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연재해 보자 결심을 하고 난 후, 우선 우리나라 밖으로 여행한 지난 흔적들을 찬찬히 훑어보기로 했다.
블로그에 해외여행의 기록은 2013년부터 했기 때문에 그때부터의 기록들은 얼추 남아 있다. 그 이전의 여행의 기록들을 더듬어 보려고 얼마 전에 리뉴얼된 싸이월드에 접속을 시도했다. 그런데, 아뿔싸. 싸이월드가 먹통이다. 순간 훅하고 내 사진첩과 기록들을 어떡하지? 날아간 건가? 아찔해졌다. 급히 검색을 해보니 최근에 여러 법적인 이유들로 인해 싸이월드 도메인이 막혀버린 것 같았다. 복구가 될지 여부도 모르겠다. 몇 달 전 싸이월드가 열렸다고 신나게 옛날 사진첩을 들춰보며 잠시나마 옛 친구들과 톡방에서 그때 사진들을 주고받으며 추억여행을 진하게 했던 터였다. 이렇게 된 이상, 내 기억을 더듬어갈 수밖에 없고 수많은 사진들이 저장되어 있는 외장하드 사진첩을 찾아야 할 텐데 과연 거기까지 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결국, 최대한 기억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2000년부터 시작된 나의 해외여행은 지금 2023년에도 계속 진행 중이다. 지난 23년 동안 다녀온 나라들을 추려보았더니, 첫 해외여행은 일본이었고 태국, 말레이시아, 영국, 스코틀랜드, 호주, 베트남, 캄보디아, 싱가포르, 홍콩, 마카오 그리고 최근 여행도 일본이었다. 그리고 한 나라의 여러 도시를 며칠씩 머물고 몇 번을 방문하면서 충분히 도시를 느끼고 훑고 오는 여행자였다.
내가 다닌 해외여행지들은 대한민국에 산다면 누구나 마음만 먹음 하루이틀 연차를 내고도 충분히 갈 수 있는 곳들이다. 영국, 스코틀랜드, 호주 같은 곳은 좀 멀기 때문에 공휴일과 주말, 연차를 끌어모아서 일주일, 열흘 안에 다녀올 수도 있다. 그리고 휴양지가 아닌, 관광지와 관광객으로 북적이고 재미있는 도심여행지가 대부분이다. 몇 성급 호텔이나 리조트에서 쉬고 하루종일 수영장에서 보내거나 숙소에서 황홀한 자연경관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정적인 여행은 좋아하지 않는다. 어차피 바쁜 삶 속에서 짧게나마 휴가를 내서 떠나온 여행자는 정해진 기간 동안 많은 것을 보고 느껴야 했다. 진정한 '쉼'을 위한 여행이라면 그냥 주말에 가까운 곳에 호캉스로 숙박을 잡고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푹 쉬다 오는 것이 좋은 것 같다. 굳이 비싼 비행기표를 내고 금쪽같은 휴가를 써서 해외까지 가서 푹 쉬다 오는 것이 돈과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한다.
숙소는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들어와 씻고 잠만 자면 될 테고, 여행지로의 이동이 수월한 교통의 요지로 적당한 민박이나 에어비앤비, 저렴한 호텔로 잡곤 했다. 여행지의 구석구석을 두 발로 걷고, 현지인들의 삶 속에 스며들며, 관광지 맛집이 아닌 그저 그런 현지인 식당에서 밥을 먹고, 그들이 믿는 신을 모시는 곳을 찾아가던지 박물관에 들러 역사를 훑어보고 그 나라에서만 갈 수 있는 고유의 유적지를 탐사하는 투어를 선택하곤 했다.
호주 신혼여행 이외에는 모두 자유여행이었다. 패키지여행은 선호하지 않는다. 내가 가고 싶고 머물고 싶은 곳에 더 오래 머무는 여행으로 나만의 맞춤 코스를 짜는 것이 좋다. 수동적으로 끌려다니는 여행보다는 미리 공부하고 알아보고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직접 부딪히는 여행이 좋다. 옛날에는 종이 지도와 여행지를 정리한 프린트물과 수첩을 들고 지도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건물을 파악하고 길을 찾았다면, 이제는 스마트폰 구글지도로 쉽게 길을 찾아갈 수 있으니 자유여행하기에도 얼마나 좋아졌는가! 그래도 헷갈리거나 귀찮아질 때에는 현지인에게 질문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 어쩌다 그들과 친구도 되고 뭐 그런 예측불허의 흥미로운 여행을 좋아한다.
