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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린혜원 Dec 02. 2021

찹쌀 수제비 먹고 벌떡 일어나렴!

약해진 뼈를 위한 엄마 처방전

지긋지긋한 코로나19지만, 언제 끝날 줄 모르는 기약 없는 전쟁에도 지쳐가지만, 이 코로나로 인해 한 가지 좋은 게 있었다면 아마도 감기와의 이별이 아닐까 싶다. 손이

건조해질 정도로 씻고 또 씻는 데다, 마스크는 문신이라는 우스갯소리마저 떠도는 이즈음이니, 개인위생의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예방할 수 있는 '감기' 란 놈은 거의 2년여째 내 집 담을 넘어오지 못하고 있다. 평생에 감기 한 번 아본 적이 없다는 그래서 감기약을 먹는 나를 이해 못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내게 감기란 계절이 바뀌는 환절기 무렵 예약된 손님처럼 찾아오는 기분 나쁜 방문객이었기에 이즈음 감기와의 한시적 이별이 이렇게나 반가울 수가 없다.



만약 감기의 세상에서 가장 친한 사람 친구를 데려오라는 게임이 있다면, 아마 서로 나를 데려가려고 하지 않을까 싶다. 그도 그럴 것이 남들도 제법 한다는 환절기 감기 외에도 한 여름조차,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으니 말이다. 지독한 삼복더위에다, 더해 맹위를 떨치는 분지의 숨 막히는 습함 속에서도 며칠씩 끙끙 솜이불을 덮고 앓아눕는 게 나였다. 그냥 감기도 아니고 감기를 앓을라치면 열이 40도 가까이 올라가고, 온몸은 근육통과 함께 오한이 드는 그런 몸살감기를 앓는 것이었다. 분명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렇게 며칠씩 마치 심각한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감기 몸살을 하고 나면 볼이 홀쭉해지면서 키도 조금 자라는 듯 보였다. 어린아이의 성장통이라고 하기엔 좀 가혹할 만큼 그 통증은 무시무시한 것이었기에, 어느 해 크리스마스엔가는


"제발 감기에 안 걸리게 해 주세요"


라는 소원을 빌었을 정도니, 이만하면 그 아픔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워낙 병약한 유년시절을 보내긴 했었지만, 유독 삼 남매 중에 나 홀로 이 감기몸살과 친했던 탓에 엄마의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거 같다. 그 귀하다는 감귤껍질을 어디서 공수해왔는지 깨끗이 씻고 말려서 생강과 대추를 함께 넣고 끓인 차를 수시로 마시게 했고, 꽝꽝 언 수돗가에서 나 혼자 뜨거운 물로 손과 발을 씻는 호사도 누리게 해 주셨다. 입은 또 왜 그렇게 짧았던지 안 먹는 게 하도 많아서


" 잘 무야 감기에 안 걸린대~이, 니 또 아푸고 싶나"라는 엄마의 지청구도 달고 살았다. 특히 겨울 초입에 드는 이 무렵이면 엄마가 벌써 , 내가 또 얼마나 심각한 감기에 걸릴 것인지 전전긍긍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내복 한 벌이 헤지면 다른 천을 덧대 기워입는 우리들의 가난한 겨울에, 행여 감기라도 걸리면 이만저만 고민이 아닌 걸 알면서도 염치없이 감기는 자꾸 친한 척 그렇게 나를 찾아오고는 했다. 엄마의 노심초사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번 집 앞을 어슬렁거리던 감기는, 어느새 세력을 확장하더니 어느 해 겨울엔 전에 없이 무시무시한 감기(어쩌면 독감이었을지도 모르겠다)로 변신해 부지불식 간에 나를 점령해 버린 것이었다.



그해는 유난히 추적추적 비가 많이 내리던 겨울이었던 거 같다. 절친한 선배 언니가 크리스마스이브로 결혼식 날짜를 잡더니 일사천리로 결혼에 관련된 모든 일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사회초년생 시절 5년간 근무했던 금융기관에서 한 해 선배로 만나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그야말로 친정언니 같은 절친한 언니였다. 다소 늦은 결혼 소식이 우선은 기뻤고, 친구들을 젖히고 나를 샤프론으로 불러줘서 또 기뻤다. 회사를 그만두고 한 방송사에서 작가 생활을 이어가던 터라 크리스마스 시즌의 특집으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언니의 부름을 거역할 수 없었던 나는, 며칠 원고를 미리 써두고 담당 프로듀서와 진행자에게 눈총을 받아가며 당일 하루는 휴가를 내기로 했다.


