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린혜원 Oct 15. 2021

엄마의 출산준비 원탑, 곰국 1

그 아이가 온 우주를 헤매다 마침내 내게로 왔다.

10월은 내게 굉장히 각별한 달이다. 무슨 일을 도모하기에 앞서 항상 '춥지도 덥지도 않은' 계절을 선호하던 엄마의 영향 때문인지 10월에 결혼을 했고, 또한 하늘이 도와주셨음인지 이 좋은 10월에 아이를 낳았다. 올해는 때아닌 늦더위로 아직도 반팔을 입은 채로 있거나, 서재에서 내려다보이는 나무들엔 단풍 소식이 이제나 저제나 깜깜무소식지만, 10월은 르고 높은 하늘과,  아침 창을 열었을 때 코로 들어오는 박하향의 싸~한 공기만으로도 그 어느 달보다 '설렘'을 안겨주는 달이 아닐까 싶다. 10월의 신부였던 한 여인이 10월의 엄마가 된 그해, 지금으로부터 스물여섯 해 전의 그날로 잠시 돌아가 보려 한다. 유독 다른 달보다 오밀조밀 챙길 것들이 많아 심정적으로 더 빨리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이 10월의 발걸음이, 더 잽싼 쪽으로 바뀌기 전에.


결혼도 처음이고 출산도 처음이었으니 모르는 것이 많았다. 나이만 먹은 데다, 모든 걸 책으로 배우는 타입인 나는 먼저 결혼한 친구들의 넘쳐나는 '출산 정보'를 받아들이고 내 것으로 만드는 데, 애를 먹었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 데, 마음으로는 '그렇게 하면 과연 애한테 좋은 걸까?'라는 의문부호를 늘 달고 다녔으니까. 결혼을 하면서 무리해서 지은 집의 대출이자가 부담이 된 우리(남편과 나)는 한 일 년쯤은 아이를 갖지 않기로 잠정적 합의를 해둔 상태였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첫 출근을 한 날, 담당 PD로부터 아마 다음 개편엔 새벽 방송을 할 수도 있다는 전언을 들었던 거 같다. '새벽 방송이라니!' , 주로 낮시간의 FM 음악방송작가로 일하던 내게, 새벽 방송을 맡으란 건 어쩌면 광역의 의미로 '좌천'이나 다름없는 처사였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분위기상 정규직도 아닌 프리랜서 신분의 내가 '찬밥, 더운밥'을 가린다는 건 힘든 일이었기에 표정을 애써 감추며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요, 뭐 그렇게 하라면 해야죠. 근데 새벽 방송하면 원고료는 오르나요?"


신혼의 즐거움과 행복, 이런  애당초 크게 기대한 바는 아니었다. 늦게 결혼을 했고, 남편과는 한 일 년쯤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해서 결혼을 했기에, 애틋함이나 사랑이 샘솟는 감정 따위도 크게 없었다. 다만 인생에서 반드시 거쳐가야 할 한 과정을 충실하게 또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했을 뿐. 거기다가 우리 집이 덜 지어진 상태에서 시댁에 들어가 5개월 정도 '시집살이'를 해야 했기에 말이다. 매일 새벽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시어머니가 준비해주는 '미숫가루' 한 잔을 마시고 새벽바람과 함께 출근을 했다. 늦가을의 새벽바람은 오히려 겨울바람보다 더 서늘하게 몸속을 헤집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 찬 기운을 맞으면서도 결혼 후에도 일을 할 수 있다는 마음에 저으기 안심이 되던 날들이었다.


새벽 방송은 정오의 방송과는 모든 면에서 그 결이 사뭇 달랐다. 늘 해오던 정오의 음악방송은 항상 활기찬 기운이 넘쳐흘렀었다. 전체 방송 프로그램에서 차지하는 포션도 컸고, 당시에만 해도 작은 사무실이나 일터에서 라디오 방송으로 흘러나오는 음악들을 들으며 '전화 신청곡과 사연'을 보내던 때였기에 두 시간의 방송시간은 몸은 고되었으나, 뭔가 보람은 가득 찬 시간이었던 것이다. 새벽 방송을 3개월쯤 했을 무렵이던가? 정신없이 밀려드는 신청곡을 찾으러 음반실과 스튜디오를 오르락내리락하던 정오의 음악방송이 자꾸만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벽 잠을 깨우려 연신 들이키던 커피에 다친 속은, '역류성 식도염'으로 돌아왔고, 무엇 때문인지 앉지도 서지도 못하겠는 통증이 자꾸 허리 쪽으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김 작가님, 아니 신혼인 사람의 얼굴이 왜 그래요? 남편이 잘 못해주나 보네!"


