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살에 초등학교 선생님이라니.
“선생님 발령 나셨어요. 출근 준비하세요."
금요일 오후 4시쯤 세종시 교육청에서 전화를 받았다. 등수가 애매해서 당연히 중간발령일 줄 알았다. 국토대장정, 4대강 자전거 종주길을 찾아보는 와중 느닷없이 찾아온 출근 통보였다. 급히 엄마를 불렀다.
“엄마! 나 출근하래”
나의 고향은 광주광역시. 세종시와는 2시간 거리에 있다. 월요일 출근을 위해서는 서둘러 집부터 구해야 했다. 토요일 아침밥을 대충 먹고 부리나케 세종시로 올라왔다. 작은 오피스텔 하나를 겨우 구했다. 발령받은 학교와는 버스로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작은 방이었다. 세종시를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해가 지기 전 광주로 다시 내려갔다. 짐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할 옷가지 몇 개와 생필품을 챙기고 잠자리에 들었다.
일요일 역시 아침밥을 대충 먹고 세종시로 다시 올라왔다. 방에 변변치 않은 짐을 넣고, 부모님과 세종시를 구경했다. 레고로 만든 세상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로는 질서정연했으며, 건물들은 하나같이 네모반듯했다. 이제 내가 정착해야 할 곳이라 생각하니 느낌이 더욱 달랐다. 저녁밥을 먹고 부모님은 광주로 내려 가셨다. 출근일에 입을 양복을 다리고, 잠시 밖으로 나갔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투며, 가로등의 형태며, 도로 한 가운데로 운행하는 버스까지. 공기의 밀도조차 달리 느껴졌다. 이제야 타지에서의 첫 출근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다가왔다. 시간은 일렀지만 빨리 잠자리에 들었다.
월요일 아침. 처음으로 학교에 등교가 아닌 출근을 했다. 빳빳이 각을 세운 검은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었다. 내가 발령받은 학교는 개교 2년차에 35학급 정도 되는 파릇파릇한 새 학교였다. 학교는 다양한 아이들과 학부모들로 북적였다.
"선생님, 1학년 아름반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되죠?"
내가 알 턱이 있나. 나도 처음 와본 학교인데.
그렇지만 처음 짊어 본 선생님의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그냥 모른다고 하면은 안 될 것 같았다.
"1학년 아름반이면… 저쪽인가…"
미간을 찌푸리고 허공에 손가락을 휘저었다. 누가 봐도 모르는 눈치였다. 다행히 학부모님은 눈치가 빨랐던지,
아님 답답했던지 빨리 제 갈 길을 찾아 나섰다. 나로선 다행이다 생각했다. 역시 프로가 되는 길은 쉽지 않음을 느꼈다.
새 학기 첫 날인데다가 전입생이 많은 터라 학교는 바빴고 소란스러웠다. 교장, 교감선생님께 미쳐 인사도 드리지 못한 채 바쁜 학교일에 휩쓸렸다. 내가 처음 부여받은 일은 전학생 전입원서를 받고 정리하는 것이었다. 세종시는 새로 유입되는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그 날 하루에만 약 100건이 넘는 전입원서를 받았다.
시끌벅적했던 첫 날이 지나고 나서야 학교 선생님들과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눴다. 학생일 때 뵈었던 선생님들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그때는 좀 더 가볍고, 편한 존재로 느껴졌었는데 이제는 무겁고 대단한 선배님으로 비춰졌다. 더군다나 학교에는 임용고시 1차와 2차 때의 감독관이었던 선생님들이 있었다. 같은 선생님이지만 절대 같은 선생님으로 느낄 수가 없었다.
세종시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도시라 다른 지역보다 신규교사가 많았다. 내가 발령받은 학교 역시 나와 같이 첫 발령을 받은 동기들이 많았다. 3월1일 나와 같이 발령받은 동기는 총 11명이었다. 그들도 나처럼 준비 없이 학교에 왔을 거라 생각하니 괜히 든든했다.