신혼여행도 사실은 자유여행을 가고 싶었지만, 사귄 지 몇 달 만에 이 남자와 결혼을 약속한 이상, 서로의 여행 스타일에 대해 잘 모르는 상황이라 처음 가는 해외여행에서 대판 싸울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신혼여행 패키지 프로그램 중 하루 선택관광이 있었는데 네 쌍의 신혼부부 중 리조트 휴양이 아닌 호주의 테마파크에서 신나게 놀이기구를 타고 노는 코스를 선택한 부부였기도 했다. 그때부터 그의 여행 취향이 나와 비슷함을 감지했다. 신혼생활 3년 중 다수의 여행을 통해 알게 되었고, 우리는 여행에서 늘 쿵작이 잘 맞는 하나의 팀처럼 움직였다. 많이 걷고 많이 보고, 많이 먹고 많이 느끼는 여행. 바로 그거였다. 여행파트너와의 여행의 취향이 참으로 중요한데, 다행히 우리 부부는 그리고 태어난 아들까지 여행 취향이 잘 들어맞는 환상적인 팀이었다.
하루종일 엄청나게 걷고 나서도 쇼핑몰에 들어서면 또 초능력이 생기는 것인지 더 힘껏 돌아다니며 이 나라의 쇼핑몰엔 이런 것들이 있구나 탐닉하곤 했다. 명품을 사거나 쇼핑을 양껏 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그냥 소소한 것들과 이 나라에서 사면 환율 차이 때문에 이득이라는 브랜드가 있으면 좀 들여다보는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여행에 가면 꼭 사 오는 것들이 있으니 그것은 스노볼이다. 흔들어 세워두면 그 관광지의 추억을 생각나게 하는 조형물 위로 하얀 눈가루가 날리는 스노볼은, 나의 여행지 기념품 중 구입품목 1순위였다.
지금도 모아놓은 스노볼들을 보며 여행의 추억에 젖곤 한다.
나는 운 좋게 대학교 졸업식 몇 주 전에 취업이 되었고, 입사 후 회사를 다니는 중간에 상사의 배려로 졸업식에 다녀왔다. 그렇게 일찍 시작한 사회생활은 쉼 없이 이어졌고, 회사를 다닐 때에도, 퇴사 후 다른 일을 준비하고 하게 될 때에도, 바쁘게 사는 그 와중에 내가 숨 쉴 수 있는 돌파구를 '여행'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일을 하고 돈을 버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 좁은 대한민국 땅덩이를 벗어나 보다 넓은 세상에서 다양한 인종의 많은 사람들과 문화적 교류를 하며 어울리고 언어를 교환하며 그들의 나라, 음식, 문화를 탐닉하는 것이 즐거웠다.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 세계지도를 들여다보며 전 세계 많은 나라 친구들과 해외펜팔을 하면서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 꿈을 키웠는데, 현실은 비록 가정과 일에 얽매여 있지만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고 떠나는 그 과정 속에서 그때의 열정이 되살아 나는 것도 같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짧은 여행기간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서 철저한 준비는 당연한 것이었고, 여행을 떠나기 위한 계획은 늘 미리미리 준비했다.
결혼하기 전,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결혼하면 나는 매년 한 번이라도 비행기를 타고 해외여행을 가고 싶어. 이것만은 지켜주었으면 좋겠어."
나중에 남편이 말했지만, 그땐 내가 당시 유행하던 단어로, 소위 말하는 '된장녀'인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함께 살아보니 나는 그다지 명품에 열광하지도 않고 씀씀이가 큰 편도 아님을 알게 되었을 테지. 오로지 여행에 투자하기 위해서 다른 것들을 줄이는 소비습관이 있었다. 그런데 남편과 아들과 살다 보니 본의 아니게 자꾸 들어가는 식비와 사교육비로 인해 자꾸 배가 아프다. 아이 학원비를 결제할 때면,
"이 돈만 몇 달 치 모아도 유럽여행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아, 그런데 내가 시간이 없군."
늘 그런 마음이었다. 현실자각타임.
그런데 점점 나이를 먹을수록, 예측불허의 상황들이 생기기도 하고, 팬더믹을 겪는 동안 몇 년 동안 매년 떠난 여행에 브레이크가 걸려버렸었다. 그러는 사이에 부모님은 점점 연로해지시고 가족이 함께 떠나는 여행의 계획도 여러 가지 상황들로 무산되는 일도 생겼다.
이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시간이 없다. 그리고 늘 쉼 없이 달려온 나에게 최근 갑자기 주어진 평일의 자유로운 시간들을 하루하루 보내는 것이 무척이나 아깝다.
그래서 또 떠날 마음을 먹었고, 날짜를 뽑아보았고 비행기를 예약했으며 일정을 짜고 숙소를 예약했다. 도시 간 연결하는 교통편 예약까지 마무리하고 나니 다음 달 카드값은 생각하지 못한 채 자꾸 웃음이 난다.
남편은 그러겠지.
"이 여자가 또 떠날 궁리를 하는구먼."
또 용기를 냈고, 책임을 지는 여행을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