오래 함께 일을 한 엔지니어의 농담에 정신이 번쩍 든 건, 봄빛이 찬란한 것도 모른 채 맞은 이듬해 5월의 어느 하루였을 것이다. '것이다..'라는 추정을 하는 건, 그날의 기억을 장기기억의 영역에서 자꾸 지워내려 애쓴 흔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방송을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전에없이 어지러웠다. 어릴 때는 병약했지만 커서는 나름 빈혈 같은 건 없다고 자부하며 살던 나였기에 생소한 어지러움에 어떤 공포감이 살짝 일었다. 그리고 바로 아랫도리가 축축해지는 느낌이 왔다. '뭘까, 이건?' 사람에겐 위험을 감지하는 본능의 촉수가 엄청나게 발달돼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직감적으로 병원으로 달려가야 한단 생각이 들었다. 막 다음 방송을 위해 출근하는 작가 후배를 붙들고 친정 인근의 산부인과로 좀 데려다 달라는 부탁과 함께, 남편에게 기별을 해 달라는 얘기도 추가했다. 하혈을 하며 달려간 병원에서 '계류유산'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하늘이 샛노래진다는 게 어떤 것인지 경험할 수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를 가졌었고, 그 아이가 잘 못됐다는 뜻이겠지?' 너무 기가 막힌 상황에 눈물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결혼을 하면서 시작된, 짧았지만 녹록지 않았던 시집살이와, 새 건물을 지어 들어갔기에 압박으로 연속된 거나한 집들이며, 낯선 관계들 속에서 내 위치를 찾아가는 결혼의 여정, 그리고 급변한 일의 환경 등이 복합적으로 미친 영향이었을 거다.


"좀 푹 쉬어야 해요. 그래야 다시 애를 가질 수 있어요."


다정한 의사 선생님의 조언이 귀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어지럽고 메스꺼운 속을 부여잡고 엄마와 함께 친정집으로 가, 그렇게 내리 몇 시간을 자고 일어났고 엄마가 준비한 '미역 찹쌀 수제비 국'을 맛도 모른 채 입안으로 쓸어 넣으며, '어른이 되기란 참 힘든 것이군' 생각했다.  결혼하기 전 내가 머물렀던 방의 창문에 드리워진 분홍색의 고운 커튼과  책상과 장롱이 전하는 익숙한 내음을 맡으며, 낯선 것들의 횡포가 얼마나 놀라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곰곰이 따져보았다. 문 앞에 서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얼굴에 드린 수심은 읽어내지도 못한 채 말이다.


그 일이 있은 후,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새벽 방송으로 내몰린 신혼의 음악방송작가는 품은지도 몰랐던 아이를 잃고 나서야, 일보다,  대출금을 갚는 것보다 조금 더 중한 어떤 게 있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당장 경제적으로 힘들어질 것이 불 보듯 뻔했지만, 아이를 하나만 가지기로 한 잠정적 약속마저 지키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밀려왔기에 과감한 결정이 필요했던 찰나였다. 일을 그만두고 좀 쉬면서 내 생애 다시 오지 못할 임신과 출산을 조금 더 경건히 준비해보기로 했다.


자궁의 온도가 무척 낮아서 착상 자체가 힘들다는 의사의 얘기에 따라 몸을 따뜻하게 해 준다는 한약도 지어 먹고,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려고 지극히 노력했다, 뭔가 하고 있지 않으면 뒤처지거나 낙오자라는 생각도 경계했다. 인생엔 어떤 당연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들이 주어지는 데, 그걸 놓치게 되면 기회는 다시 주어지지 않기에 지금은 내 아이를 만나는 일에 집중하자는 결심도 세웠다. 그렇게 여름과 가을 두 계절을 보내고, 다음 해 1월 "축하합니다. 임신입니다"라는 의사의 말을 듣게 됐다. 만나기도 전에 잃어버렸던 아이와 달리, 이 아이는 하나의 생명이 내 몸속에서 자라고 있단 걸 깨달을 새도 없이 자신의 존재를 알려왔다. 어떤 두근거림으로, 밝은 빛이 사방을 둘러싼 영롱한 꿈으로 말이다. 그렇게 자연스레 아이의 태명은 '꿈돌이'가 됐다.


두번째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커버이미지/pixabay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