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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 Sep 19. 2019

#4 3G: 정신없지, 돈없지,  외롭지

이제 세상은 5G 라던데

전편: #3 다시 돌아온 정글의 세계

https://brunch.co.kr/@simon1025/5





내가 처음 맡았던 3학년 아이들은 마음이 여린 남자아이 1명과 그 남자아이를 귀여워하는 10명의 여자아이들이 모여 있는 11명의 작은 반이었다. 1번부터 11번까지 번호가 ‘가나다’순으로 되어있지 않은 순수한 전학생들의 모임이었다. 담임조차 전학을 온 셈이니 더욱 완벽했다.


처음 아이들을 만나던 날, 그 날은 2017년의 첫 눈이 내렸다. 슬로우가 걸린 듯 천천히 내리고, 소복이 쌓이는 예쁜 눈이었다. 아이들은 그런 첫 눈을 보려 창문에 옹기종기 붙었다. 아기천사들 같았다. 눈 내리는 배경 속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 모습은 여전히 선명하다.  


11명과 함께했던 짧은 순간들은 행복했다. 수업은 영화에서 나올 것 마냥 이상적이었으며, 조용히 하라는 잔소리조차 할 이유가 없었다. 금요일이면 책상을 길게 붙여 아이들과 티타임을 가졌다. 장기자랑도 하고 진솔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급식실로 이동할 때면 11명의 숫자는 더욱 빛났다. 23명 정원이 꽉 찬 다른 반은 뱀이었다. 긴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시끄러운 소음을 내는 방울뱀. 우리 반은 달랐다. 오리가족. 어미 오리와 그 뒤를 졸래졸래 따라다니는 귀여운 새끼오리들의 모습이었다. 그 어떤 교육정책보다 학급 당 학생 수를 줄이는 것이 가장 우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심어준 때였다.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차츰 전학생이 늘었다. 오늘은 13명 다음날은 14명이 되었고, 주말이 지나고 나면 16명으로 바뀌어있었다. 우리 반에 전학생이 오는 일은 특별한 일로 여겨지지 않았다. 전학생을 교실 앞에서 소개시키는 일은 하루 일과가 되었다.


수가 늘어나자 교실은 북적였다. 갈등도 잦아지고 수업은 어수선해졌다. 그만큼 잔소리도 늘었다. 겨울방학을 앞두고 결국 우리 반도 정원을 가득 채웠다.


학기 말이 되자 나는 커다란 문제에 직면했다. 생활기록부를 마무리해야 했다. 그러나 생활기록부를 작성할 때 사용해야 하는 전자시스템인 나이스를 다룰 줄 몰랐다. 나이스를 사용한 때는 군대 가기 전 조퇴나 병가와 같이 나의 복무사항을 관리할 때가 전부였다. 담임이 되니 건드려야 할 항목들이 많았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23명 전원이 전학생이라는 점이었다. 혁신학교, 연구학교에서 전학 온 아이들부터 해외유학을 다녀온 아이들까지 다양했다. 다른 반과 비교해보면 우리 반 나이스는 유독 달랐다. 지저분했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아무리 나이스 업무요령 책을 살펴보아도 도저히 해답이 나오지 않는 케이스가 많았다. 교무실을 들락거리며 여러 선생님들에게 문의를 했다. 답변은 다양했고, 혼란은 가중되었다. 다행스럽게도 5학년에 나와 같은 상황의 반을 맡고 계신 선생님이 계셨다. 방과 후면 찾아가 선생님 책상 옆에 의자를 놓고 앉아 가르침을 받았다. 그렇게 몇 번을 쓰고 지우고를 반복한 끝에 생활기록부 기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물론 오류는 많았다. 나이스 업무 담당선생님에게 미안함을 전한다.


군 복무를 할 때에 내가 상상했던 컴백은 좀 더 멋진 것이었다. 학교 업무야 금방 적응하고, 차세대 선생님으로 뭔가 멋드러진 수업을 하고, 젊은 감각으로 학급운영을 하는 그런 그림. 퇴근 후에는 주변 사람들과 맥주 한 잔 걸치며 그날의 소회를 나누는 평범하지만 여유로운 일상. 그러나 상상은 머릿속에 있을 때 빛나는 법이었고, 정작 상상이 펼쳐져야 할 시간에 마주한 건 실수투성이 업무처리에 어설픈 학급운영, 잔소리 가득한 수업이었다. 그리고 퇴근 후에 주어지는 일상도 여유보다는 전전긍긍에 가까웠다.


