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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린혜원 Dec 14. 2020

궁극의 소박한 맛, 배추전

이럴 땐, 이런 음식/김장 끝나면 배추전

 김장 이후에 챙겨놓는 먹거리들


한 해의 큰 양식, 김장을 마무리하고 나면  왠지 마음이 풍요로워지고 부자가 된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한국사람은 밥심'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쯤 되면 '한국 사람은 김치심'으로 살아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김치', 그중에서도 김장김치의 힘은 서민들의 등을 따뜻하게 하고  든든하게 만드는 위력을 발휘한다.


우리  네 식구, 아니 때로는 열 식구도 될 수 있는(우리 집엔 항상 객식구들이 많았으므로) 식구들의 든든한 먹거리인 김장을 끝내고 나면 배추나 무에서 나오는 적지 않은 부산물로 또 다른 먹거리를 만들어 내게 되는데, 엄마는 이것 하나도 절대 허투루 내버려 두지를 않으셨다.


우선은 무청이 그것이다, 깨끗이 손질한 무청은 납작하면서도 널따란 소쿠리에 이틀 정도 널어놓았다가 잘 엮어서 처마 밑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는다. 푸르디푸른 무청이 점점 더 색이 바래고 바싹하게 마르면서 무청 시래기로 변신하면, 겨우내 뜨끈한 된장 시래깃국으로 만나게 된다. 집집마다 무청을 말리는 풍경은 당시엔 한 해의 끝에서만 볼 수 있었던 진풍경이었다.


다음은 김장의 주재료였던 배추다. 못해도 100포기 이상을 하는 우리 집 김장엔 초록에 가까운 배추 겉잎이나 한쪽이 떨어져 나간 배춧잎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중 실한 것들은 배춧국을 위해 간택되고 게 중에서도 조금 험한 잎들은 골라서 배추전으로 구워 먹고는 했다. 예전엔 서울이나 경기도 사람들은 어떻게 배추로 전을 구워 먹냐는 말을 할 정도로,  이 배추전은 우리 경상도의 토속적인 음식이었다.



배추전? 배추 찌짐?


경상도에선 전을 찌짐이라 부른다. 이 지역의 특성상 된 발음이 많아서 어떤 단어든 강한 느낌을 주지만, 찌짐만은 예외로 두고 싶다. 적어도 전보다는 찌짐이 더 기름지고 입에 달라붙는 맛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수많은 찌짐 중에서도 배추 찌짐은 더 이런 느낌을 수긍하게 만들기도 하고.


김장김치를 독에 넣고 동치미도 푸짐하게 담아서 12월을 갈무리한 날이면, 엄마는 잎이 떨어져 나갔지만 넓적해서 찌짐으로 지져내기 좋은 배춧잎들을 수북하게 골라 찌짐을 부칠 준비를 하셨다.


산더미만큼 쌓인 배춧잎들을 보며 저 많은 찌짐을 누가 다 먹을 것인가? 어린 마음에 이리저리 셈을 해 본 적이 있었다. '오빠는 그래도 중학생이니까 세장 정도, 동생은 입이 짧으니까 한 장도 못 먹을 것이고, 뭐든 없어서 못 먹는다는 울 엄마도 세장,  한 장, 그리고 옆집에 다섯 장. 아랫채에 세장....' 아! 이만큼 부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구나.


배추 찌짐은 한 겨울에 먹어야 제 맛


영화 '리틀 포레스트'엔 이 배추 찌짐의 매력이 한껏 드러나는 장면이 나온다. 극 중 배경이 대구 바로 인근인 경상북도 군위여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주인공 혜원의 배추전은 없던 입맛도 돌게 할 만큼 아주 제대로 화면에서 살아, 오감을 그득하게 채워 준다.


눈이 내려 꽁꽁 얼어붙은 밭에서 겨우 찾아낸 배추 한 포기, 속갱이는 된장을 풀어 국을 끓이고 떼어낸 겉잎으로는 밀가루 물을 개어 배추전을 구워서 먹는다. 밥과 배추 된장국과 갓 구운 배추전, 세상에서 가장 소박한 밥상이지만 그 순간의 혜원에겐 잊고 었던 엄마의 맛, 혹은 그립던 고향의 맛이었다. 타향살이에 허기진 몸과 마음을 일시에 채워주는 마법 같은 음식이기도 했고.


영화에서도  친절하게 묘사된 바 있지만, 배추전은 예쁘게 썰어서 먹기보다는 손으로 쭉~ 찢어먹어야만 제 맛이 난다. 찢어먹으나, 썰어 먹으나 무슨 차이가 있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겠으나, 정확한 이유는 나도 모른다. 그저 우리 엄마도 어느 겨울, 배추전을 수북하게 구우면서 말씀하셨다.