3,2,1 발사 카운트는 없었다. 준비한 것이라곤 빳빳이 다린 양복뿐이었다. 혼란스러웠고, 조금은 두려웠다. 낯선 도시 세종에서 나의 교직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원래 내가 처음 맡아야 할 아이들은 6학년이었다. 그것도 담임으로. 다만 나는 학교에서 6개월 정도만 근무하고 얼른 입대를 할 마음을 품고 있었다. 임용고시를 준비하느라 아직 군복무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였다. 24살의 나이. 군대를 가기에는 다소 늦은 감이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입대해야 그나마 덜 어린 선임들에게 존대를 할 수 있었다. 이를 교감선생님께 말씀드렸고, 나의 보직은 6학년 담임에서 4학년 과학 전담으로 바뀌었다. 보직이 뒤바뀌었던 선생님은 나와 같은 발령 동기 신규교사였다. 미안스럽게도 그 해 그 선생님이 맡았던 반에서는 2건의 학교폭력위원회가 열렸다. 지금도 가끔 만나면 미안함을 전한다.
전담의 경우에는 개학 하고 일주일 동안은 수업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들었다. 뜻밖의 희소식이었다. 급박한 발령으로 수업준비를 하나 하지 못한 채였다. 서둘러 수업준비를 시작했다. 인디스쿨에서 수많은 자료를 들쳐보고, 주변 선생님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준비하고 또 준비했다. 대부분 담임의 역할을 맡은 발령 동기들은 이미 첫 수업의 충격과 달콤과 환희를 맞이한 뒤였다. 무용담인지 수업후기인지 경계가 불분명한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두려움과 설렘이 동시에 찾아왔다. 그런데 왠지 난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냥 그런 느낌이었다.
일주일이 지나고 드디어 나에게도 첫 수업의 차례가 다가왔다. 수업에 들어가기 전 스스로에게 물었다.
‘떨릴까?’
떨리지 않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나는 교대를 4년이나 다녔고, 수업실습은 총 4번. 이 중에 수업실연은 3,4학년 때 여러 차례 해보았기 때문이었다.
떨었다. 당황스러웠다. 왜 이렇게 떨리지?
눈앞에 앉아있는 아이들은 4학년 20명 정도.
왠지 나의 첫 경험을 들키는 듯 했다.
입은 자연스러워 보이고자 활짝 입 꼬리가 올라가 있었고, 손은 여유로워 보이고자 제스처를 양껏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의지와는 반대로 입술은 바싹바싹 말라가고 있었고, 눈빛은 흔들렸으며,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들은 제멋대로였다. 재미있을 거라 생각하던 퀴즈는 아이들에게 전혀 흥밋거리가 되지 못했으며, 한 40분 정도 예상했던 활동은 5분 만에 끝이 나버렸다. 완전 망했다. 이후에는 그냥 질문과 답변 시간을 가졌다. 아이들은 수업에 관련된 질문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들이 궁금해 한 것은 나의 나이와, 여자 친구의 유무와, 차종 그리고 나의 아파트 평수 정도였다. 어떤 답변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첫 수업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첫 수업 이후에도 한 동안 그러한 코미디를 반복했다. 지금까지 학생이었던 터라 수업이 별거 아닌 줄 알았다. 그러나 듣는 수업과 하는 수업은 많이 달랐다. 하는 수업은 영 만만치 않았다. 새삼 선생님들이 얼마나 프로였는지를 느꼈다. 다행스럽게도 주변 선배선생님들이 많이 도와주셨다. 수업 자료도 건네주시고, 쏠쏠한 팁도 전수해주셨다. 교대를 다니면서는 전혀 배우지 못한 것들이었다. 역시 현장만한 공부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좀 더 정확히는 내 스스로가 문제였다. 선생님의 역할이 어색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생을 학생의 위치에서 살아왔었다. 혼나는 것에 익숙하고 지시받는 것에 익숙했다. 갑자기 지시하고 지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니 쉽지 않았다. 특히 화를 어떻게 내야하는지가 가장 고민이었다.
