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몸,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준비했던 시간들 때문이었을 거다. 아이의 존재를 의사로부터 들었던 그 순간부터 내 신경은 온통 이 작은 생명체에게 집중되었었다. 또래 중 결혼과 출산이 많이 늦은 편이었기에 친구들이나 선배들로부터 '출산'에 대한 방대한 지식이 넘치도록 전해졌지만, 나는 내 아이 맞춤 '출산준비'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좋아는 하지만 열광적으로 빠져들지는 않은 '클래식 태교음악 '을 듣기보다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가수 '김광석의 노래들'이나 비틀스의 노래들을 듣고 가사를 음미했다. 시집을 꺼내(그 시들이 어떤 형태를 띠었든 간에) 아이에게 시를 들려주고 가끔은 슬픔이 가득 차 오르는 프랑스 영화를 보며 훌쩍이기도 했다. 걱정했던 바와는 달리 임신 초기의 몇 주만 빼고 입덧을 비롯한 컨디션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임신을 하고 나니, 호르몬의 변화 때문인지 아니면 마음가짐의 변화 때문인 지는 몰라도 얼굴이 몰라볼 정도로 환해지기 시작하는 거였다. 가끔 올라와 애를 태우던 여드름이 없어지는 건 물론이고 얼굴색 전체가 화사하게 변해 모든 사람들이 "야, 넌 임신 체질이다 야!" 하고 부러워할 정도였으니. 아이와 엄마 간의 임신 궁합이란 게 있다면 아마도 100점 만점에 100점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모든 것이 순조롭고 평화롭게 임신기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대부분이 겪는다는 '임신 우울증' 도 없었고, 늦은 임신에도 임신으로 인한 병증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러한 날들에 감사하며 하루, 하루 출산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병원에서 계산한 아이의 출산일이 너무도 신기했다. 처음 예정일을 들었을 때는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네? 선생님 며칠이라고요? 10월 16일이요?"
10월 16일, 그날은 바로 '결혼기념일'이었기 때문이다. 결혼 한 날, 어쩌면 내 아이가 태어날 수도 있다는 신기함은 곧바로 나뿐만이 아닌 온 가족의 기대로 이어졌다. 엄마는 ,
"아이고 야야, 가가 복덩인갑다. 아무래도"라는 말로 그 기쁨을 표현하셨다. '그래, 엄마. 복덩이, 내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복덩이가 되었으면 좋겠어'
임신 막달, 동생이 결혼을 하게 되면서 엄마는 첫 딸의 출산준비와 막내의 결혼 준비를 하느라 정신없이 바쁘셨다. 그 와중에 연로하신 외할아버지가 자리에 누우셔서 생이 오래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기별까지 받았으니 마음이 굉장히 복잡하지 않으셨을까? 하지만 엄마는 엄마였다. 동생의 결혼 준비 틈틈이 내 출산을 위한 돌봄과 당신의 아버지를 위해 이런저런 챙김을 하는 것, 어느 것 하나 게을리하는 법이 없었다. 내 어머니의 강인함은 익히 알았었지만 그때, 사면초가 같은 삶의 폭풍이 불어올 때도 엄마의 모습은 '의연함'에서 그리 많이 비껴 나 있지 않아 있었고, 아마도 그때 나는 무한한 존경심으로 엄마가 아닌 '한 여인'으로서 엄마의 생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됐던 거 같다.
동생이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살림을 나고 이사를 하고, 그렇게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내 출산 예정일이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이제 한 이삼일 후면 아이를 낳아야 하는 그 어느 날, 갑자기 외할아버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워낙 연세도 높으셨고, 돌아가시기 얼마 전부터 자리를 보전하셨기에 그리 황망한 죽음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내 부모가 한 세상을 건너 다른 세상으로 간다는 일은 살과 영혼의 한 점을 떼어내는 것에 비견되지 않을까. 그런데 엄마는 장례를 치르러 외갓집으로 떠나야 하는 그 와중에도 첫 딸의 출산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걱정을 하시는 거였다
"아이고 야야.. 혹시나 얼라가, 딱 예정일에 나와뿌믄 우짜겠노! 고마 나올라카거등 쪼매 늦게 나오믄 좋을낀데"
"엄마, 걱정하지마라. 원래 첫 출산은 쪼매 늦는다 안카더나! 그라고 또 딱 맞춰가 나와도 개안타. 아무 걱정하지 말고 외할아버지 잘 보내드리고 온나"
이제야 고백하건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뜻은 전혀 그렇지를 못했다. 아무리 나이가 들만큼 들었고 정신적으로 꽤 성숙하다 자부하는 나였지만, 난생처음 겪어야 할 출산 상황에 엄마의 부재라니....... 슬슬 기운이 빠지기 시작했고 하필이면 지금 돌아가실게 뭐람! 외할아버지의 죽음에 애도와 더불어 바보 같은 토를 달기도 했다.