"배추전은 아인나, 이래 손으로 쭉~ 찢어무야 맛있는 기라!"

"와? 엄마?"

"몰라, 써리무믄 맛이 엄따. 무조건 찢어무라"

엄마 손맛 그대로 부쳐낸 배추전

그리고 배추전은 이렇게 부쳐야


김장철 무렵 배추는 당도가 최고에 올라있다. 그렇게 단 배추로 전을 부쳤으니 이게 웬만해서는 맛이 없을 리가 없다.

누구나 만들 수 있는 배추전. 허나 모양과 맛을 다 충족하며 제대로 만들기는 생각보다 어려워서 오히려 돋보이는 음식이 바로 배추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추전을 더 맛있게 부치는 방법이 있긴 하다.


우선은 배추에 입히는 밀가루 물의 양을 최소로 해야 한다.  간혹 밀가루 물이 너무 두껍게 입혀져 밀가루 냄새만 나는 배추전을 볼 때가 있는데.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밀가루 물은 아껴도 기름은 아끼지 않아야 한다. 식용유를 넉넉하게 두르고 센 불에서 빨리 구워내는 것. 이것이 맛있는 배추전의 비결이다.


마지막으로는 찍어먹는 간장. 요즘엔 워낙 재료들이 풍부해서 이것저것 많이 첨가한 양념장 수준의 간장들을 준비하는 데, 그러지 말기를 바란다. 양조간장을 베이스로 해서 국간장을 아주 조금만 첨가하고 여기에 식초와 다진 마늘을 취향대로 넣어 만들면 된다. 눈치채셨는가?

물론 내 어머니의 레시피다.

사실, 배춧잎 한 장으로 부쳐내는 전에 양념장이 너무 세거나 복잡하다면 이거야말로 주객이 전도되는 느낌 아닐까 싶다.


시집와서 초고추장에 배추전을 찍어먹는 시댁 풍습이 무척 생경해 적응하는데 애를 먹었다. 초고추장이 딱히 나쁜 건 아니지만, 뭔가 배추전과는 궁합이 맞질 않기 때문이다. 음식 본연의 맛을 죽여버린다고나 할까? 소박하지만 맛있고, 투박한 거 같으나 한편 정갈한 이 배추전은, 고맙게도 내 아이의 소울푸드이기도 하다.



외할머니의 배추전은 어느새 추억이 되고


아이가 초등학교를 들어가고 두 번째 맞는 겨울방학이었을 거다. 차를 타고도 한참을 가야 하는 외할머니 집을 가겠다고, 그것도 혼자 가겠다고 떼를 쓰는 것이었다. 마음이 놓이질 않았지만 항상 아이들은 엄마의 염려보다 앞서 나감을 알기에 모험을 해 보기로 했다. 버스 정류장에는 할머니가 나와 있기로 하고.


그날 아이는 혼자 신비로운 모험의 세계를 경험하고 그걸 멋지게 성공해낸 기쁨 덕분인지 그렇게 텐션이 높아져 있었더란다. 뭐든 잘 먹어서 특히 할머니에게 이쁨을 받던 아이는 할머니에게 김치 짐이 먹고 싶다고 했고, 할머니는 김치 찌짐보다 맛있는 게 있다며 예의 그 어마어마한 배추전을 구워주셨다고 한다.


우리 엄마의 배추전, 바싹하면서도 감칠맛이 나는 배추전을 작은 입으로 오물오물 씹는 아이를 보며 외할머니가 된 내 엄마는, 본인의 자식을 키울 때와는 다른, 세상 사는 맛을 다시금 느끼셨다고 했다. 아이도 그날의 배추전을 잊지 못하고 지금도 가끔 기분이 헛헛해질 때면 '배추전 구워줘. 외할머니처럼'이라는 불가능한 미션을 던져 주고는 한다.


아마도 온전하게 외할머니와 둘이서만 보낸 하룻밤의 추억이, 이렇게 음식과 함께 아이의 기억까지 곱게 채색해 놓은 때문이겠지만.



화려하지 않지만 빈틈없이 미각을 채우는 그맛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주인공 이름인 혜원이, 내 이름과 같아서일까. 내 감정이 오롯이 그녀 혜원에게로 이입되더니 그녀가 서울살이의 고단함을, 그 고단함에서 오는 허기를 채우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와 먹은 첫 음식이 그 어느 것도 아닌 배춧국과 배추전이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영화를 보는 내내 했었던 거 같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빈틈없이 미각을 꽉~채워주는 맛이야말로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단 하나의 맛이기에 말이다.


서둘러야겠다. 배추전은 손끝이 조금씩 시려오는 이즈음 딱,먹어야 제격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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