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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길을 걷는다는 것

꽃길만 바라던 나에게, 흙길이 가르쳐준 것

by 리베르테

아침부터 하늘이 흐렸다. 그러더니 이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창밖을 보니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다. 우산을 들고나가기 귀찮아 두꺼운 빵 모자를 눌러쓰고 밖으로 나섰다. 비를 맞으며 걷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빗소리를 들으며 걷는 이 시간, 사색할 수 있는 이 시간이 참 좋다.


걷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리운 사람이 없다. 연락하고 싶은 사람도, 기다려지는 사람도 없었다. 예전에는 보고 싶은 얼굴이 떠오르면 자연스럽게 연락했고, 답장을 기다리는 설렘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조차 없다. 마음 한편에 구멍이 뚫린 듯, 바람이 숭숭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렇게 구멍이 난 채로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때로는 공허함도 그냥 흘러가도록 놔두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지난번 던다스 밸리를 함께 가기로 했던 분이었다.


"날씨랑 일정이 맞지 않아서 미뤘던 게 자꾸 마음에 걸리네요. 이번 주 금요일, 날씨 맑아지면 꼭 가요. 땅이 녹으면 질퍽거려서 더 걷기 힘들어질 거예요."

나는 일부러 시간 내서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괜찮다고 했지만, 그분은 "이번엔 꼭 가자"라고 했다. 그 전화 한 통이 괜히 따뜻하게 느껴졌다. 이곳에서 나는 많은 마음을 받고 있다.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 같은 나에게도 따뜻한 인사를 건네고, 작은 친절을 나누는 사람들. 언젠가 나도 이렇게 받은 마음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건넬 수 있기를, 그렇게 마음이 흐를 수 있기를 바랐다.

오늘 해야 했던 숙제, 비포장도로, 산길을 걸으며 흙의 감촉, 돌멩이의 거침, 풀잎의 부드러움을 발끝으로 느껴보는 것은 금요일로 미뤘다. 던다스 밸리에서라면 제대로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언제부턴가 우리가 걷는 길은 온통 시멘트로 덮여 있다. 흙길을 걷기 위해서는 일부러 어딘가를 찾아가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한때는 꽃길만 걷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꽃길을 걷기를 바랐다. 흙길은 힘들고, 꽃길은 행복한 것이라 믿었으니까. 하지만 인생을 길게 놓고 보면, 꽃으로만 덮인 길이 과연 좋은 길일까?


우리는 작은 불편에도 쉽게 힘들어하고, 남들은 다 편안하게 사는 것 같아 부러워하곤 한다. 하지만 모양만 다를 뿐, 누구나 각자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리고 흙길을 걸으며 얻게 되는 지혜는 꽃으로만 가득한 길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도.


꽃길도 나름의 노력이 없었을 리 없다. 하지만 꽃길이 아닌 흙길을 걸을 때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작은 돌멩이 하나에도 걸려 넘어질 수 있고, 진흙탕에 발이 빠질 수도 있지만, 그런 길을 걷다 보면, 함께 손잡고 걸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게 서로 기대고, 손을 내밀며 함께 걷는 법을 배웠다.


결국, 꽃길만이 아니라 질퍽한 흙길을 함께 걸어준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이 세상이 살 만하다고 느끼는 게 아닐까. 흙길을 묵묵히 걸으며 단단한 뿌리를 내릴 때, 인생의 폭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힘을 갖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뒤를 돌아보면, 걸어온 그 흙길 위에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있음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그러니 오늘도 묵묵히 흙길을 걷자. 언젠가 우리가 뿌린 씨앗이 꽃을 피울 테니까. 그리고 그 꽃이 또 누군가의 길이 되어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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