외갓집으로 가기 전 엄마는 신신당부를 하시는 거였다.
"내가 범어동 집에 곰국을 끼리놨거 등? 아 놓을라카면 이기 보통일이 아닌 거라. 그래가 니 몸보신 좀 하라꼬
사태 실한 놈으로 사가, 뒷 고기도 마이 넣고 곰국을 끼리 놨다. 그카이 엄마 없더라도 류 서방하고 가가묵고,집에도 퍼갖고 가서, 마이 묵고 있어라. 대파도 넉넉하게 써리가 넣고. 알겠재?"
친정 부엌 가스레인지 위엔, 뭐든 넘치게 마련하는 엄마의 성정을 그대로 닮은 곰국이 들통에 한그득 담긴 채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숨졌다는 소식을 접하면서도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곧 출산할 큰딸의 안위를 걱정하며 밤새 고아냈을 그 곰국은 그냥 곰국이 아니었다. 정성이었고 오래 고아 더 뭉근해진 사랑이었다. 온몸의 뼈를 빼냈다 다시 맞추는 출산의 고통을 느껴야 할 딸을 위해 엄마의 방식으로 한 '출산준비'였다. 미역을 사두거나, 아이 배내옷을 준비하는, 이런 것들보다 더 찐한 우리 엄마만의 '출산준비'!표현대로라면 '부지런한 사랑'이야말로 바로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그로부터 일주일 정도 내내 곰국만을 먹었던 거 같다. 질리도록 그 곰국을 먹고 또 먹으면서 왠지 모르게 뼈가 단단해지고, 다가오는 출산의 무서움으로 잠시 부스러질 것 같았던 마음이, 탄탄해지는 것 처럼 여겨졌다.
출산예정일을 딱 일주일 넘기고 태어난 아이는 엄청난 기운을 지닌 아이였다. 출산 예정일 이틀 전에 왕할아버지가 돌아가실 걸 알기라도 한 듯 예정일을 가뿐히 넘기고 태어나줬고, 첫 출산은 다들 어렵고 힘들다는 정설 속에서도 비교적 원만하게 세상으로 나와줬다. 그래서 더욱더 많은 이들의 축복을 받았는데, 그중 가장 히트는 엄마의 축복이었다.
"야가, 야가, 태어나면서부터 효녀-ㄴ 기라. 고마 왕할아부지 삼우도 다 지나고 딱 태어나가, 할무이가 지 제시간에 볼 수 있게 만들었재, 그라고 덥지도 춥지도 않을 때 태어났으이께네 산구완 하기도 좋재, 아, 또 뭐 있노? 맞다! 태어난 시도 돼지띤데, 딱 돼지 밥 묵을 시간에 태어나가 복도 많고 잘 살 거라!"
엄마의 곰국 덕분이었을까, 내게도 물론 출산의 고통은 있었지만 아이는 큰 탈 없이 세상으로 나와, 나와의 대면을 느껍게 해 주었다. 노산에다 이전의 아픔인 유산 경험까지 있었지만 너무도 건강하고 예쁜 모습으로 자신이 살아가야 할 풍진 세상에 우렁찬 목소리로 당당히 도전장을 내밀었던 것이다. 외할머니에게 태어날 때부터 효녀라는 칭송을 듣고 자라난 아이는 이 긍정의 '피그말리온 효과'로 인해 참, 탄탄한 아이로 자라났고 그 외할머니의 표현대로 영리한 생쥐의 눈처럼 빛나는 시야를 가지게 됐다. 가끔 아이에게 너는 '곰국의 힘'으로 태어났다고 얘기해주고는 한다. 어쩌면 돌아가신 당신의 아버지보다 태어날 자신의손녀딸이 맞을 시간이 더 소중했기에, 슬픔과 기대가 교차하는 순간을 견디며 오래도록 고았을 내 엄마의 곰국, 그 곰국 같은 진한 사랑이 분명, 출산의 아픔도 잊게 만드는 초능력을 발휘했을 거라고 아주살짝으시대며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