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에 맡긴 시간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쌓여있던 눈이 비에 녹아 눈높이가 낮아졌다. 연이은 영상의 날씨 덕분에 마치 봄이 찾아온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길을 걷는 사람들이 늘었고, 옷차림도 한결 가벼워졌다. 하지만 내일부터 다시 눈이 올 예정이라 하니, 이 짧은 겨울 속 봄 같은 날씨를 충분히 만끽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곳에 온 후 처음 구입한 쌀이 거의 떨어졌다. 외식 한 번 하지 않고 집에서만 식사하다 보니 쌀이 금방 줄어들었다. 다음 주쯤 쌀과 반찬거리를 사러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반가운 문자가 왔다. 날씨도 좋으니 옥빌에 있는 한국 마트, 갤러리아에 가자는 내용이었다. 일을 마친 뒤 피곤할 텐데도 일부러 시간을 내어 주시는 게 감사하면서도 죄송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죄송함에도 불구하고 거절하지 못했다. 쌀을 구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근처 코스트코는 걸어가서 필요한 물품을 사곤 하지만, B&T나 갤러리아 같은 곳은 차가 없으면 가기 어렵다. 그래서 쌀이 다 떨어지면 누군가에게 부탁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마침 연락이 온 것이었다. 내 곁에는 나를 지켜주는 수호천사가 있는 것만 같다.
오늘 장보기의 주요 물품은 쌀이었다. 갤러리아에서 세일하는 쌀을 발견했는데, 이천쌀이었다. 이곳에 와서 처음 구입한 쌀은 장미가 그려진 봉투에 ‘ROSE’라고 적혀 있었고, 작게 ‘장미쌀’이라는 한글이 새겨져 있었다. 생산지는 미국이었지만, 쌀이 찰지고 맛있었다. 그런데 오늘 산 이천쌀은 이천이라는 지명 때문에 반가웠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천쌀이라고 해서 한국에서 재배한 것이 아니라, 모두 미국에서 생산된 쌀이라고 했다. 장미쌀이든 이천쌀이든 같은 생산지에서 나왔고, 단지 포장지만 다를 뿐이었다. 그래도 이천쌀 맛이 어떨지 궁금해졌다.
옥빌 갤러리아까지의 거리는 가깝지 않았다. 하지만, 마트에 도착하자 마치 한국 식료품점에 온 듯한 느낌이 들어 즐거웠다. 익숙한 제품들, 신라면과 새우깡, 그리고 김밥과 잡채 등 반찬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웠지만, 완제품 가격이 생각보다 비싸 구입하지 않았다. 대신 세일하는 제품 위주로 필요한 것들을 골랐다. 겉절이가 먹고 싶어 배추를 사려고 보니 한 포기에 5천 원이 넘었다. 여기서도 배추는 비싸구나 싶었다.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고 다시 코스트코로 향했다. 그런데 계산대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정전으로 인해 계산이 불가능하니 기다려 달라는 안내가 나오고 있었다. ‘우리가 장을 다 보고 나면 원상 복귀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여유 있게 쇼핑을 했다.
장보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늦은 오후 시간이 되었다. 저녁을 준비하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고모님께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어 서둘러 식사를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두부조림과 시금치 된장국, 무생채를 만들어 맛있게 저녁을 준비하려는 순간, 이상하게도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알고 보니 집도 정전이었다. 처음엔 정전인지 몰라 지하로 내려가 차단기를 살펴보고 몇 번이나 껐다 켰다를 반복했다. 그러다 코스트코에서의 정전이 떠올랐다. 해밀턴 근처 전체가 정전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아마도 많은 눈이 내린 뒤 내린 비로 인해 누전이 발생한 듯했다. 정전이 되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결국, 강제적으로 ‘디지털 디톡스’를 하게 되었다.
‘그래, 전기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보자.’
하지만 저녁 준비를 할 수 없었기에 고모님은 그냥 돌아가셔야 했다.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간식이라도 사서 먹고 들어오는 건데 말이다.
어둑어둑해졌지만, 여전히 불은 들어오지 않았다. 라이터와 초를 준비해 놓고 기다렸다. 내가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은 흘러가는 대로 두어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다림뿐이었다.
정전도 그렇고, 인생도 그렇다. 때로는 시간만 믿고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기다림을 무력하다고 여기며, ‘운명에 맞서 싸우고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흐름에 맡겨야 할 때도 있다. 병원 검사 결과를 기다리거나 아이를 키우며 변화를 지켜볼 때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림뿐일 때가 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찌할 수 없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땐 흐름에 맡기는 것도 괜찮다는 걸 알게 되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지만, 어둠을 조용히 응시하며 기다려보기로 했다. 마치 정전으로 인해 어둠 속에 갇힌 오늘처럼, 인생에서도 일시적으로 멈춰 서야 하는 시간이 있다. 때론 그 시간을 응시하며 묵묵히 기다리는 것도 필요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