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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온도, 우리가 말하지 않는 것들

별것 아닌 날의 기록

by 리베르테

이틀 동안 약을 꾸준히 챙겨 먹은 덕분인지 몸이 한결 개운했다. 평소처럼 일어나 맨몸 운동을 하고, 산책하며 오전을 보냈다. 비가 안개비처럼 흩날리더니 이내 눈으로 변했다. 날씨는 변덕스러웠고, 오락가락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서 씨름했다. 아이가 내준 숙제를 풀어야 했는데, 적힌 대로 따라 해도 쉽지 않았다. 아이는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는 습관을 들이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 익숙하듯, 나 역시 주어진 대로 따르는 것이 더 편했다. 그러나 조금만 벗어나도 길을 잃듯 헤맸다. 그런데도 평소 해보고 싶었던 일이었기에 어떻게든 해나가는 내 모습이 기특하게 느껴졌다.

눈이 잦아들고 하늘은 온통 회색빛이었다. 이런 날은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날씨다. 오늘은 특별할 것 없이 흘러가는 보통의 날이었다. 매일 특별한 일이 생기거나 기쁜 순간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문득 오늘 받은 편지의 ‘그 별것 아닌 일이, 지나고 보면 가장 중요했다’는 문장이 떠올랐다.

지나고 보면 별것 아닌 일은 없었다. 지금 내가 이곳에서 아이와 단둘이 보내는 이 시간도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붙잡아 둘 수 없는 순간이다. 긴 인생 속에서 보면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이 순간이 나를 존재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별것 아닌 일상일지라도 하나하나 기록하고 싶어졌다.

오늘 해야 할 일은 가족과 함께 하루를 보내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며, 시간이 지나 후회할 것 같은 일을 지금 바로 해보는 것이었다.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고마움을 전했고, 다시 여행을 할 기회가 온다면 여전히 함께 하고 싶다고 했다. 아이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저도 엄마랑 또 여행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문득 오늘 편지글에서 읽은 오렌지 이야기가 떠올라 미소가 지어졌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 이상하게도 알탕을 먹고 싶었다. 입덧하면서도 비릿한 국물이 당기다니,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남편에게 알탕을 먹고 싶다고 말했을 때, 나는 TV에서 봤던 것처럼 남편이 곧장 사다 줄 거라고 기대했다. 아니면, 그래 가자! 하며 선뜻 나설 줄 알았다. 세상의 모든 남편이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남편의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먹고 싶으면 사 먹으면 되잖아.“


그 말이 너무나 서운하고, 외로웠다. 내가 속이 좁아서가 아니라, 입덧하는 아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말했을 때 남편이 어떻게든 구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남편은 "알탕 한 그릇 먹으려고 나가야 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내가 원한 것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남편의 작은 배려와 관심이었다.


흔히 "밥 먹었니?"라는 말이 단순히 끼니 여부만을 묻는 것이 아니라 "너 괜찮니? 잘 지내고 있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듯이, 내가 남편에게 알탕을 먹고 싶다고 한 말도 단순히 음식만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요리하지 않고, 밖에서 편안하게 먹고 싶다는 작은 바람이 담긴 말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면 될 일이었다. 굳이 말에 담긴 의미까지 고민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말하지 않으면 그 속에 담긴 진정한 본질을 상대가 알 수 없으니까.


남자와 여자가 사용하는 언어와 그 안에 담긴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백과사전에서도 찾을 수 없는, 각자의 언어가 있는 것 같았다.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들이 많아졌고, 말의 온도를 가늠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지만, 여전히 표현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슬픔, 기쁨, 그리고 불안과 고통을 표현하지 않으면, 결국 혼자 이해받지 못하는 슬픔 속에서 머물게 된다.


오늘 저녁, 아이와 남성과 여성의 언어 사용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도 깊이 공감하며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차이를 자주 경험한다고 했다. 나와 아이가 사용하는 언어 역시 그 안에 들어있는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실감한다고 했다. 생각해 보면 서로 다름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언어에 담긴 마음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애정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삶을 위로받고,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는 점이다.


저녁, 아이는 산책을 다녀오겠다며 아이스크림을 사러 나갔다. 그사이 나는 오늘 보낸 특별할 것 없는 하루를 정리하고 있다. 세상 어디에나 차이는 존재하지만, 그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 오늘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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