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나의 사랑에게 바치는 소네트

김광석을 듣고 읽는 밤 9/너에게

by 초린혜원

오랜 시간 음악방송 작가로 일하면서 생긴 버릇, 혹은 습관 중 하나가 바로 드라마나 영화의 ost를 꼼꼼히 분석하는 것이다. 분석이라니 꽤나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은 ost로 쓰인 음악이 드라마의 장면을 얼마나 살리나, 나아가 극의 흐름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쓰임새' 있는 용도로 소용되고 있나, 익명의 감시자가 되는 일이다. 아무도 내게 부여한 바 없고, 주어진 그 어떤 임무도 없지만 은근히 이런 역할을 즐기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면 가끔은 징그러워 흠칫, 놀라기도 한다. 아무튼


최근 '슬기로운 의사생활 2'를 정주행하고 있다. 드라마의 내용만 보자면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파라다이스'를 그리고 있어서 못난 마음에 심기가 자주 불편해지지만(솔직히 이런 의사 선생님들 만나본 적, 손에 꼽을 정도잖아요) 신원호 감독의 이전 작업부터 계속해왔던 생각인데, 연작을 만드는 사단의 음악적 취향만큼은 나와 꽤 닿아 있다는 느낌이다. 적재적소에 배치해 내용을 이해시키고 감정의 극대화로 이끄는 노련함이라니.


음악과 노래는 이런 쓰임새를 통해 새롭게 생명을 연장하게 되기도 한다. 그런데 어제 보았던 한 회의 드라마에서 뇌의 장기기억 속에 들어 있던 김광석의 노랫말이 몽환적 도시의 가로등마냥 깜빡거리며 흘러나오는 데, 얼마나 반갑고 미안하던지!심장이 따스해지고 발바닥이 몽글몽글해지는 것도 모른 채, 배우가 리메이크 한 노래 속으로 스르륵 빠져들었다.


김광석 1집의 수록곡 '너에게'였다. 극 중에서는 안정원 선생과 겨울의 '서사'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로 이 노래를 사용했으리라 짐작한다. '겨울정원'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수많은 이들의 응원을 받는 커플인데, 누가 보아도 부러워질 사랑을 시작했고, 그 사랑은 나날이 깊어져 곧 어떤 결실을 맺으려는 찰나, 직진만 하던 사랑의 궤도가 어쩌면 우회할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이 노래로 대변하고자 한다.


나의 하늘을 본 적이 있을까

조각구름과 빛나는 별들이 끝없이 펼쳐 있는

구석진 그 하늘 어디선가 내 노래는 널 부르고 있음을

넌 듣고 있는지

나의 정원을 본 적이 있을까

국화와 장미 예쁜 사루비아가 끝없이 피어 있는

언제든 그 문은 열려 있고 그 향기는 널 부르고 있음을

넌 알고 있는지

나의 어릴 적 내 꿈만큼이나

아름다운 가을 하늘이랑

내가그것들과 손잡고 고요한 달빛으로 내게 오면

내 여린 마음으로 피워낸 나의 사랑을

너에게 꺾어줄게

나의 어릴 적 내 꿈만큼이나

아름다운 가을 하늘이랑

내가 그것들과 손잡고 고요한 달빛으로 내게 오면

내 여린 마음으로 피워낸 나의 사랑을

너에게 꺾어줄게<김광석/너에게>



개인적으로 김광석이 부른 노래들 중 가사가 가장 예쁜 노래라 생각한다. 맑은 멜로디를 흡수해서 더 투명하게 빛나는 가사는 공기를 타고 울린다. 사랑을 시작한 연인의 설렘이, 무르익는 그 사랑을 약속으로 이끄는 마음이, 가사 한줄한줄에 녹진녹진하게 녹아들어 사랑은 그 이름만으로도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확인시켜준다. 나의 연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내 세상의 모든 것, 그 모든 것들 중에서도 마음을 울리고, 반짝이는 눈빛으로 바뀔 수 있는 것들만 골라서 전해주고픈 마음. 그 순결한 마음이 音을 타고 넘실거린다


사랑이 피어나는 꽃이라면 아마도 이 노래의 가사에서처럼 국화와 장미 샐비어의 몸을 입고 오지 않을까? 아니, 그래야만 한다. 많은 이들이 의문을 품더라도 나는 그렇게 믿을 것이다. 김광석의 '너에게'가 이토록 시린 언어로 설득하고 있기에 믿을 수밖에 없다. 내게도 이런 사랑의 언어, 꽉 찬 밀도의 언어로 고백을 받은 순간이 있었던가?



그 남자의 사랑은 서툴고 불안했다. 다만 여름 내내 편지 속에서 홀로 익어가고 있었을 뿐이다. 유려한 문장으로 길게 써 내려간 편지엔 '낭패'라는 익숙하고도 낯선 비유가 번뜩이고 있었고. 서로 떨어지게 되면 존재가 휘청거리게 되는 전설의 짐승 '낭과 패'를 들어 헤어져서는 안 된다는 인연을 역설하고, 끈적한 사랑을 드러냈던 사람, 취한 두 눈으로 술기운 가득한 세레나데를 끊임없이 부르던 사람. 온몸을 정체모를 꽃향기로 위장하고 누군가 자기를 꺾어 소유해 주기를 바라던 사람.


그가 내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자신을 품고 키워낸 고향의 푸른 바다였을까, 아니면 퍼내어도 퍼내어도 마르지 않을 사랑을 갈구하는 한 소년의 모습이었을까. 그의 고백은 어지러웠고 비릿했으며 다분히 일방적이었다. 두루마리로 배달되어 오던 편지엔 아직 시작도 못한 서투른 사랑이 갈기갈기 찢어져 산화돼 버리는 환영이 내재돼 있었으니. '위험하다, 이런 사랑은'이라, 생각했을 수밖에


오늘, 오랜만에 들은 김광석의 '너에게'는 왠지 가을날 코스모스처럼 순정한 얼굴을 하고, 내 곁에서 흐드러지던 그 어느 시절의 한 사람과 그 사람이 던졌던 무화과 열매 같은 사랑을 떠올리게 했다. 내 모든 것을 보여주고 싶은, 그것이 설령 감추고 싶은 치부라 할지라도 단 한 사람에게만큼은 이해받고 싶은 마음, 그 끝 간 데 없는 절실함. 그런 절실함의 사랑이 오래전 과거의 시간에 화석으로만 존재한다는 게 조금은 쓸쓸한 일이지만, 그마저 없었다면 지금의 내 생은 다시금 김광석의 아련한 '너에게'를 들어도 별 감흥이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지럽고 흥건한 내 밑바닥까지 다~ 보여주고 싶은 사랑은 일생에 한 번이면 족할 것이다. 그런 행운은 아무한테나 오는 건 아님이다. 모든 것을 주고도 모자라 어렵사리 피워낸 생까지 꺾어주는 사랑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숨어버린 것일까. 노래-'너에게'의 헌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오직 한 사람, '너'는 어느 하늘 아래 피어나 이 하루를 환히 밝히고 있을까?


#김광석이 사무치는 날엔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후배 가수 로이킴과 함께 성사된 놀라운 콜라보로 감상해도 좋겠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