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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 Sep 20. 2019

#5 후달리니까 더 열심히 할래

열등감이라고 들어봤나?

전편: #4 3G: 정신없지, 돈없지, 외롭지

https://brunch.co.kr/@simon1025/6





겨울방학을 앞두고 발령동기들을 만났다. 오랜만에 접하는 알던 사람들과의 만남이었다. 내가 그녀들에게 어떤 존재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들은 나에게 꽤나 큰 존재들이었다. 짧은 6개월간의 만남이었지만 첫 인연이었고, 첫 공동체이었기에 낯선 도시 세종에서 그녀들이 갖는 의미는 고향과 같았다. 그녀들을 만난다는 것은 고향의 정을 느끼는 것과 비슷했다.


오랜만에 보는 그녀들이었지만 역시나 익숙한 느낌이었다. 내가 그녀들에게 느끼는 편안함도 있었거니와 그녀들에게 지난 2년 동안의 큰 변화가 없었던 탓이었다. 그녀들은 전과 같이 여전히 활기가 넘쳤고, 흥이 가득했다. 나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던 긴 2년이 그녀들에게는 그리 변화를 불러일으킬만한 긴 시간은 아니었음이 느껴졌다. 그러나 딱 30분까지였다. 대략적인 안부를 묻는 시간이 끝나고 본격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되자 조금은 다른 느낌이 달랐다. 익숙함보단 낯섦이 느껴졌다.


사실 그녀들은 많이 변해있었다. 좀 더 구체적인 표현을 쓰자면 그녀들은 2년 동안 많이 성장해있었다. 분명 2년 전에 그녀들과 나누었던 대화는 어설픔과 서투름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여전히 어설픔과 서투름에 관한 불평을 토로하는 것은 오로지 나뿐이었다. 그녀들은 이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하는 이야기는 이제 그녀들의 과거 경험 속에 존재하는 것들이었다. 내가 선배 선생님에게 느꼈던 경외감 비슷한 감정이 이제는 나와 시작이 같았던 발령동기들에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녀들의 실루엣에서 베테랑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들과의 만남에서 처음으로 다른 감정이 마음속에 피었다. 조급함이었다. 그녀들이 차이를 부각시켰거나 나를 깔본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아직도 신규교사의 노란 딱지를 붙이고 있는 것은 나뿐이라는 것을.




그 만남 이후 고민에 빠졌다. 그녀들을 따라 잡을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삽시간에 따라잡아서 뽐내고 싶거나 으쓱대고 싶은 그런 상대적 성취가 아니었다. 절대적인 성장이었다. 내가 가진 어설픔과 서투름을 덜어내고 싶었다. 나도 그녀들과 같이 온전함을 갖추고 싶었다. 그렇기 위해서는 농축된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었다. 그녀들이 2년 동안 차곡차곡 보낸 시간을 나는 구기고 접어서 단숨에 보낼 방법이 절실했다.


감사하게도 학교에 조언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되는 선생님이 계셨다. 큰 체구에 근육질을 자랑하는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교과서 집필에 매년 장학 자료를 꽤나 발간하시는, 소위 잘나가는 분이었다. 더불어 내가 복직을 하고 교무실에 있을 때는 매일 데리고 다니면서 커피와 함께 도움 되는 말을 해주셨던 따뜻한 분이었다. 바쁘신 분이었지만 도움을 청했다.  


선생님을 만나 솔직한 내 심경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물었다. 선생님은 한 구석에 있던 클리어파일 하나를 가지고 오셨다. 내지가 100매 정도 되는 대용량 클리어파일이었다. 클리어파일 겉표지에는 연도가 써져 있었고, 클리어파일 속 내지에는 가정통신문, 계획서, 활동지, 학습 과정안 등이 가득했다. 자료발간이건, 보고서 작성이건 매년 목표를 정한 뒤에 항상 그에 따른 결과물들을 보관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적잖은 충격이었다. 그렇게까지 꼼꼼하고 꾸준했을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그 분의 탁월함에만 경외했을 뿐 어떤 노력을 해왔었는지 처음 본 것이었다.


선생님은 매년 목표를 설정할 것을 주문했다. 일 년에 하나씩이라도 목표를 달성하다보면 그것이 성장의 밑거름이 되어줄 것이라 하셨다. 선생님의 조언에는 본인의 삶이 녹아있었다. 믿음이 싹 틀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안개에 가려졌던 길이 맑게 보이는 듯 했다.  


‘그래, 일 년의 목표를 세우자. 나도 저렇게 탁월해질 수 있어’



그럼 올해의 목표는 무엇으로 할 것인가. 명료한 실체가 있는 무엇이었으면 했다. 오랜 시간 고민하고 주변의 이야기를 들었다. 얼마쯤 시간이 흐른 뒤에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할 수 있었다. 연구보고서를 써보기로 했다. 1년 동안 인성교육을 실천하고 40쪽 내외의 보고서로 정리하는 것이었다. 1년 동안 아이들과 지냈던 시간들을 공식적인 결과물로 남긴다는 것이 좋아보였다. 더군다나 주변의 이야기를 들으니 인성교육이란 것의 범위가 넓어 첫 도전을 하기에 적절하다고 하였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연구보고서 대회가 있어 출품을 하면 등급에 따라 상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상까지 받을 수 있는 목표라니 더욱 마음이 갔다.


그때는 몰랐다. 연구보고서를 작성하기로 한 결정이 1년 뒤의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하긴 인생에서 그런 경험들을 자주 겪곤 한다. 정말 사소한 경우로, 라면을 끓이다보면 면을 그대로 넣어야 할지 두 동강을 내서 넣어야 할지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때 그 찰나의 고민이 면발의 운명을 결정한다. 그대로 넣었을 땐 길이가 긴 면발이, 두 동강을 내었을 땐 길이가 짧은 면발이 되는 운명을 맞이한다.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라도 지나버리면 면발은 익어서 흩어져버리기에 길이를 바꾸기가 쉽지 않다. 인생에서도 가끔 그와 같이 불가역적인 선택을 해야 될 때가 있다. 무심코 했던 선택으로 인생의 방향이 큰 폭으로 틀어져버리기도 한다. 다만 라면과 인생의 차이라면, 인생의 경우 그 선택의 결과가 미칠 영향을 대부분 모른다는 점이다.

어쨌든 연구보고서를 쓰려면 사전 준비가 필요했다. 작년, 재작년에 좋은 등급을 받은 연구보고서를 서너 개를 뽑았다. 그리고 쭉 읽었다. 그리고 쭉 뻗었다. 도저히 내가 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난 보고서라길래 대학교 때 했던 레포트 정도인 줄 알았는데, 사실상 논문에 가까웠다. 무슨 그래프에, 표에, 쏼라쏼라 이론이 가득했다. 보통 경력 10년 이상의 중견선생님들도 쓰기에 버거워 한다더니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내심 마음속으로 상에 대한 욕심이 생기던 터였다. 상을 받기는커녕 어떻게 써야 할지부터가 막막해지니 오히려 새로운 각오가 자리 잡았다.


‘포기만 하지 말자’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는 법이었다. 나의 첫 목표는 1등을 목표로 하는 100m 달리기가 아닌 완주를 목표로 하는 마라톤이 되었다. 내 안에 새기기에 적절한 작고도 큰 목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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