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옴과 떠남 사이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오늘은 유니님이 돌아오는 날. 토론토 피어슨 국제공항 도착 예정 시간은 오전 11시 30분. 아직 몇 시간이 남았지만, 마치 내가 떠나야 하는 것처럼 마음이 분주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아침 햇살이 오늘따라 더 밝게 느껴졌다. 달력에 동그라미와 별을 그려놓았던 날짜를 다시 확인했다. 내가 머무는 이곳 집주인인 유니님은 한국을 방문한 지 5개월이 넘었고, 이제 드디어 돌아오는 것이다.
"공항이에요." 짧은 문자 한 줄. 유니님이 도착했다는 신호였다.
마중을 나가고 싶었지만, 공항까지의 이동 거리가 멀고 차편도 불편하니 나오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긴 비행 끝에 피곤할 텐데 괜히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이 계속 불편했다. 반갑게 마중 나갔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대신 아침부터 집 안을 정리하며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마중 나간 아드님을 토론토에 데려다주고 집으로 오겠다는 문자가 다시 왔다. 아무 준비 없이 기다려도 괜찮을까? 따뜻한 된장국에 밥이라도 해둘지 고민했지만, 결국 그만두었다. 내가 분주히 움직이면 오히려 편히 쉬지 못할 것 같았고, 괜한 부담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신 편히 쉬었다가 유니님이 좋아하는 쌀국수를 먹으러 가자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란 늘 복잡한 기분을 남긴다. 공항에 발을 내딛는 순간, 모든 것이 그대로인 듯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진다. 시간이 흘러야만 그곳이 다시 익숙한 '집'이 된다. 유니님도 그런 기분이 들 것 같았다.
현관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유니 님의 얼굴은 여행의 피로로 지쳐 보였지만, 짧아진 머리 때문인지 앳되어 보였다. 아이와 함께 가방을 옮겼다. 오랫동안 머문 시간만큼 짐의 무게가 느껴졌다.
짐을 정리하며 우리는 지난 시간을 나누었다. 하지만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다.
“매일 비슷한 하루였어요. 아침에는 운동하고, 산책을 하며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단순한 생활이었죠. 이렇게 살아도 괜찮구나 싶었어요. 그래서인지 가끔은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떠나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말은 진심이었다. 이곳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편안했다. 연락을 해오는 사람도, 내 안부를 물어주는 이도 없는 이 순간이 이상할 만큼 좋았다. 삶을 주기적으로 리셋하고 단순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실에 놓인 유니님의 여행 가방 속에는 지난 5개월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선물 받은 책, 생필품, 익숙한 양념 세트, 그리고 한국에서 가져온 다른 물건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타임캡슐을 여는 기분이었다.
내가 이곳에 처음 도착했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가방 속에 옷 몇 벌과 꼭 필요한 물건 몇 가지만 넣어서 왔다. 살아가는 데 생각보다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사는 게 이렇게 단순할 수도 있구나." 여행은 내게 그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짐 정리는 금세 끝났다. 몇 달간의 흔적이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집은 다시 예전처럼 익숙한 모습이 되었다. 하지만 짐과 달리 함께 보낸 시간과 감정들은 쉽게 정리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자연스럽게 자리 잡을 것이다.
여행은 단순히 장소를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공간에서 낯선 나를 만나고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경험이기도 하다. 머무르며 떠날 날을 상상하고 새로운 곳을 꿈꾸지만, 언젠가는 떠나온 곳을 그리워하게 된다. 나도 이곳을 떠난 뒤 오늘을 기억하게 될 것 같다.
빠르게 짐을 정리하고, 집안을 오가는 유니님의 모습이 편안해 보였다. 그 순간, 이 공간은 다시 ‘집’이 되어가고 있었다. 짐을 모두 풀고 나니 공기마저 한층 더 안정된 느낌이었다. 익숙하지만 새로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변화를 바라보던 순간, 나는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음을 감지했다.
이제 내가 떠날 차례다. 우리는 때로 머물기도 하고 떠나기도 하며, 마치 여행하듯 살아간다. 익숙한 곳으로 돌아오면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일 것 같지만, 지나온 시간만큼 보이지 않는 변화가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짐을 준비하고 다시 정리하는 사이, 모든 것이 조금씩 달라졌다. 그 변화들이 모여 내가 되고, 삶이 된다. 여행은 끝나가지만, 그 안에서 만난 나와의 여정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