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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말을 걸었다, "봄이야"

바람도 달큰하다

by 리베르테

어젯밤 늦게까지 작업하던 아이는 아직 깊이 잠들어 있었다. 깨우지 않고 조용히 집을 나섰다. 문을 열자, 공기가 살짝 서늘했지만, 차가운 겨울과는 확연히 달랐다. 산책을 나서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아직 겨울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공기 속에 스며든 계절의 변화가 온몸으로 전해졌다. 앙상한 가지들 그 끝에는 아주 작은 변화가 감지되었다. 움츠렸던 계절이 지나가고 있음을 알리며 봄은 그렇게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


공원을 천천히 걸었다. 바닥 군데군데 남아 있는 얼음 조각들도 이젠 얼마 남지 않았다.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도 눈에 띄고, 강아지와 함께 눈 위에서 달리며 즐거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모습이 경쾌했다. 겨우내 잠잠했던 소리가 하나둘 깨어나는 듯했다. 머릿속을 맴돌던 복잡한 생각들이 한순간 고요해졌다. 그저 지금, 이 순간 공기와 햇살 속에 나를 맡기고 싶었다.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니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일어나 달리러 나갔나 보다. 그냥 오늘 하루는 쉴 법도 한데 스스로 정해놓은 규칙은 어지간해서는 흩트리지 않는 아이 모습에서 내가 배우는 점이 많다. 한참 후, 땀으로 흠뻑 젖은 채 돌아온 아이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날씨가 정말 좋아요. 오후에 산책하러 나가요, 엄마! “


그 말을 하는 아이 표정이 기대감으로 환하고 밝았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좋지." 그렇게 약속했다. 아이는 만족한 듯 웃으며 샤워하러 갔다. 한때는 손을 꼭 잡고 걸었던 작은 아이가 이제는 커서 나란히 걸으며 사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이 때로는 아쉽고, 때로는 고맙다.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각자의 일을 마친 후, 우리는 팀홀튼으로 향했다. 스타벅스도 있었지만, 팀홀튼이 커피 가격도 더 낮고 함께 먹을 도넛 종류도 많아 좋았다. 카페에 들어서자 삼삼오오 모인 어르신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부부 동반으로 커피를 마시거나, 친구와 도넛을 나누는 모습이 정겨웠다. 여기저기서 웃음소리도 들리고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에서 삶의 여유가 묻어났다. 우리나라에서도 평일 낮에 카페를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라고 아이에게 말해 주었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부부보다는 친구끼리 카페를 찾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는 점이 조금 다르다고 덧붙였다.


돌아오는 길에 자꾸 나뭇가지에 눈길이 갔다. 연둣빛 새싹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입춘이 지나고 눈이 녹아서 비가 된다는 우수도 어느새 지났다. 경칩이 코앞이었다. 문득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절기인 '우수'가 지난 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겨울이 물러나고 봄기운이 완연해지는 시기. 매년 우수 즈음이 되면 마음속으로 의식을 치르듯 계절을 맞이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그냥 지나쳐 버렸다. 놓쳐버린 순간이 떠올라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봄은 기다림의 계절이었다. 땅이 녹고, 마당 한쪽에 심어놓은 수선화가 노란 꽃망울을 터뜨리면, 봄이 왔음을 온몸으로 실감하곤 했다. 아직 찬 기운이 남아 있는 바람 속에서도 흙냄새가 났고, 딱딱하게 굳어 있는 흙을 뚫고 나온 새싹들이 장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겨울이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에 그저 기뻤다.


문득 우리 집 앞마당이 궁금했다. 겨울을 지나 봄이 오면 가장 먼저 얼굴을 내미는 싹이 있을 텐데, 지금쯤 어떤 싹이 제일 먼저 고개를 내밀었을까? 꼬물꼬물 올라왔을 봄의 생명을 상상하니 괜히 마음이 설렜다.


커피 한 모금에 입안 가득 봄의 따스함이 번졌다. 창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환한 거리에는 조금씩 활기가 돌고 있었다. 겨울 동안 잊고 있던 색들이 하나둘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사소한 것에도 감탄하고, 작은 변화에도 설렘을 느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올봄에는 조금 더 천천히, 그리고 더 깊이 계절을 느껴보기로 마음먹었다.


올해의 봄은 어떤 시간을 선물할까? 더 많은 대화, 더 많은 산책,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 오래 남을 따뜻한 기억들일지도 모른다. 설렘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한층 부드럽고 달큰하게 느껴졌다. 봄이 정말로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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