늘따라 웬일인지 아이들은 조용히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아하 이 녀석들이 연기하고 있구나! 아이들의 서프라이즈에 호락호락 넘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분명 ‘선생님 사랑해요’, ‘존경합니다’를 써놓았을 칠판은 이중으로 되어있는 앞쪽 칠판에 의해 가려져있을 것이 뻔했다. 열지 않았다. 뭔가 타이밍이 애매했다. 9시 수업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수업이 시작되면 칠판에 판서를 하는 척 아이들의 서프라이즈가 담긴 칠판을 열 생각이었다. 9시가 되고 이제는 서프라이즈를 오픈할 타이밍이 되었다. 칠판을 열었다. 어라? 아무것도 없었다. 당혹감을 서둘러 감췄다. 역시나 내가 주지 못한 사랑이니 받지도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에게는 더욱 차가워졌다. 점심시간이 되도록 아이들은 스승의 날에 대한 언급조차 없었다. 실망을 넘어 배신감까지 느껴지려 하였다.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심 뚱한 채로 점심을 먹고 학년 연구실에서 핸드폰을 만지막 거리며 5교시를 기다렸다.


5교시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교실로 향했다. 학급 부회장이 나의 앞을 막았다. 잠깐 교실에 오지 말라고 하였다. 자연스레 웃음이 지어졌다. 아침에 보았던 어설픈 거짓말이 내 눈앞에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었다. 얼마의 시간 뒤 교실에 입장하였고, 아이들은 ‘선생님 사랑해요’, ‘존경해요’로 가득 채운 칠판을 선보이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간의 걱정이 한 방에 날아갔다. 아이들은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하교시킨 뒤에는 작년 제자들에게 연락이 왔다. 스승의 날을 맞이해 교실로 찾아온다는 것이었다. 20명이 넘는 제자들이 반으로 찾아왔다. 제자들이 나를 잊지 않고 찾아온다는 것. 그것 역시 나에게 안심을 주는 상황이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스승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나는 잘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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