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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 Sep 18. 2019

#3 다시 돌아온 정글의 세계

차라리 군대가 나았어

전편: #2 애들아 선생님 유학간다.


https://brunch.co.kr/@simon1025/4



필승! 병장 문가람 전역을 명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필승!”     


2017년 9월 20일.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군 생활은 한 벌의 전역복과 빛바랜 군번줄만 남긴 채 끝이 났다. 군대 생활은 꽤나 성공적이었다. 특기는 운전병이었다. 군대에 들어가기 전 운전경력은 없었다. 단지 운전병 특기를 받기 위해 급히 딴 1종 보통 면허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운전에 재능이 있었다. 병장 때는 버스를 몰며 전국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기회가 생겨 운전면허시험에 응시했고, 전역을 하고 나올 때는 1종 대형, 특수-렉카, 특수-트레일러 3개의 면허를 운전면허증에 박을 수 있었다.      


내가 근무했던 수송대대에서는 운전을 잘하면 대우가 좋아졌다. 화려하고 편안했던 군 생활이었다. 그러나 군 생활은 2년이면 족했다. 전역증을 안고 위문소를 나가는 기쁨은 2년 동안 죽어라 상상했던 것보다 더 짜릿하고 흥분됐다. 전역복을 입고 어딘가를 돌아다니고 싶었다. 오늘에서야 드디어 국방의 의무를 다 한 완전체 남자라는 것을 사람들 앞에서 뽐내고 싶었다. 그러나 첫 발령과 같이 시간은 너그럽지 않았다. 다음 날 2년의 휴직을 끝으로 곧바로 복직을 했어야 했다. 잊혀 지지 않을 환희의 시간은 바삐 움직여야 하는 현실 앞에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별 다른 축하파티도 하지 못한 채 부리나케 짐을 싸 세종시로 올라왔다. 분명 오전까지는 오늘 전역한 군인이었는데, 오후가 되니 첫 출근을 앞둔 직장인이 되었다. 2년 6개월 전 첫 발령을 받은 것과 같이 부모님은 대충 짐을 넣어주시고, 격려의 말씀을 해주신 후 광주로 내려가셨다. 이번에도 방은 작았다. 출근일에 입을 양복을 다리고, 빨리 잠자리에 들었다.     


복직한 학교는 첫 발령 받은 학교가 아니었다. 첫 학교에는 빈자리가 남아있지 않았다. 자리가 비어있는 다른 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속된말로 튕겼다고 한다. 새로이 발령받은 학교는 개교 2년차에 35학급 정도 되는 학교였다.      


다행스럽게 곧 바로 담임을 맡지는 않았다. 10월 즈음에 옆 아파트에 대규모 입주가 예정되어 있었고, 증반이 예상되었다. 이를 대비한 인원으로 발령을 받은 것이었다. 어떤 학년에 배정받을지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1학년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아직 증반까지 여유가 있는 다른 학년과 달리 1학년은 증반까지 5~6명밖에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썩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엊그제까지 오와열을 지켜야만 했던 군인이었다. 목초지를 뛰어다니는 망아지 같은 1학년은 나에게 버겁게 느껴졌다.     

어쨌든 한동안 나는 교무실에 상주하며 준비시간을 가졌다. 감사하게도 관리자분들은 나에게 적응할 시간을 주셨다. 약 2주간의 적응기간이 끝났고 드디어 수업에 투입되었다.      


1학년 전담. 그 중에서도 수학 시계단원을 맡았다. 덕분에 약 180명 정도 되는 1학년 아이들에게 시계 선생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지금 3학년이 된 아이들은 학교에서 나를 보면 어디선가 봤다는 듯 기억을 헤매며 시계.....라고 중얼거리곤 한다.      


수업에 들어가기 전 나에게 가장 큰 화두는 ‘통제’였다.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고민은 깊었고, 해답은 금방 나왔다. 2가지. 단 2가지의 시스템이면 충분했다. 1학년 아이들은 훈련소에 들어온 훈련병마냥 통제되었다. 다른 1학년 선생님들이 비법을 궁금해 하기도 하였다.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며칠 전까지 군인이었기에 생각할 수 방법이었던 것 같다. 이제는 다시 쓰지 않는 방법이다.   

첫 번째는 ‘복명복창’이었다. 사실 이 방법은 통제보다는 아이들 이름을 외우는 데 방점을 둔 시스템이었다. 다만 효과가 그리 강력할 줄은 몰랐다. 발표하기 전 아이들은 자기의 이름을 큰 소리로 외친 후 정답을 이야기 했어야만 했다. 단순한 시스템이었지만 아이들은 긴장했다. 또한 수업분위기는 정돈되었다. 이야기를 하려면 자신의 이름을 큰 소리로 외쳐야만 했기에 차라리 입을 닫는 편이 편하게 느껴졌을 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두 번째는 ‘침묵의 시간’이었다. 1학년 아이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가만 보니 아이들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엉덩이는 뇌의 통제를 받지 않는 듯 천장을 향했고, 두 발과 두 손은 도마뱀의 꼬리마냥 제각각 움직였다. 아이들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을 가장 힘들어 하는 듯 보였다. ‘침묵의 시간은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시스템이었다. 방법은 역시 단순했다. 지적받는 학생이 3명이 되면 모두가 1분간 눈을 감고 침묵을 유지해야만 했다. 이어서 3명이 또 지적을 받으면? 침묵의 시간은 2분으로 늘어난다. 이렇게 지적받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침묵의 시간은 차곡차곡 누적된다.      


이와 같은 2가지 방법은 1학년 8개 반에 적용되었고, 시계 수업은 공포의 시간이 되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시계 단원을 몇 몇 담임선생님들이 다시 가르쳐주었다고 했다. 아이들이 나에게 배운 시간 보는 법을 모른다고 했다고 한다. 분명 대답은 잘 했었는데? 시계 선생님이 너무 무서워서 얼떨결에 대답했다고 들었다. 반성했다.

아이들에게 미안함을 전한다.      

나의 사과를 받아줘


1학년 아이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나는 1학년 수업을 뒤로한 채 보결을 많이 들어가야만 했다. 보결 1순위였기 때문이었다. 많은 선생님들이 병가를 쓰셨다. 사유는 다양했다. 2달 동안 보결로 들어간 시간은 총 140시간을 넘겼다. 덕분에 난 짧은 기간 동안 6개 반, 6개 학년의 담임역할을 맡았어야만 했다. 매번 나를 소개하고 아이스 브레이킹과 더불어 규칙을 정하는 시간을 가졌다. 교육경력 10년을 함축하여 경험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정착지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다 11월이 되어서야 담임 배정을 받았다. 1학년도, 6학년도 아닌 3학년 담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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