절친한 언니의 결혼식이기에 백화점으로 가 다소 비싸다 싶은 정장도 한 벌 마련했다. 정신없이 이어진 결혼식과, 신혼여행도 가지 못하고 곧바로 L.A로 출국하는 언니 부부를 위해 벌인 피로연으로 몸은 젖은 신문지처럼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거기에다 피로연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니 겨울비가 내리는 것이 아닌가, '크리스마스이브에 눈도 아니고 비라니! 뭐, 결혼식날 비 오면 잘 산다니까 축하의 비겠지' 애써 처지는 몸을 일으켜 세우려 이런 생각도 해 보았다.


갓 결혼한 언니네 부부는 피로연 장소였던 호텔에 머무르기로 하고, 샤프론을 담당했던 나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우산을 채 준비하지 못해 흠뻑 젖은 내 육신은 두꺼운 겨울옷, 그것도 비에 젖어 한껏 무게감이 더해진 외투 때문에 금방이라도 길 위에 쓰러질 듯했지만, 타도시에서 잠들 수

없었기에(그날은 크리스마스이브였지 않은가) 상황은 그 후로도 30분쯤 더 비를 맞으며 택시를 잡을 때까지 이어졌다. 집으로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아마도 택시에 올라타는 그 순간부터 몸이 아프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내가 결혼하는 것도 아니었건만, 하루 종일 긴장해 있던 몸이 겨울비에 젖어 부풀더니 풍선처럼 터져버린 것일까, 옷을 자마자 씻지도 못한 채 자리에 누웠는데, 정신이 순식간에 혼미해졌다.



'원인 불명열 40도' 의사 선생님의 진단은 그러했다. 온몸이 아주 실한 방망이로 두드려 맞은 듯, 아픈 데다 속에서 신물이 올라와 계속 토하기를 반복했다. 열이 너무 끓어오르고 추워서 솜이불에다가 엄마가 버리려고 싸 둔 밍크 이불까지 꺼내 덮어도 한기가 가시질 않았다. 크리스마스 예배를 마치고 온 엄마가 이마를 짚어보더니


"아이고 야이야.. 이래 열이 나는 데, 방송국에 가겠나? 원고는 우야노?"


눈에 열이 올라 원고지의 선마저 흐릿한 가운데 쓴 원고는 동생에게 전달을 부탁했다. 그리고 다시 비몽사몽 간에 엄마가 적신 수건을 올린다, 열을 낮추려면 얼음주머니를 만들어야 한다... 같은, 식구들의 웅성거림을 들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해열제를 먹어도 도무지 내리지 않는 열에 오라버니는 나를 차에 태우고는 병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의 '원인 불명열'이라는 진단과 함께, 갖가지 약을 처방받고 정맥주사(주삿바늘이 무지하게 었다)도 한 방 맞았던 거 같다. 그러는 이틀 동안 꽉 맞았던 바지허리가 흘러내릴 정도로 헐렁해지더니 가뜩이나 하얀 얼굴은 푸른기가 돌면서 눈에 띄게 핼쑥해진 것이었다.  


"혜원아, 뭐 먹고 싶노? 아플 땐 무조건 잘 무야 된다. 열을 내릴라카믄 녹두죽이 좋지만도, 엄마는 그냥 니가 묵고 싶은 거 무야 병도 낫는다고 생각한대~이, 뭐 묵고 싶노? 지금"


"엄마 내, 아무것도 못 묵겠다. 시원한 얼음물이나 좀 도!"


"야가, 야가, 무신 소리하노! 얼음물은 안 되고 미지근한 거 무라"


몸에 있던 기운이 다 빠져나간 것처럼, 손가락 하나 들어 올릴 힘이 없었지만 생존본능이 발동했던 것인지, 아니면 이번에 찾아온 이 몸살감기란 놈은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던 때문인지, 목소리를 겨우겨우 쥐어 짜내  한 마디 했다.


"엄마, 그라믄 내 동태탕 끼리도. 감기 걸리믄 엄마가 해주는 거"



엄마의 동태탕은 확실히 효험이 있긴 했다. 언제나 감기, 특히 겨울 감기를 앓을 때, 달아난 입맛을 찾기 위해 엄마가 내놓는 특별식이었다. 김장김치에다가 동태 국물에 만 밥을 서너 숟갈 뜨고 나니, 조금 기운이 돌았다. '약을 먹고 하루, 이틀 이렇게 쉬다 보면 나아지겠지..'는 무슨, 이 놈은 전에 만나보지 못한 독하디 독한 놈이었다. 열은 조금씩 내렸지만 열로 인한 근육통은 그 후로도 자리를 며칠 더 보전하게 만들었다. 베개와 이불을 흠뻑 적시는 땀도 끝없이 흘렀다. 난감했다. 앓다가 잠시 정신이 돌아올 때면 근근이 원고를 써서 동생 편에 방송국으로 보내는 것도 염치가 없었고, 감기가 그렇게까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사람들은 믿으려 들지 않았기에 말이다. 뭔가 후속조치가 필요했다. 하루라도 더 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일상을 회복할 수 있는 어떤 조치.   


