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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바 Oct 25. 2022

죽음이 말한다, 힘 좀 빼라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긴장을 푸는 것과 같다. 우리는 세상이 마음대로 움직여주기라도  것처럼 온몸에 힘을 주고 살아간다. 어쩌면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빳빳하게 굳은 채로 쓰러져 어두컴컴한 구석에 서있는 죽음에게 눈길을 주면 죽음은 말한다. ‘  빼라고.’


문득 어릴 때 계곡에 놀러 갔던 기억이 났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초등학생 손주들과 잘 익은 수박 한 덩이를 싣고 남한산성으로 차를 몰았다. 꼬불꼬불한 길을 가며 콧속으로 들어오던 이른 여름의 공기에 설레던 게 어렴풋하게 기억난다. 자리를 잡은 곳의 계곡 물이 생각보다 얕자 할아버지는 직접 바짓단을 걷어붙이셨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영차영차 돌을 옮기셨다. 우리 손주들을 포함해 계곡에 놀러 온 모든 어린이들이 그의 날래지만 묵직한 손길로 인해 개울 같던 계곡에 동그란 웅덩이가 생기고 수면이 점점 오르는 것을 경이로운 눈빛으로 지켜봤다. 젊은 할아버지가 부지런히 계곡의 지형을 바꾸는 동안 모두가 첨벙첨벙 헤엄을 칠 수 있을 정도로 멋진 자연 수영장이 생겨났다. 그때 어린 나는 세상이 그렇게 조금의 수고로도 금세 나의 필요에 응할 만큼 호의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러나 삶은 얕게 졸졸졸 흐르는 실개울이 아니라 발을 헛디뎠다가는 금방 휩쓸려 목숨까지 잃고 마는 깊은 계곡이나 거친 강에 가까웠다. 흐르는 속도나 방향을 내 멋대로 조정하기는 늘 역부족이었다. 그걸 깨닫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심한 우울증을 겪으면서 자주 자살충동을 느꼈다.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흐르지 않았고 수면 위에 떠있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무기력한 나날들이 이어졌고 속수무책으로 곪아가던 나는 결국 포기가 최고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물살을 거슬러 힘겹게 헤엄치던 몸에 힘을 빼고 깊숙이 조용한 곳으로 무겁게 가라앉고 싶었다.


흐르는 물결에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면 언젠가는 안전한 뭍에 이르리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물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야 한다, 세상이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은 아집일 뿐이었다. 세상에 대한 이상은 말 그대로 상일뿐이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나 마음속 내가 그리는 나의 모습은 말 그대로 상일뿐 본질일 수 없다. 본질이 아닌 것에 집착하는 것은 주먹을 세게 쥐고 있는 것과 같다. 꼭 쥔 주먹 속엔 아무것도 담을 수 없다. 힘껏 주먹을 쥐고 이를 꽉 깨물수록 우리는 예민해지고 날카로워진다. 어느 것도 신뢰할 수 없는 이들은 늘 날이 서있다.


아등바등 산다는 건 그런 것이다. 무언가를 쥘 것도, 영원히 소유할 것도 아니면서 꼭 붙들고 경직된 채로 산다. 그 손아귀에 힘을 풀면 스르르 손바닥에 자유의 바람이 앉는다. 작은 새가 쉬어가고 꽃잎이 내려앉는다. 온 세상이 손아귀에 들어온다.


“온갖 욕망과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사람은 비로소 온 우주와 하나가 될 수 있다. 욕망과 아집에 사로잡히면 자신의 외부에 가득 차 있는 우주의 생명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죽은 채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법정 스님이 하신 말씀이다. 그래서 불교는 우리에게 쥔 손을 펴서 내려놓으라고 가르친다. 붙잡아도 붙들어 둘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내려놓을 때 온 세상이 손에 들어온다는 걸 부처님은 이미 몇천 년 전에 깨달은 것이다.


나는 세상에 항복하기로 했다. 나의 유한함을 인정하고 세상을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세상은 몇 번이고 나를 배신할 테지만 가끔은 상상조차 못 한 아름다운 선물을 주기도 할 것이다.


