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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린혜원 Jan 05. 2021

눈(雪) 밭에 앉은듯한 시원함, 겨울 동태탕

이럴 땐 이런 음식/ 으슬으슬 감기 기운엔 동태탕


소한이다. 순수하게 절기로만 따진다면 대한이 가장 추워야 하겠지만, 기후통계 상으로는 항상 이 무렵 즈음에 최저기온을 기록한다고 한다.


일 년 중 가장 추울 무렵, 어김없이 차가운 기운이 엄습해 우리 주위를 감싸고, 온몸이 동그랗게 말리더니 한껏 움츠리게 다. 미약하나마 소한이 이름값을 함이다. 지난 한 해엔 뜻하지 않은 질병과 맞닥뜨리면서, 마스크 착용이 일반화되다 보니 감기를 거의 앓지 않았던 거 같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들 그렇다고 한다.


감기랑 워낙 친해서 혹시 '감기 누나' 아니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곤 하던 나이기에, 이렇게 감기에 걸리지 않는 내가 신기하기도 하다. 마스크 고 손만 잘 씻어줘도 리지 않을 감기였는데, 그렇다면 지난날들의 내 위생상태가 문제였던 것일까? 아무튼 가장 춥다는 소한에 이르고 보니 감기와 짝을 이루는 한 음식이 자연스레 잃었던 입맛을 돌이키려 한다. 바로 동태탕이다.


알고 보면 대단한 부캐, 동태


동태의 원 이름-명태라는 생선은 봐도 봐도 참 놀랍다. 요즘 유행하는 소위 부캐를 아주 여러 개씩이나 갖고 사시사철 우리의 밥상을 공략하는 동시에 책임져주기 때문이다.


명 씨 성을 가진 어부가 잡은 고기, 혹은 이 몸집이 제법 큰 고기를 먹으면 눈이 환해진다고 해서 붙여진 원래의 이름 명태로부터 시작해, 아기 시절엔 노가리 막 잡은 것은 생태, 말린 것은 북어,  반건조인 건 코다리, 겨울철 눈이 날리는 덕장에서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말린 황태, 그리고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동태까지! 그 이름만도 어림잡아 백여 가지 된다고 하니, 정말 놀라운 생선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우리 밥상에서 쓰임새가 다양했다는 반증일 테다.


이 갖가지 베리에이션 중 가장 가성비가 훌륭한 것은 바로 동태가 아닐까 한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크고 실한 동태 한 마리면 네 식구 정도는 한 끼 혹은 먹기에 따라서는 끼까지 너끈히 먹을 수 있을 정도의 탕을 끓일 수 있었기에  말이다.

동태탕이 필요한 시간


동태탕이 생각난다는 건, 머지않아 눈이 올 수도 있음을 알리는 것임과 동시에, 내게는 초대하지도 않은 감기 몸살이 오려고 하는 신호이기도 했다. 나의 어린 시절엔 나뿐만이 아니라 다들 면역력이 약해, 특히 겨울이면 계절성 감기를 앓는 아이들이  많았다. 물론 우리 삼 남매 중에서도 늘 감기몸살은 주로 내 몫이긴 했지만.


병원도 약국도 흔치 않던 때였니, 좀 산다 하는 집에서는 갖가지 한약재를 사다가 민간처방으로 쌍화탕을 끓여먹었고, 이마저도 여의치 않은 가정에선 말린 귤껍질을 이용한 귤차, 꿀차, 설탕 녹인 물 등을 먹었다. '설탕 녹인 물을 먹었다고?'라고 놀라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진짜 그랬다. 설탕마저도 대단히 귀한 시대였기에 플라세보 이펙트가 살짝 포함된 일종의 만병통치약 같은 역할을 했다고나 할까.


난, 그야말로 감기를 달고 살았다.  그것도 온몸에  신열이 끓는 몸살감기를 주로 앓았는데, 며칠씩 앓고 나면 얼굴이 해쓱해질 정도로 심하게 앓곤 했다. 약골인 데다, 이 시절 감기는 자칫 잘못 다루었다간 더 큰 병으로 옮아갈 수도 있었기에 엄마는 감기가 찾아오려고 하거나, 이미 찾아와 열이 오르기 시작했을 때 음식 처방으로 동태탕을 끓여주곤 하셨다.


우리 집은 지금 김광석길이 자리한 방천시장 초입, 골목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엄마는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방천시장에서 갖가지 먹거리들을 사서 돌아오시곤 했다. 문간방에 세 들어 살던 김 씨 아저씨네 채소가게에서 푸성귀들을 사거나 얻어오셨고, 시장 한가운데쯤 있는 어물전에선 이 동태를 비롯한 고등어나 꽁치, 당신이 제일 좋아했지만 비싸서 눈길만 주곤 하던 갈치 등을 아주 가끔 마련해 오셨다. 마련해 오셨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건, 벌이가 시원치 않을 때가 많았다 보니 대부분 외상으로 물건들을 가져오셨기 때문에 그러하다.