"엄마, 내 빨리 방송국 나가봐야 되는데, 새해 특집도 있고.. 뭐 무야 기력을 회복하겠노? 힘이 너무 엄따."


"가마이 있어봐라, 안 그래도 엄마가 니 먹일라꼬 찹쌀 수제비를 빚고 있는기라, 이 찹쌀수제비가 약해진 골을 메우는 데는 최곤기라"


"뭐? 찹쌀 수제비가 뼈를 메운다고? 그거 근거 있는 소리가?"


"있다마다, 엄마만 믿어봐래이"



손도 큰 엄마는 또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먹을 만큼 동글동글 찹쌀 수제비를 빚어내고는, 진한 멸치 육수물을 우린다. 육수가 우러날 동안 미역도 빠락빠락 깨끗하게 불린 다음 빨아서 준비해둔다. 깊고 둥그런 냄비에다 참기름을 두르고 잘게 찢은 북어를 달달 볶은 다음 미역도 함께 넣어 약간의 소금 간을 하고 볶아준다. 육숫물을 더해 보글보글 끓어오를 때까지 기다린다. 한소끔 육수가 끓어오르면 예쁘게 빚은 찹쌀 새알심을 넣고, 국간장으로 간을 맞춘다. 그리곤 새알심이 투명한 색을 띠며 육수 위로 올라올 때까지 끓인다. 취향 따라 들깨가루를 듬뿍 넣어도 좋다.


그렇게 도깨비방망이라도 구한 듯 순식간에 뚝딱 찹쌀수제비 한 그릇이 동그란 밥상 위에 동치미와 함께 올라와 있었다. 며칠을 앓은 탓에 피골이 상접한 얼굴의 나는 어떤 경건한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식사기도를 하고(아프면 사람이 또 종교에 기대게 되는 법이니) 엄마의 야심작 찹쌀 수제비를 한 술 떴다. 참기름과 들깨 향이 코끝을 스치면서 이미 눈이 조금 커진다. 말랑말랑한 찹쌀 새알과 미역, 북어채를 하나씩 올려 입안으로 밀어 넣는데, 왈칵, 가슴이 뜨거워졌다. 분명 열은 내리고 있는 참이었는데, 가슴께는 데인 것처럼 뜨거워지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어떻노? 묵을만 하나? 니 이거 한 그릇 다 무야 된대~이, 그래야 기운 회복해가 나이도 한 살 더 묵고, 일도 하고, 그라고 뭐고..니 그래~하고 싶은 공부도 하고 그칼꺼 아이가"


무뚝뚝한 엄마의 말끝에 찹쌀 새알을 닮은 몰랑한 애정이 스르르~딸려왔다. 스물을 훌쩍 넘기고도 감기몸살에 시달리는 과년한 딸을 위해 찹쌀수제비를 끓이며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어릴 때 잘 챙겨 먹이지 못해서 이 아이는 이렇게 툭하면 감기 몸살에 시달리는 건 아닌지, 혹 이번 몸살은 다른 병증으로 인해 생긴 건가 싶기도 하고, 이래서 시집이나 가겠나.. 걱정과 회한이 한 다발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주름진 얼굴로, 찹쌀 수제비를 힘겹게 뜨는 딸을 바라보며 마음과는 다르게 자꾸만 미소를 짓던 엄마의 모습이 지금도 또렷하다. 몸살쯤은 거뜬히 이겨내고, 늘 그래 왔듯 자신의 자릴 온전히 지켜내는 딸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은 아닐까. 감기몸살을 한 번씩 앓을 때마다, 그 어떤 기적처럼 훌쩍 성장하거나 몸속 찌꺼기를 비워내며 홀가분하게 한 걸음 나아가는 딸의 시간들을, 당신의 가슴 한 편에 기록해 놓아서 이기도 할 거다.



그렇게 심한 몸살감기는 그 이후 크게 앓은 적이 없는 것 같다. 결혼을 하면서 딸이 아닌, 엄마라는 지위를 새롭게 획득함으로 가지게 된 책임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아파서도 안 되고, 아플 수도 없다' 되뇌곤 하던 엄마의 혼잣말과, 그 한 문장에 내포된 깊은 의중을 닫기까지 꼬박 30년 이상이 걸렸나 보다. 내 아이는 부실한 이 엄마보다는 훨씬 더 단단하게 자라나 그동안 찹쌀수제비를 끓일 일도 거의 없었지만, 가끔은 그해 겨울, 온몸이 녹아 없어질 것 같던 한 순간을 조용하게 채워줬던 찹쌀 수제비의 녹진한 맛이 떠오르곤 한다. ' 짓무른 눈에 웃음을 띈 채 딸을 바라보던 내 엄마'의 그 눈길이 그리워 가끔은 부러라도 조금 아파볼까,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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