죽음에 대해 명상하는 것은 힘을 빼고 수면 밑으로 천천히 가라앉는 것과 같았다. 내 의도로 어쩌지 못하는 온갖 풍파에 휩쓸리며 고통받다가 조금만 밑으로 내려가자 늘 거기 있던 고요가 있었다. 출렁이는 불바다 같던 마음이 잔잔해졌다.


한동안 ‘플로팅이라는 것에 빠져 살았다. Floating 엡솜 소금을 잔뜩  욕조에 들어가  그대로 물에 둥둥 떠있는 것이다. Sensory Deprivation Tank라고도 불리는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물 위에 떠있다 보면 모든 감각이 차단되기 때문이다. 기묘한 이야기에서 일레븐이 초능력을 쓰기 위해 물속에서 감각을 차단시키는 것을 보고 플로팅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플로팅은 모든 감각적 자극이 배제된 상태가 스트레스 관리에 좋다는 것과 엡솜 소금에 여러 건강상의 이점이 있다고 알려지면서 수년 전부터 미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7년 전 시애틀에 살 때 집 근처에도 이런 스파가 하나 생겼었다. 남편과 나는 오프닝 멤버에게 주는 파격적인 혜택 덕에 일주일에 두세 번씩 플로팅을 하며 푹 빠지게 됐다.


플로팅에도 잘하는 방법이 있다. 처음에는 힘을 빼도 몸이 물에 뜬다는 걸 믿고 릴렉스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플로팅을 잘못하면 건강상의 이익은 커녕 손해만 있기 때문에 물에 전적으로 몸을 맡기고 힘을 풀어야 한다. 몸이 긴장한 상태로 1시간 동안 떠있다 보면 부드럽게 풀어져야 할 근육이 오히려 단단히 뭉쳐버린다.


침대와 다르게 물 위에 누우면 금세 몸의 경계를 잊는다. 보통 플로팅 탱크는 성인 남성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 비례도처럼 사지를 활짝 펴도 될만한 크기다. 그렇게 완전한 어둠과 고요 속에 떠있다 보면 어느 순간 어디까지가 내 몸이고 어디서부터가 물인지 가늠할 수 없는 시점이 온다.


명상을 잘해도 그런 순간이 온다. 내 몸의 경계가 사라지고 무한대로 퍼져나가는 신비한 느낌. 어디까지가 나고 어디서부터가 세상인지 알 수 없어진다.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하고 나면 더 빨리 이 시점에 도달한다는 걸 발견했다. 나를 지우면 세상으로 녹아드는 게 더 쉬워지기 때문일까? 그리고 이 느낌은 대체 무엇일까?


윌리엄 블레이크는 순수의 전조(The Auguries of Innocence)라는 시에서 가장 작고 연약한 것들에조차 거대한 우주의 진리가 담겨있음을 말했다.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 속에서 천국을 보려면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순간 속에 영원을 담으라


나라는 하찮은 인간 안에도 그런 우주의 기묘한 진실이 살아 숨 쉬는 건 아닐까? 명상으로 편협한 자아를 잠재워야지만 느낄 수 있는 장엄한 진리 같은 것 말이다.  


바람과 사막, 드넓은 바다, 빛나는 별, 그리고 우주에 존재하는 그 밖의 모든 창조물이 내 안에 살아숨쉰다. 
_파울로 코엘료


꽃잎이 흩어진 강물 위를 둥둥 떠가는 명상을 한다. 나는 이 강을 믿고 있다. 내가 원하는 곳으로 나를 데려다 주리라고. 온 근육들이 말랑하게 풀어지며 어딘가 조인 곳이 풀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충만한 행복과 축복 속에서 나는 확신을 얻는다. 이 여정의 끝이 정해져 있다는 게 얼마나 환상적인 일인지 모른다고. 죽음이 날 기다리고 있다는 게 얼마나 이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드는지.


계획과 통제하려는 헛된 욕심일랑 내려놓고 거대한 우주의 물살에 몸을 맡겨야 한다. 모든  버거우면 눈을 감고 죽음을 떠올리며 조금 밑으로 잠수를 해보는 것도 좋다.  안에서는 흰색 무지개처럼 바닷속으로 꽂히는 햇살과 수면에 그림을 그리는 빗방울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끝이 없는 영원의 바닷속으로 침잠할 것이다. 그때까지 조금만  오래 떠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모든 것이 순리대로 흘러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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