장바구니에 동태 한 마리와 콩나물 두부 등을 넣어 대문으로 들어서는 엄마를 보면, 열이  근육통으로 시달리면서도 한편으론 안심이 되기도 하는 것이었다. 엄마가 끓여낼 동태탕 한 그릇이 가져올 약선 효과를 익히 알고 있는 때문이었다. 열이 올라 얼굴이 발개진 나를 보며 엄마는 무심히 한마디 던지고는 동태 손질에 나서신다.


"마이 아푸나? 엄마가 동태탕 끼리니까 한 그릇 묵고 나면  금세 나을 끼다"


엄마의 동태탕 레시피


우리 엄마의 동태탕은 기본적으로 아주 담백한 맛을 지니고 있다. 요즘 식당에서 파는 동태탕을 받아 들고 보면 고춧가루를 많이 써, 한 맛을 추구한 동태탕이 많은 데, 사실 나는 이런 류의 동태탕을 썩 좋아하지는 않는다. 기억 속에 잠재된 엄마의 레시피가 워낙 강한 탓도 있겠지만, 나이가 들수록 담백한 맛을 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신체적 기질과 엄마의 레시피가 적절하게 어우러지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일단 큼지막하게 잘~잘라온 동태는 쌀을 씻으며 마지막에 받은 쌀뜨물에 한  15~20분쯤 담가 둔다. 꽝꽝 언 동태를 잠시 해동하는 역할도 하지만, 엄마 말로는 비린내를 잡아주는 역할도 있단 것이다. 과학인 근거에서 봤을 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 아무튼 나도 이 레시피의 첫 단계를 여전히 지키고는 있다.


그다음엔 탕에 들어갈 재료들을 손질하는 데, 별것이 없다. 무를 나박나박 썰어 놓고, 두부도 크기에 맞게 잘라 놓는다. 다음엔 마지막으로 콩나물 껍질을 다듬어 헹궈놓는다. 대파도 어슷어슷 넉넉하게 썰어 놓으면 완성. 이 소박한 재료들로 끓여내는 동태탕의 맛이 어쩌면 그렇게 기가 막혔는지는 이제부터 얘기할 비법에 들어 있었다.


굳기가 조금 풀어진 동태는 깨끗이 헹구어내서 물기를 빼둔다. 그리고 커다란 냄비에 역시 조금 진하게 받아낸 쌀뜨물을 넉넉히 담고 집에서 담은 된장을 풀어 기본 육수를 만든다. 이때 고춧가루는 아주 조금만 넣어서 색깔만 내는 정도로 한다. 이것이 바로 맛의 중요한 포인트다.


동태란 생선이 가지고 있는 차가운 바다의 청정하고도 깊은 맛을 치지 않으려면, 육수를 따로 내거나 하지 않고 그냥 이 동태만으로 시원한 맛을 내는 게 관건인 것이다. 냄비의 육수가 끓어오르기 시작하면 차례대로 무, 동태 , 두부 등을 넣고 팔팔 끓이다가 콩나물과 대파, 다진 마늘을 넣고 한소끔 더 끓여 먹으면 된다. 심심하다 싶으면 국간장을 넣어 간을 맞춘다.

음식이 약이 되는 순간

동태는 이름에서부터 벌써, 눈이 펄펄 날리는 저 동해 너른 바닷가 어느 마을을 상상하게 만든다. 때문에  한 그릇 든든히 비우고 나면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면서 나쁜 기운이 서서히  몸안에서 밖으로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는다. 한마디로 무겁고 화기로 가득 차 있던 몸이 가벼워지면서 시원~해 지는 것이다. 그리곤 이내 음식이 약의 역할을 나누는 순간이 자연스레 찾아오게 된다.


엄마는 동태탕 한 그릇을 끓이는 순간에도 예의 그 정성스러운 마음을 잃지 않으셨을 것이다.

 '이 한 그릇 먹고 우리 딸이 감기를 떨쳐내야 할 텐데'..

마치 의사가 된듯한 손길로 음식 재료를 준비하고, 약사의 처방처럼 하나하나 순서에 따라 탕을 끓이시지 않으셨을까 한다. 그런 마음으로 만든 음식이니 당연히 효과는 따라올 밖에! 동태탕을 먹고 지글지글 끓는 아랫목에 누워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언제 감기 기운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으니.


동태탕은 자고로 코 끝에 무시무시한 황소바람 한 줄기를 걸치고 먹어야 제 맛이다. 여름이나 가을에 먹는 동태탕은 왠지 시절 음식 같지 않아서 꺼리게 된다.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겨울날, 후루룩 동태탕 한 그릇 든든히 먹고 나면 몸도 건강해지고 기분도 말끔해짐을 느낄 때가 많다.


사무실 인근에 꽤 유명한 동태탕 집이 있어서 자주 동태탕을 점심 메뉴로 고른다는 남편. 그런데 매번 하는 말이 이 집 동태탕도 그런대로 맛은 있지만, 뭔지 모르게 시원한 맛은 찾을 수 없다는 것이. 말인즉슨 내가 끓인 동태탕을 먹었을 때의 느낌, 몸안에 있던 묵직한 그 무엇이 쑥~내려가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는 얘기일 것이다. 에효. 할 수 없군. 좀 있다 실한 동태 한 마리 사러 나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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