“문제를 풀어볼까요” 하고 순회 지도를 다니면 꼭 딴 짓을 하고 있는 아이들이 있었다. 짜증은 나지만 버럭 화가 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조용조용 말해서는 나의 권위가 서지 않을 것 같았다. 화가 나지 않았지만 화내는 연기를 했다. 목소리는 어색하게 톤을 올렸다. 그러다보니 말을 더듬었다. 그런 스스로의 모습이 창피해서 더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곤 “내가 우습게 보이냐” 혹은 “선생님 이야기를 무시하는 거냐”와 같이 날 것의 말을 뱉었다. 그러다가 결국 사달이 났다. 별 것 아닌 걸로 친구들 앞에서 혼이 난 것이 그 녀석의 자존심에 생채기를 내었던 걸까. 그 녀석은 과학실 책상서랍 안쪽에 내 욕을 잔뜩 써 놓았다. 많이도 써 놓았다. 보기에 민망스러울 정도로 상스러운 욕들이었다. 내가 발견하지는 못했다. 다른 반 아이들이 발견하고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에게 알려주었다. 태연한 척 했지만 많이도 속상했다.
적응해야 할 것은 수업뿐이 아니었다. 학생 때는 왜 그렇게 선생님들이 바빠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선생님이 되고 보니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왜 그렇게 바쁠 수밖에 없는지.
수업이 끝나고 업무를 해야 했다. 업무의 범위는 다양했다. 체육교구가 무엇이 있으며, 몇 개가 있는지, 있어야 하는데 없는 것은 무엇인지, 몇 개가 필요한지 일일이 손으로 세서 엑셀 파일의 양식에 집어넣는 것부터 학교 스포츠클럽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 1년 운영계획서를 작성하는 것까지 모든 것을 맡아서 했어야 했다. 간혹 학교에 외부인이 들어오는 날엔 의자와 책상을 꺼내 배치하는 일까지 업무였다. 그나마 몸을 쓰고, 개수를 일일이 세는 일은 나았다. 공문을 작성하는 일은 어디서도 배운 적이 없었다. 공문에 띄어쓰기를 몇 번 해야 되며, 번호를 어떻게 붙여야 하고, 점은 어디다 찍어야 하는지 까지 정해져 있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행정용어들은 낯설었다. 기안, 상신, 반려, 품의, 추경, 과목경정, 원인행위 등 난생 처음 들어보는 단어들이 난무했다. 뜻을 모르니 업무지시를 받아도 뭔 소리인가 싶어 일단은 고개를 끄덕이고 인터넷에 모르는 용어들을 검색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하필 수업시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전담이다 보니 업무가 많았다. 약 6개월 동안 30건이 넘는 기안을 했으니 신규로서는 꽤나 중책을 맡았던 것이었다. 매일 수업이 끝나면 선배선생님을 찾아가 공문 작성요령을 배웠다. 문을 똑똑똑 두드리고 얼굴을 들이미는 순간은 민망했지만 그래도 배워야했기에 “저 또 왔어요.”우물쭈물 한마디와 함께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짓고 옆 자리로 쪼르륵 가서 앉았다. 그래도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선배선생님이 언제나 따뜻하게 가르쳐 주신 덕분이었다.
또 하나. 공문 작성을 열심히 배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우리 학교의 교장선생님은 꼼꼼하시기로 유명하신 분이었다. 결재가 올라오는 모든 공문을 자세히 훑으셨다.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공문의 형식에 맞지 않으면 다시 돌려보냈다. 사실 대부분 다시 돌려보냈다. 이를 행정용어로 반려라고 부르는데, 20년을 근무한 선생님에게도 반려는 생소한 일이었다고 나중에 들었다. 나에게 반려는 일상이었다. 한 번에 결재가 나면 이상하게 여겨야 했다.
‘17번’
당시 체육부장 선생님이 계획하고 내가 곁가지를 도왔던 체육운영계획서가 공식적으로 반려당한 횟수였다. 구두반려까지 포함하면 그 횟수는 30번을 넘겼다. 지금도 우스갯소리로 그때의 이야기를 꺼내면 대부분은 믿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냐며. 그런데 진짜 그랬다.
임용고시를 준비할 때에는 합격만 하면 이 세상 모든 걱정과 시름이 없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최소한 합격이라는 두 글자를 모니터에서 확인했을 때부터 출근을 앞둔 3일전까지 그 생각은 적중했다. 선생님이 되고 보니 배워야 할 것도 너무 많았고, 해야 할 것도 넘쳐났다. 모든 서투름과 어설픔에는 걱정과 시름이 뒤따랐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러워질 것이라는 말에는 분명 미화된 기억이 작용했다. 그러니깐 아직 처음을 겪고 있는 나에게는 정신없는 흔들림과 실수가 가득했다. 나는 선생님이라기보다 사회초년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