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이 죄는 아니잖아요.

김광석을 듣고 읽는 밤 6/ 불행아

by 초린혜원

한밤, 아무도 없는 고요한 집에 홀로 앉아 욱신거리는 치통과 함께 김광석의 노래를 듣는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좋아하는 음악을 무한대로 들을 수 있는 이 순간이 너무 귀하고 고마운데, 만성적으로 앓고 있는 치통은 이 고마운 시간을 마냥 행복한 순간으로 물들이지 못하게 익숙한 경고를 하고야 만다.


어쩔 수 없이, 방어할 틈도 없이 쉬 잦아들지 않는 육신의 고통은, 가장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음미하는 동안에도 자연스레 행복과 불행의 경계쯤에서 서성대는 한 인간을 발견하게 만든다. '나는 지금 행복한 것일까? 만약 행복하지 않다면 그건, 불행한 것일까?'





저 하늘에 구름 따라 흐르는 강물을 따라
정처 없이 높고만 싶구나 바람을 벗 삼아가며
눈앞에 떠오는 옛 추억 아~ 그리워라
소나기 퍼붓는 거리를 나 홀로 외로이 걸으며
그리운 부모형제 다정한 옛 친구 그러나 갈 수 없는 신세
홀로 가슴 태우다 흙 속으로 묻혀갈 나의 인생아

깊고 맑고 파란 무언가를 찾아 떠돌이 품팔이 마냥
친구 하나 찾아와 주지 않는 이곳에 별을 보며 울먹이네
이 거리 저 거리 헤메이다 잠자리는 어느 곳일까
지팡이 짚고 절룩거려도 어디엔 듯 이끌리리까
그리운 부모형제 다정한 옛 친구
그러나 갈 수 없는 신세 홀로 가슴 태우다
흙속으로 묻혀갈 나의 인생아 / 김광석 불행아


이 노랫말은 머리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가슴에 꽂힌다.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굳이 치통에 시달리는 육신을 핑계 삼지 않아도 바로 이 순간 마치 나의 얘기 같고, 너의 얘기 같은 가사는 우리를 끝 간 데 없는 불행한 순간으로 이동시켜 버린다.


구구절절 불행의 이력을 읊지 않아도 어떻게 태어나서 살다가는 것이 제일 불행한 것인지 알려주고야 말겠다는 것처럼 말이다. 생각해 본다. 1974년 김의철에 의해 만들어져 1995년 김광석 다시 부르기 음반에 실리기까지 이 노래가 담은 생은 얼마나 불행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을까.


소나기 퍼붓는 거리를 나 홀로 걷고, 돌아갈 곳도 없는 신세.. 그야말로 집도 절도 없는 인생길은 마냥 불행하기만 한 것 같은데, 김수영 시인이 어느 날 눈이 쌓인 마당을 보며 불현듯 이렇게 사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거 같다고 느낀, 그 절대적인 순간의 느낌이 과연 두 음절의 명사로 표현될 수 있는 '불행'인 것일까?


凡人은 도무지 알 수 없는 행복과 불행의 국경선, 굳이 나누자면 절대적 행복과 불행, 그 어디에도 속하고 싶지 않아서 애매하고 모호한 모습으로 경계쯤에서 마냥 서성대는 인간형인 내게, 몇 해전 이 절절한 노랫말이 제대로 이해된 적이 있긴 있었다.



'슬기로운 감빵생활'이라는 드라마에서 한 어린 재소자(강승윤 분)의 서사를 위해 이 노래가 ost로 쓰인 것이다. 노래가 이야기라는 옷을, 그것도 감동을 가진 이야기라는 맞춤옷을 입게 되면 파장은 온 우주를 흔들 만큼 커진다. '슬기로운 감빵생활'에서 이곡이 흘러나왔을 때, 나는 무릎을 쳤다! 소름 돋는 선곡이 아닐 수 없었다. 비록 감방에 갇혀있는 한낱 잡범에 지나지 않지만 그의 짧은 인생을 설명하고 납득시키기에 이보다 더 좋은 노래 가사가 있을까?


잡범에 불과한, 일생이 사기로 점철된 그의 내력은 이 '불행아'의 가사로 120% 이상 설득이 돼 버린 것이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쓸쓸함의 감정, 누구 하나 내편이 돼 주지 않는 삶의 고단함, 그런 자신의 삶을 어떤 식으로든 부정하고 싶어 발버둥 치지만, 결국은 도돌이표처럼 제자리로 되돌아오게 되는 가혹한 운명..


거기에 어떤 수사나 설명이 필요할까. 오직 노래 가사 하나만으로 그 재소자의 모든 개인사는 시청자들의 마음에 제대로 균열을 내 버렸으니까 말이다. 허나 김광석의 불행아가 아니었다면 도무지 불가능했을 일. '불행아'는 김광석에 의해 다시 태어난 노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디 그런 노래가 한, 두곡이겠는가마는.....

극중 역할에 대한 인물설명


노래는 한 사람의 이야기일 수도 또 만인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의 가사가 꼭 내 맘을 읽고 쓴 거 같아 우두커니 넋 놓고 들은 적이 우리 모두에게는 있을 것이다. 누구나 돌연, '불행아'의 가사처럼 이 넓은 세상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기분이 들 때가 있었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다 행복해 보이는 데 이렇게 행복한 세상에서 왜 나만 불행한가, 남몰래 고민해 본 적도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세상은 오로지 행복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말하자면 불행한 사람들로 나누어지는 것일까.

인생은 익히 알고 있듯 총량의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 영원한 행복도, 절대적인 불행도 없는 것이다. 그저 각자의 기준에 따라 지극히 행복하거나 불행한 순간을 나누고 있을 뿐. 불행을 마치 원죄처럼 생각하며 들숨과 날숨 하나하나에 새기고 사는 사람들을 본다. 안타까운 일이다. 불행은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 바꿔 얘기하면 행복도 그런 것이다.


불행도 행복도 우리 마음속에서 퇴적층을 이루며 오랜 세월을 견디고 감내하는 힘을 만들어 낸다. 신은 참 놀라운 설계자여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삶의 균형을 이렇게 예비해 놓았다. 그 무게추를 쥐고 있는 건 우리 각자이고. 어느 한쪽에 더 무게가 실리는 날이 있기도 하겠지만 뭐 어떤가, 그게 삶인걸. 누구나 마지막엔 공평하게 흙속으로 묻혀갈 인생인걸.


죽을 것처럼 아팠던 그래서 조금은 불행하다 느껴지기도 했던 나의 이 치통도, 잠잠해지며 어느 순간 행복에 가까워질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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