일단 돈이 부족했다. 그 첫 번째 원인은 2년간의 휴직으로 인해 생긴 빚 때문이었다. 공무원 연금을 받기위해서 달마다 내야했던 기여금이 있었다. 그 기여금이 2년 동안 쌓여 빚이 된 것이었다. 그렇게 쌓인 기여금은 월급을 갉아먹었다. 거기다 더해 12월쯤에는 행정실로부터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군대 가기 전 명절상여금과 10일 치의 월급이 잘못 지급되었다고 했다. 다음 달 월급이 적을 거라는 말을 들었다. 허리띠를 졸라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음 달 월급은 예상보다 적었다.


4만원.

40만원일까 다시 한 번 살펴보아도 명세서에는 정확히 4만원이 적혀있었다. 졸라맬 허리띠 하나 사기에도 부족한 돈이었다. 한동안 부모님께 자주 연락을 드렸다. 부모님은 눈치껏 용돈을 보내주셨다. 홀로서기는 잠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궁핍했던 재정 상태는 스스로를 채찍질하게 했다. 한동안 값싸고 양 많은 노브랜드 제품을 애용했다. 그 제품들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않되 피부가 뒤집어졌다. 고등학교 이후 자취를 감추었던 여드름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스킨과 로션으로 덧칠하며 막아보려 하였지만 헛수고였다. 회춘한 듯 얼굴에 여드름 잔치가 열렸다. 잠시 세종으로 올라온 부모님은 내 얼굴을 보고 속상함을 감추지 못하셨다. 결국 훨씬 많은 돈을 피부과에 쏟아 부었다. 지금은 월급이 적어도 비싸고 양이 조금은 적은 천연제품을 사용한다.



돈이 없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도 야기했는데, 바로 인간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돈이 없으니 모임에 나가는 것이 부담되었다. 그렇잖아도 세종시는 아는 사람 몇 없는 타지였다. 개인사정을 핑계로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니 점점 집에만 있는 시간이 늘었다. 군대에서 생활할 때는 8명씩 생활관을 같이 쓴 것이 외로움을 증폭시켰을까. 퇴근 후 별일 없이 우두커니 방안에 앉아있으면 진한 외로움이 물씬 밀려왔다. 게다가 겨울이었다. 추위는 사람을 더욱 움츠리게 한다. 나의 작은 굴에 찾아오는 이 하나 없이 고독을 삼키는 것은 낯선 일이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외로움이라는 감정과 대면했다.


거기까지였으면 그나마 나았으렸만 시련은 항상 떼로 몰려다녔다. 내가 살았던 원룸은 유독 생소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어느 날은 주말에 외출을 하고 집에 돌아오니 집이 물바다가 되어 있었다. 밖은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화창한 날씨였다. 대충 눈으로만 보아도 10cm이상으로 물이 차 있는 상태였다. 가구를 포함해 전자기기까지 물 안에 있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원룸 하수구가 막혀 물이 역류한 것이 원인이었다. 차있었던 물이 하수구 물이었으니 가구나 옷가지를 버려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원룸 빌딩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살았다. 그들은 밤이 되면 고향을 그리는 노래를 많이, 크게, 늦게까지, 여럿이서 불렀다. 그들이 고향을 그리워 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잠을 자야 하는 나에게는 고문에 가까웠다. 주의를 요청하려 찾아가볼까도 생각했지만 괜히 무서워 생각을 접었다.


전역을 한지 얼마 안 된 터라 군대에 있는 후임들과 가끔 연락을 했다. 후임들이 항상 첫 번째로 물어보는 것은 사회는 어떠냐는 것이었다. 쉽지 않다고, 어떤 때는 차라리 군대 있을 때가 나았다고 하면 후임들은 늘상 목소리를 높였다. 벌써 군대가 어땠는지 까먹었냐고. 군대 생활을 까먹은 것은 아니었다. 분명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정말 쉽지 않았다. 군대가 나았음을 느꼈던 것은 진심이었다.


‘새 출발’이라고 했을 때 흔히 떠오르는 이미지는 다음과 같다. 봄꽃이 어지러이 휘날리거나, 장엄한 새해의 붉은 태양이 떠오르거나, 번뜩이는 사업 아이디어와 함께 택시를 타고 바삐 움직이는 그런 장면들. 그러나 내가 맞닥뜨린 새 출발은 그런 장면들과는 거리가 조금 멀었다. 꽁꽁 언 공기와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시리도록 차가운 겨울만이 나의 새 출발을 채워주고 있을 뿐이었다. 봄은 아직 저만치에 있었고, 새 출발을 꾸미기엔 내가 가진 것이 너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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