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정말 뜻밖의 소식을 접하게 됐다. 허리나 다리가 불편할 때면 찾아가 침과 뜸 시술을 받곤 하던 동네 한의원의 의사 선생님이, 지난 추석 연휴 동안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그것도 단 한 번의예후도 보이지 않았던 심장질환으로 인해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직 돌아가실 나이는 아닌데, 병원을 찾을 때마다 운동과 건강의 상관관계를 역설하시곤 했던 그 모습이 떠오르면서, '삶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또 한 번의 회한이 몰려왔다.
예감할 수 없는 죽음,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죽음, 생과 사의 갈림길을 망설일 틈도 없이 허망함으로 생을 놓게 만드는 절대자의 냉엄함.
많은 것들이 떠오르는 와중에, 이상하게도 이태 전 늦은 가을 무렵 다녀왔던 '주남저수지'의 철새 무리가 눈 앞에 어른거리는 것이었다. 드넓은 저수지에서 떼 지어 울음 울다가 그대로 하늘로 박차 올라, 한 줄기 선을 만들며 어디론가 날아가고는 하던, 그래서 마치 가을이란 그림의 마지막 한 터치를 해내며 완성하는 것처럼 보이던,
그 철새들 말이다.
그랬다. 이 철새들이 예상치 못한 죽음을 알게 된 이후 자연스레 떠오르게 된 데는, 바로 김광석의 '부치지 않은 편지' 가사가 내 머릿속에 각인돼 있기 때문이었다.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이 자유를 만나 언 강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 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이 자유를 만나 언 강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
내가 한 사람의 죽음과 함께 주남 저수지의 철새 떼들을 떠올리게 된 이유는 필시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라는 가사 때문이었겠고, 이 노래 가사의 원작 시인 정호승 시인의 시가 고 박종철 열사를 떠나보내고 추모의 마음을 담아 쓴 시라 더 그러했을 것이다.
이후 이 훌륭한 원작 시는 백창우라는 또 한 명의 훌륭한 시인이자 작곡자를 만나 더 잘 지어진 옷을 입은 가사로 태어났고, 거기에다 목소리만으로 가사의 진정한 의미를 백 프로 이상 발휘하는 가창자 김광석을 만나, 들을 때마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통곡을 하게 만드는 시대의 명곡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부치지 않은 편지'가 내 가슴으로 처음 걸어 들어오게 된 건 '공동경비구역 JSA'의 OST로 쓰였을 때이다. 이 곡이 김광석 사후에 발표됐기 때문에 왠지 스스로 부른 진혼곡 같아 선뜻 듣기가 꺼려져 잘 듣지 않고 있었는데, 곡의 가치를 잘 살린 OST 선곡에 그만 마음이 무너져내려 버렸던 그 순간을 기억한다.
남과 북의 병사들이 모든 이념과 체제를 버리고 서로 친구가 됐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서로 총구를 겨누며 파국으로 치닫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김광석의 목소리로 울려 퍼져 안타까움을 배가 시키던 그 장면, 아마 이 영화를 보신 분들 중에는 그때 흘러나왔던 '부치지 않은 편지'를 평생의 선곡으로 해 두신 분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거침없이 가슴으로 직배송돼 버리는 한 통의 편지, 그 가사를 찬찬히 곱씹게 된다. 왜 이 절절한 마음을 담은 편지를 부치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끝내 부치지 못한 것일까? '부치지 않은' 은 능동의 형태이나 '부치지 못한' 은 피동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의문은 더 심화된다.
나는 생각한다. 한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이 또 그 죽음이, 차마 받아들일 수 없는 죽음이기에 그에게 추모를 담은 편지를 보내고 싶지 않은 데서 이 제목은 출발했을 것이라고. 어쩌면 숭고한 한 사람이 흘렸을 눈물이 강물이 되고 노래가 돼 남은 자들에게는 이전과는 분명 다른 세상을 열어준다 해도, 그는 이미 망자의 길로 떠나버렸고, 하여 더 큰 아쉬움을 남기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부치지 못한' 이 아니고 '부치지 않은'이라는 제목으로 굳이 명시한 이유가.
부쳐져야만 그제사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는 편지인데 , '부치지 않은' 이란 전제와 '편지'는 제목 안에서만 본다면 꽤 불편한 동거를 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 무거운 어색함과 불균형은 원작의 시에듣는 맛을 입혀 한층 빛나게 한 작사와 곡, 그리고 김광석이라는 힘에 의해 그 설득력을 확보하게 됐다.
노래는 '울림'으로 서사가 증폭되고 노래를 듣는 이들이 그 서사를 이해하기 시작하면 한 번, 두 번 이어지다 끝없이 재생되며 마침내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노래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미덕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로만 봐도 '부치지 않은 편지'가 가진 무한한 서사성은 누군가를 떠나보낸 이의 가슴에 매번 젖어들어 '진혼'이나 '추모'의 소임을 다하면서 그 서사성을 보다 '완성된 방향'으로 이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생의 길 한가운데 서서 '죽음'을 떠올리는일이란 늘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지만, 특히나 그 죽음이 전혀 예감하지 못한 죽음이거나 억울한 죽음일 때 남은 자들의 고통은 천 길 만 길 낭떠러지처럼 아득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김광석, 그가 부르는 '부치지 않은 편지'의 위로는 그 고통을
어루만져주며 눈물로 얼룩진 시간을 잠시라도 멈추게 해 준다.
그래서 오늘도 어디선가 '부치지 않은 편지'는 울려 퍼진다. 더불어 각각의 사연을 담은 이야기는 작은 새가 끌고 가는 한 시절의 풍경과 함께 누군가의 가슴으로 마침내 고이 배달될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